소설리스트

136화 (136/228)

조선왕조실록-선조 

삼려의 난

"전하. 향약은 옛 송나라의 대성현이신 주자가 그 기틀을 잡은 것으로 백성들의 악습을 없애고 미풍양속을 알리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사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향약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격찬하였으나 조정신료들 중에 어리석은 자들이 많아서 선대왕들의 눈과 귀를 막는 바람에 시행되지 못하고 있었사옵니다. 부디 향약을 시행하라는 어명을 내려주시옵소서."

"향약은 해괴한 풍습에 불과하다. 그래서 향약을 시행하는 것은 불가하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불가하다는 과인의 말이 들리지 않는가? 꼴도 보기도 싫으니 어서 나가라!"

"전하. 신들의 충언들 들어주시옵소서."

김진기는 끈질겼다. 이미 한 번 균에게 거부를 당했지만 의외로 많은 신료들이 향약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주도적으로 향약의 시행을 건의했다. 균이 영남학파와 남명학파, 그리고 훈구파를 지원했기는 했지만 경기도와 충청도에 근거를 든 기호사림은 그 지리적인 이점을 바탕으로 조정의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수는 많지만 뚜렷한 구심점이 없어서 단합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던 그들은 끝까지 균을 물고 늘어지는 김진기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거기다 김진기가 제안하는 정책들은 그들의 이익에도 부합했고 향약을 만든 인물 중에 하나가 그들이 신으로 모시는 송나라의 주자였기 때문에 더욱 큰 지지를 받았다.

이는 비단 기호사림만의 일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이황의 경우도 1556년 예안향약을 만든 적이 있기 때문에 영남학파 내에서도 향약 시행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 있었다. 균이 자신의 잔머리를 보여주면서 이황에게 엄포를 놓은 것도 겁도 없이 향약시행을 주장할 지도 모를 그의 제자들을 잘 단속하라는 의미도 있었다.

'저 하룻강아지들이.....!!!'

하지만 그런 균이 벼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김진기 등은 궁녀들을 능가할 정도로 균을 귀찮게 했다. 화가 끝까지 오른 균은 그들을 처벌하고 싶었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균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직접 문을 열고 강녕전을 나서는 것으로 자신이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알렸다.

그렇게 균이 자리를 벅차고 나가고 다른 신하들은 균의 완강한 저항에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김진기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김진기가 원하는 것은 향약의 시행이 아니고 균에게 스트레스를 주어 실수를 유도하고 양반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로 자신의 명성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니 균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김진기가 바라는 일이었다.

'후후후. 그렇게 화를 계속 내거라. 그럴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게 될 테니 말이다. 비록 조정에 명망 높은 대신들도 많고 이황, 조식의 제자들이 많아서 예상보다는 흔들기 힘들다지만 그들도 양반이고 사람이니 내가 그들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한다면 나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내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김진기가 속으로 청사진을 그리고 있을 때 강녕전을 뛰쳐나간 균이 나타난 곳은 자주 들리던 대비전이 아닌 제 사촌 여동생인 정아공주의 처소였다. 원래 대궐이란 곳은 가족관계가 단절되는 경향이 커서 왕족이라면 아기 때부터 독립된 처소를 받고 거기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가정의 경우 식사 때 전 가족이 모여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왕실가족의 경우에는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 일단 서로가 살고 있는 건물이 너무 멀다는 현실적인 문제 외에도 왕족들은 가족이라는 혈연관계보다는 국왕, 왕비, 대비, 세자 같은 공식적인 신분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철저히 혼자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그동안은 정아공주가 아기라서 대비전에서 대비 심씨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었지만 많이 자라난 지금은 유모들로부터 교육을 받는다고 자신의 전각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균의 발걸음도 주로 이쪽으로 향했다.

"전하~."

"오냐. 우리 정아 잘 있었느냐?"

"예. 전하. 오늘도 저랑 놀러가요."

"오냐. 오냐. 어서 가자구나."

한참 유모들에게 예절교육을 받고 있던 정아공주는 균을 보고 쪼르르하고 달려왔다. 유모들의 인상이 찌푸려졌기는 했지만 균과 정아공주 두 사람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균은 정아공주를 살짝 안아들더니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후원을 같이 산책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균의 스트레스 해소방법이었다. 원래 스트레스 해소방법은 취로정에 있던 물건들을 집어던지기였는데 화풀이가 끝난 후 물건을 정리하느라 이골이 난 균은 새로운 해소방법을 찾았다. 그래서 후원에서 쪼르르 돌아다니며 재롱을 부리는 정아공주를 구경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던 것이다.

"전하! 전하! 이 꽃 좀 보세요. 예쁘죠? 예쁘죠?"

"그래. 예쁘구나."

"전하! 전하! 이 돌 좀 보세요. 마치 전하께서 주신 진주 같아요."

"하하하……."

'에휴~! 지난번에 운반하다가 하나 흘렸네.'

그렇게 균은 정아공주의 재롱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서 좋고 정아공주는 답답한 방안에서 하는 지루한 공부에서 벗어나 마음껏 뛰어놀 수 있어서 좋지만 그들을 지켜보는 유모들은 그렇지 않았다. 애써 정아공주를 어르고 달래어 예절교육을 시키는데 균만 나타나면 정아공주의 예의범절이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전하의 친동생이 그렇게 천방치축이라던데 다 이유가 있었어.'

'팔불출 중에서도 왕팔불출이시니 나중에 정아공주마마도 전하의 친동생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유모들이 속으로 흉을 보고 있었지만 균은 이제는 피곤한지 자신의 곤룡포를 잡고 머리를 가누지 못하는 제 사촌동생을 보고 웃는다고 정신이 없었다. 균은 정아공주를 들어 안았고 공주는 곧 침을 흘리며 잠이 들었다. 균은 곤히 잠든 공주를 안고 걸으면서 조용히 생각했다.

'우리 진이도 정아처럼 귀여웠는데 이제 벌써 15살이니 곧 청혼이 들어오겠구나. 그 말괄량이가 곧 시집을 가야 할 나이라니 세월이 참 빠르군. 일단 내가 진이에게 어울리는 적당한 녀석을 골라 놓아야겠구나. 아니면 진이가 하루도 안 되서 소박을 맞고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니…….'

균은 은근히 제 친여동생인 진이의 걱정을 했다. 누구를 닮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천방지축의 말괄량이인 진이가 시집을 가서 잘 살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균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다. 이미 정아공주를 상대로 자신이 팔불출임을 만천하에 공개한 균의 친동생에게 함부로 대할 만큼 간이 큰 인물을 없기 때문이다.

며칠 후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유양호라는 자가 파견되었다. 유양호는 명나라 황제 융경제가 거느린 환관중의 하나인데 무척이나 욕심이 많은 자였다. 그가 조선행을 원한 것도 조선에 가면 은을 뇌물로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조선이 명나라에 약점을 잡혔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균이 장거정이라는 든든한 연줄을 명나라 조정에 가지고 있는데다가 조선의 거의 모든 은광이 다 폐광한 상황이라서 은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다. 단 균의 비자금을 빼고는 말이다. 그래서 조선측이 아무런 뇌물을 바치지 않자 유양호는 이런저런 트집을 잡았다.

균도 자주 먹지 못하는 진수성찬을 대접해도 밥상을 업어버린다던지 그를 환영하는 잔치를 열어주어도 불참을 하거나 조선의 대신들에게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는 등 역대 명나라의 사신 중에서도 가장 심한 행동을 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정인기가 균을 알현하여 그의 악행을 일일이 알려주었다.

"전하. 명나라 사신의 행패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옵니다."

"그래서 도승지는 그에게 뇌물을 주자는 말이오?"

"물론 소신의 생각은 다르옵니다. 가뜩이나 부족한 재정을 중국 되놈에게 줄 필요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하지만 신료들 중에서는 전하께서 명나라 사신을 박대한다는 소리를 하는 자들이 있어서 소신은 그것이 걱정이옵니다."

"일 리가 있소. 다 그렇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주인이 과인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라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이 이 나라에는 제법 많으니 말이오."

정인기 같은 훈구파의 경우에는 사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사대사상이 적었다. 그래서 균은 마음 놓고 명나라 황제를 욕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사림들 특히 기호사림의 경우에는 사대사상에 빠져 자신의 조국이 조선인지 명나라인지 헷갈리는 인물들이 많아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되었다.

사림들이 전반적으로 사대사상이 강한데 그 이유는 그들의 특징 때문이다. 현재 사림들의 특징은 훈구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깨끗하다는 것과 성리학적인 소양이 깊다는 것이다. 성리학적인 소양이 깊다는 것은 중국의 문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게 할 수 있고 그것이 사대사상으로 이어지게 되니 문제가 된다.

그나마 다른 사림들은 그들일 이끌어줄 이황, 조식 같은 대학자라도 있어서 중국의 문화를 선택적으로 수용했지만 기호사림의 경우는 그들에게 깨달음을 줄 대학자가 없이 무차별적으로 중국문화를 수용했다. 그래서 저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고 정인기가 걱정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균은 전혀 걱정이 없었다. 명나라 사신이 까부는 것이야 나중에 장거정에게 알려주면 되는 일이고 사대주의자들이야 이번 기회에 같이 본때를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균은 정인기에게 종이를 하나 내주는 것으로 일을 유양호라는 자를 조용하게 만들리고 했다. 균은 장거정에게 받은 서신중에서 공개되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을 꺼내서 정인기에게 넘겼다.

"이것은 과인과 명나라의 내각대학사 장거정과의 친분관계가 담겨있는 서찰이오. 이것을 보여주면 칙사가 찍 소리도 못할 것이니 도승지가 적당한 기회에 칙사의 기세를 꺽어버리도록 하시오."

"예. 전하."

균에게서 서신을 받은 정인기는 잠시 그 서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칙사 유양호가 병조판서 정세필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었고 분노한 정인기는 그 길로 칙사 유양호를 찾아갔다.

"저는 조선국 도승지인 정인기라고 합니다. 칙사께서는 그간 편히 지내셨습니까?"

"……조선국의 대접이 겨우 이 모양이냐? 대명제국의 황제폐하께서 파견한 칙사는 곧 황제폐하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국왕은 이 핑계 저 핑계을 대면서 나타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접이 좋은 것도 아니니 이런 홀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대신의 반열에도 들지 못하는 자가 나타나 나를 접대하고 있으니 이는 나를 무시하는 처사이고 나가 황제폐하께 불충을 저지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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