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삼려의 난
순간 발끈한 정인기는 조용히 품에 있던 장거정의 서신이 담긴 봉투를 꺼내주었다. 칙사 유양호는 혹시 뇌물인가 싶어서 밝은 표정으로 받았다가 그 내용물을 종이 한 장인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내용물을 보고는 얼굴빛이 사색이 되었다. 칙사의 얼굴표정이 똥 밟은 사람처럼 변하는 것을 본 정인기는 그제서야 본론을 꺼냈다.
"대명제국의 내각대학사이신 장거정공은 우리 전하께서 즉위를 하실 때 칙사로 방문하여 우리 전하와 친분을 튼 분이십니다. 하지만 황도 북경과 조선의 한성부는 3천리나 떨어진 먼 거리이니 이번에 칙사께서 돌아가시는 길에 우리 전하의 서찰을 장거정공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이 계셨습니다."
"아니 저……."
"그리고 이것은 약소하지만 우리 전하께서 드리는 은입니다.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어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신 대인께 우리 전하께서 개인적으로 드리는 것이니 받아두시지요."
장거정의 친필을 확인한 칙사 유양호에게 정인기는 균의 친필서찰이 담긴 종이봉투를 넘겨주었다. 거기에 수고비라는 명목으로 은이 든 주머니를 하나 꺼내서 넘겨주었는데 유양호는 감히 받을 수 없었다. 장거정이라면 현재 명나라의 최고 실세 중에 하나로 명나라의 관료답지 않게 뇌물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인물이다.
그런 장거정과 잘 알고 지내는 듯한 조선왕에게 뇌물을 요구하여 은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장거정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유양호는 정인기가 내미는 은 주머니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정인기는 균의 가까운 친척이며 심복 중에 하나답게 행동했다.
"황…황제폐하의 사신으로 온 자가 공무 중에 어찌 이런 것을 받을 수 있겠소? 국왕 전하의 편지는 내가 잘 전해드릴 터이니 그것은 그만 넣어두시오."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전하께서 개인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원래는 더 빨리 드리려고 했는데 요즘 조선국의 사정이 좋지 못하여 준비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많은 량도 아닙니다. 그래서 대인께 충분한 대접을 못해드려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아니. 그게 말이오."
"혹 너무 적어서 그러신다면 은은 아니라도 다른 패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마침 진주가 있는데 이것도 받으시지요."
정인기는 진주가 담긴 주머니마저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균의 숙부이며 이 나라 최고의 연기자답게 진심으로 받아주었으면 하는 표정으로 유양호에게 진주주머니를 넘겼다. 유양호는 정인기의 표정에 속아서 손에 들기는 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탁자위에 내려두고 손사래를 쳤다. 아무리 재물이 좋지만 지금 정인기가 주는 재물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수 있는 독약이었다.
"아니오. 조선국왕 전하의 성의는 이제 다 알았소. 거기다 장거정공에게 서찰은 잘 전할 터이니 그만 가지고 가시오."
"진주와 은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럼 금은 어떻겠습니까?"
"정공, 그게 말이오."
"조선의 인삼과 면포, 종이는 대국에서도 알아준다고 들었습니다. 금은보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그런 것으로 준비를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가지고 가시기 힘드실 터이니 저희가 사람을 붙여서 북경으로 운반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것도 번거로우시면 좀 시간을 걸리겠지만 북경으로 가는 사신 편을 통해서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 칙사 유양호는 정인기가 주겠다는 뇌물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욕심이 많은 그가 주겠다는 뇌물을 거부한 것은 무척 배가 아픈 일이었지만 장거정에게 알려져 목이 달아나는 것 보다는 나았다. 그래서 정인기는 뇌물을 주겠다는 협박을 계속하여 유양호의 기를 확 꺾어버렸다.
"황제폐하의 측근으로 이렇게 청렴하신 분이 있다니 앞으로 대명제국의 영광이 더욱 빛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정인기. 대인께 진심으로 감복했습니다."
"……."
"그럼 대인. 저는 이만 바빠서 물러가겠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저를 불러주십시오. 흠모하는 대인을 위해서라면 제가 어디 있던지 달려오겠습니다."
"알…알겠소……."
유양호가 뇌물을 주겠다는 협박을 받은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니 그런 것도 협박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유양호는 더욱 배가 아파왔다. 정인기가 떠난 뒤 한참 후에도 그는 아까 전 정인기가 보여준 금은보화들이 생각나서 그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차라리 그런 보물들을 보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것인데 잠을 자려고 해도 눈앞에서 그 보물들이 왔다갔다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겠구나.'
어느덧 칙사 유양호가 한성부를 떠나는 날이 되었는데 그간 잠을 이루지 못해서 그런지 처음 모습에 비해서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이었다. 잠시 칙사를 마중하기 위에 나왔던 균은 그런 칙사의 모습을 한 번 보고는 옆에 있던 정인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음~. 숙부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칙사를 더 괴롭힌 모양이군. 예전에는 숙부도 참 착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보통이 아니군. 역시 정치판이란 사람을 달라지게 한다는 말이 맞는 듯 하구나.'
"도승지. 칙사에게 대접을 너무 후하게 한 듯 하오. 다음부터는 적당하게 대접해서 돌려보내시오."
"전하. 그래도 소신이라서 저 정도로 끝난 것이지, 전하께서 직접 상대하셨으면 칙사가 말라 죽었을 것이옵니다. 설마 최근 들어 과로로 쓰러진 승지들과 사관들이 얼마나 많은지 잊으셨사옵니까?"
"흠! 흠! 흠! 참 날씨가 좋구려."
균과 정인기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칙사를 배웅하고 원래 거만하던 칙사가 균에게 공손한 모습을 보이자 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중에는 병조참의 김진기도 있었다. 이윽고 균과 문무백관들의 마중을 받으며 칙사 일행은 한성부를 떠나서 북경으로 향했다.
한성부 근처 벽제관을 출발한 일행은 그대로 북진하여 개성을 거쳐 평양, 안주를 지나 조선의 국경도시인 의주에 이르렀다. 물론 칙사일행에게는 융숭한 대접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끝내 뇌물을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아쉬움을 가지고 조선 땅을 떠나게 된 칙사 유양호는 잠을 자다가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누구냐?"
"쉿! 대인. 목소리를 낮추어 주십시오. 저는 대인께 득이 되고자 온 사람입니다. 조선의 관리들에게 들통이 나서는 아니 되니 부디 조용히 해주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오밤중에 나타난 괴인은 유양호을 해칠 생각이 없는지 공손한 말투로 서찰을 올려바쳤다. 유양호는 잠시 불을 키고 괴인이 준 편지를 읽어보았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유양호의 얼굴에는 점차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네 주인이 말한 것이 사실이냐?"
"예. 대인. 이미 요동에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흐흐흐. 알겠다. 네 주인에게 내가 흔쾌히 수락하더라고 전하거라. 아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전해주도록."
"예. 대인. 그럼 소인은 이만."
편지를 읽고 괴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유양호는 거만한 웃음을 지으며 편지를 태웠다. 아까 전까지는 만에 하나 조선왕이 장거정에게 자신의 처벌을 요구하지나 않을지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조선왕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유양호는 얼굴에 화색을 띄운 채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 뒤 며칠 후 경복궁 사정전. 얼마 전까지 향약의 시행문제로 첨예한 대결을 벌이던 두 사람은 오늘은 새로운 문제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그것은 바로 며칠 전 떠난 명나라 사신에 대한 대우문제였다.
"전하. 본시 칙사는 황제폐하가 계시는 북경에서 3천리나 떨어진 이 곳 조선까지 황제폐하의 말씀을 전달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는 상국의 신료입니다. 그런데 소신이 들은 바로는 이번 칙사에게 여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비록 여비를 주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사오나 그렇게 칙사를 홀대하는 것은 황제폐하에 대한 불충이옵니다."
"과인이 도승지에게 일러 여비를 주려고 했으나 칙사는 받지 않았다. 받지 않겠다는 자에게 어떻게 여비를 준다는 말인가?"
"그것은 다 정성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옵니다. 지금이라도 사신에게 친서를 보내 사죄의 뜻을 밝히고 충분한 정성을 보여야 함이 지당하옵니다."
"웅성웅성~"
김진기의 말이 떨어지자 사정전 안은 술렁거렸다. 아무리 명나라의 속국을 자체하는 조선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명나라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거의 없어서 그렇게 사대사상이 강하지 않을 때의 일이다. 물론 맹목적으로 명나라를 추앙하는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소수파에 불과한 상황인데 저런 말이 나온 것이다.
그렇게 조정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유리한데다가 문득 전생의 매국노들이 생각이 난 균은 진심으로 발끈했다. 그리고 앞에 있던 서안을 쳐서 큰 소리를 내어 사정전 안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정전을 찌렁찌렁하게 울리는 큰 목소리로 김진기를 탓했다.
"네 놈이 조선의 신하더냐? 명나라의 신하더냐? 어디서 그런 망발을 늘어놓는 것이냐! 고작 명나라의 환관 따위에게 대조선국의 주인인 과인이 머리를 숙이라는 말이냐?"
"그는 일개 환관이 아니라 황제폐하의 황명을 전하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은 칙사이옵니다. 적어도 조선 땅에서는 황제폐하와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옵고 그 예법 역시 그에 준하여 시행하고 있사옵니다."
"예법? 요즘 예법에는 명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바치는 규정도 있고 거기다 명나라의 법규에는 공무 중에 뇌물을 받아도 된다는 규정도 있느냐?"
"그것은 우리 조선이 건국된 이래 이백년간 내려온 관례이옵니다. 선대왕들께서도 누차 계속해 오신 일이고 상국의 조정에서도 다 알고 있는 일이옵니다. 이런 관례를 무시하는 것은 역대 선대왕들께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고 상국의 조정에 무례를 저지르는 것이며 나가 황제폐하께 대한 불충이옵니다."
"자기가 필요하면 예법이던 관례이던 제멋대로 끼워 맞추니 네놈의 말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특히 우리 조선이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신 것은 우리 조선의 국익을 생각하여 내린 결정이지 결코 명나라에 굴복하여 내린 것이 아니거늘. 역대 선대왕들의 위엄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냐?"
의외로 차분한 김진기와는 달리 균은 불같이 화를 내며 용상에서 일어섰다. 지난번 향약의 시행 때도 화를 많이 내던 균이지만 지금에 비하면 얌전한 것이었다. '당장 저놈의 목을 베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균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네 놈이 그렇게 명나라가 좋다면 당장 조선을 떠나거라! 그래서 명나라 환관의 발바닥이나 네 놈의 혓바닥으로 마음껏 핥아 주고 살아라."
"알겠사옵니다. 전하."
"뭣! 뭣이?"
균은 한번 휘청거리면서 고혈압으로 쓰러지는 줄 알았다. 김진기가 살살 약을 올리는 것이 더 있다가는 정신을 잃고 폭주상태로 돌입할 것 같아서 균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기로 하고 밖에 대기하고 있던 내금위 위사들에게 명을 했다.
"무엇들 하느냐? 당장 저놈을 끌어내어 저 놈이 좋아하는 명나라로 보내주거라!"
"전하. 소신은 가지만 이 말만은 꼭 하겠습니다. 조선의 뿌리는 중화에서 온 성인인 기자이옵니다. 기자가 세운 조선의 뒤를 잇는 나라라고 하여 우리의 국호가 조선이 아니겠사옵니까? 따라서 우리 조선은 중원에서 떨어져 나온 분국이며 명나라는 우리의 본국입니다. 이점만은 잊지 마시옵소서. 소신의 마지막 충간이옵니다."
"당장 끌어내라!"
김진기는 위사들에게 끌려 나갔고 화가 난 균도 문을 열고 나가버려 그날 조회는 엉망으로 끝이 났다. 조회가 끝난 후 신하들은 경복궁의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부분 김진기가 심한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균이 너무 화를 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은 정인기는 강녕전으로 가서 균을 알현하기로 했다. 그런데…….
"후후후."
정인기는 듣고야 말았다. 강녕전에서 흘러나오는 균의 조용한 웃음소리를 말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균이 너무 화가 나서 약간 정신병적인 증상을 보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균이 일부러 그렇게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정인기는 주저하지 않고 후자를 선택했다.
오늘 균의 모습은 자기가 아는 균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인기가 아는 균이라면 김진기의 말을 물고 늘어져서 바보로 만들어버리고 끝내버릴 인물이다. 결코 자기가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거기에 조용히 들리는 웃음소리는 이번 일에 균의 마수(?)가 있었음을 알리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