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228)

조선왕조실록-선조

삼려의 난

그날로 김진기는 관직에 쫓겨나 고향인 충청도 부여현으로 돌아가야 했다. 거기에 김진기는 사판에서 삭제를 당하는 벌도 받았는데 사판은 벼슬아치의 명부로 여기에 이름이 없으면 관직에 오를 수 없다. 관직에 올라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삼던 양반들에게는 굉장한 벌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양호한 것이다. 김진기의 죄는 '임금에게 불경한 죄'로 극형에 처해져도 되는 일이지만 균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먼저 기호사림에 해당하는 조정의 신료들이 상소를 올리고 성균관의 유생들이 경복궁 근처까지 찾아와 '아이고! 아이고!'를 외치며 소행(집단시위)을 벌였기 때문이다.

물론 균이 필요하다면 그 정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인물이지만 조정의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기호사림만 들고 일어났다면 모르겠지만 이황의 영남학파에서도 동조하는 자들이 나왔다. 거기다 남명학파마저도 김진기의 처벌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는 균도 동감하고 있었다.

사실 김진기가 한 말은 조선의 양반들 사이에서 그렇게 거부감이 드는 수준은 아니었다. 거기다 약 13년 전에 그보다 더 심한 말을 한 사람도 있었으니 지금의 호조판서 조식이다. 그것이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 사건인데 거기서 조식은 상소문을 올려 명종을 고아, 문정왕후를 과부로 지칭하고 왕이 정치를 못해서 나라가 엉망이라고 직접적으로 지적했다.

당연히 조정이 발칵 뒤집어지고 그 순한 명종이 격노하여 사약을 내리려고 했지만 신료들의 반대로 겨우 무마되었다. 그런 전례가 있는 상황이다 보니 선대왕인 명종의 결정을 후대왕인 균이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는데다가 자칫하면 조식의 목을 죌 수도 있기 때문에 참아야 했다.

그래서 김진기는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고향으로 낙향을 할 수 있었고 균은 이를 갈면서 분을 삭혔다. 한성부와 김진기의 고향인 부여현은 약 400리 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김진기가 자신의 고향집에 도착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균과의 다툼으로 인해서 인지도가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병조참의 영감. 영감이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소생들은 감격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실 수가 있으셨습니까?"

"나라가 도의를 잃고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데 어찌 이 나라의 신료가 된 자로써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내가 아니라도 조정의 안팎에 뜻있는 자들이 많으니 누구인가는 잘못을 고했을 것이니 그렇게 칭찬을 들을 일은 아니네. 그리고 난 이제 관직에서 밀려나고 사판에서도 지워진 자이니 더 이상 영감이라 불릴 수 없네. 다음부터는 주의하게."

"아닙니다. 영감같이 바른 일을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신이 그런 존호를 받지 못하시면 누가 그런 소리를 듣겠습니까? 거기다 영감의 겸손하신 모습에 더욱 고개가 숙여질 따름입니다. 소생의 마음으로는 당장이라도 대감으로 불러드리고 싶사옵니다. 부디 어리석은 소생을 바른 일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허허허……. 나를 과대평가하는군. 하지만 이제부터는 자네들 같은 젋은이들이 이 나라를 위해서 힘써야 할 때이네. 그러니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갈고 닦으며 때를 기다리게. 언제가는 자네들이 나라를 위하여 크게 쓰일 일이 있을 것이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대감."

김진기가 부여로 향하는 곳곳에서 이런 대화들이 이루어졌다. 김진기가 한 일이라고는 향약시행의 촉구와 칙사 대접에 대한 개선. 이렇게 단 두 가지를 단지 건의한 수준에 불과하지만 균의 즉위 이래 점차 강화되는 왕권과 중앙정부의 힘에 불안을 느끼던 기호사림의 양반들에게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래서 김진기는 그의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짧은 기간 내에 상당한 수확을 거두었고 조정과 각 지방의 많은 양반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그는 곧 기호사림의 대표적인 인물 중에 하나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기호사림에 뚜렷한 구심점이 없기는 하지만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영감. 오셨습니까? 무탈하신 영감의 모습을 뵈오니 소인들은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옵니다."

"그래. 그래. 별일은 없었는가?"

"예. 영감. 다 영감께서 지시하신 대로 일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정재곤과 그의 패거리들이 합세하여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오~! 괴산의 정재곤이 승낙을 했다는 말인가?"

김진기는 정재곤이라는 인물이 합세했다는 것에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정재곤은 괴산에 사는 사람인데 서얼출신이다. 그래서 제법 무재가 있는 인물이지만 무과에 응시를 해보아야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과거를 포기하고 자신과 비슷한 입장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술로 세월을 보내던 인물이었다.

마침 자신의 군대를 지휘할 사람을 찾고 있던 김진기는 정재곤의 패거리에게 눈독을 드렸다.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쓸만한 장수감들인데다가 서얼이라서 나중에 일이 생기면 제거하기도 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진기가 상경하면서도 영입을 위해 공을 들이던 인물인데 결국 김진기에게 합세한 것이다.

"하하하.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한성부에서 좋은 일이 있고 나서 고향에 돌아오니 또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니. 그럼 그들을 먼저 만나보아야겠다. 그들을 사랑채로 불러오거라."

"예. 영감."

잠시 후 김진기와 만난 정재곤은 척 보아도 제법 쓸만한 장수감으로 보였다. 정재곤은 괴산에서는 상당히 알아주는 인물로 괴산군수가 관내에 호랑이가 출몰하면 호랑이 사냥을 부탁할 정도였다. 그래서 신분의 한계로 과거를 치루지 못했을 뿐 무과에 응시하면 급제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재주가 있는 그였기에 자신에게 출세할 기회를 주지 않는 기존의 권력층에 대한 불만이 컸다. 조선의 반란 중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신분이 서얼인데 거기에는 신분차별이라는 벽에 부딪쳐 제대로 그 재능을 피지 못하는 그들의 한이 서려있었다. 그래서 정재곤도 아주 쉽게 김진기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다.

"그래. 잘 생각했네. 자네 같은 인재가 이렇게 시골에서 썩고 이 나라가 이렇게 혼란스럽지 않은가? 이제 곧 좋은 세상이 옳 것이니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그때가 되면 내가 섭섭하지 않게 보답하겠네."

"영감마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동안의 울분이 조금이나마 씻기는 듯합니다. 이 정 아무개 견마지로를 다하여 영감마님을 돕겠습니다."

"하하하. 고맙네. 그것은 그렇고 자네가 지휘하게 될 병사들은 보았는가? 자네가 보기에 어느 정도면 준비가 끝날듯한가?"

"그것은 최소 1년은 더 기다리셔야 할 듯 합니다."

정재곤에게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웃음을 짓고 있던 김진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정재곤은 그런 것에 괘념하지 않고 자신이 본 모습을 천천히 말했다.

"처음에는 저도 중앙군 소속의 병사들이라고 하여 많이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유약한 서생들뿐이고 왜 중앙군에서 쫓겨났는지 알만한 자들이었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차라리 그들을 해고하고 영감마님의 노비들을 훈련시키는 편이 더 낫다고 봅니다."

"그것은 안 되네. 나도 그런 점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해고하면 우리에 대한 소문이 조선팔도에 퍼질 것이야. 그러니 어렵더라도 그들을 훈련시켜서 빠른 시일 훌륭한 병사들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네."

"에.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일 년의 시간이 있어도 쓸만한 군대로 기를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자네는 할 수 있네. 아니 꼭 해야 하네. 자네도 지금의 상황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리한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김진기의 말에 정재곤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일단 봉기군의 수장이 될 김진기는 그 명성이 높아져 충청도 일대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거물이 되었고 다른 지역에도 그 이름 석자를 알리고 있었다. 반면 균은 양반들의 이익을 제안하는 정책과 행동으로 인해서 양반들의 지지를 많이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거기다 곧 추수철이라서 김진기에게 시기적으로도 유리하다. 당시 조선의 경우에는 이모작이 일반화 되지 않은 상황이라서 균의 내수사전과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서 다음해 봄까지 농민들이 할일이 많이 줄어든다. 그래서 추수가 끝나고 나면 식량과 인력이 많이 남게 된다.

따라서 김진기가 올해 추수가 끝나고 군사를 일으킨다면 여러 가지로 유리하다. 김진기를 추종하는 양반들이 같이 군사를 일으킬 가능성도 높아지고 김진기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군량미와 병사들도 1년 중 최고치에 달한다. 이렇게 반란군은 추수철에 최대 전력을 동원할 수 있는 반면 관군은 불리한 점이 많다.

수도 한성부는 막대한 식량을 소모하는 소비도시이다. 한성부의 식량은 주로 남쪽에서 보내오는 식량에 의존하는데 추수철이면 한성부의 식량사정은 최악이 된다. 이때 일어난 반란군이 충청도를 다 장악한다면 남부지방에서 한성부로 가는 보급선이 끊어진다. 따라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후방이 불안해진 관군은 마음 놓고 대규모 토벌군을 파견하기 어려워진다. 그렇게 추수철은 반란군에게 여러 가지로 유리한 여건을 보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기 가장 좋은 때가 바로 추수가 끝난 직후네. 내 토지에서 거둔 수확은 군량미로 사용하고 토지에서 일하던 일꾼들은 병사로 동원할 수 있으니 나는 부담 없이 군대를 일으킬 수 있네. 거기다 다른 양반들도 사정은 비슷하니 추수철에 봉기를 하는 것이 우리가 최대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병사들이 무기를 잡을지 모른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최소한의 훈련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훈련은 일단 거사를 일으키고 나서 해도 늦지 않네. 일단 우리에게는 무기가 부족하니 봉기를 한 후 관아를 털어 식량과 무기를 확보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이네. 물론 조정에서 토벌군을 파견할 생각은 하겠지만 우리가 봉기하면 남쪽으로 통하는 수륙의 교통로가 모두 막히는 격이니 조정은 남부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북부지방과 중부지방인데 그 두 곳의 인구와 경제력을 합쳐도 남부지방의 인구와 경제력을 능가하기도 힘들고 북부지방의 경우 여진족을 경계하느라 군대를 동원할 수 없으니 관군의 동원병력에는 한계가 있네. 거기다 우리가 식량공급을 막으면 한성부의 민심이 흔들릴 것이니 관군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더욱 줄어들겠지."

"그렇게 조정의 소규모 토벌군을 깨트리면 영감마님을 따르는 이들이 늘어나고 병사들의 훈련도가 높아져 봉기군의 전력은 강하질 것이고 충분한 병력을 모았다고 생각하면 겨울철의 얼어붙은 한강을 넘어 한성부로 진격하실 계획이십니까?"

"하하하. 자네도 잘 아는구만. 그래. 이번 일은 정말 해볼만한 일이야. 아무리 따지고 보아도 우리가 유리하지 않은가? 조선의 수많은 양반들이 다 우리의 편이고 시간도, 지리도 다 우리의 편이네. 거기다 하늘도 우리를 도우셔서 왕의 실수가 잦으니 우리가 패할 이유가 없네."

"그렇게는 합니다만……."

김진기의 설명을 들은 정재곤은 거의 완벽한 계획에 김진기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지만 찝찝한 느낌은 어찌 할 수 없었다. 일단 반란군은 언제나 정부군에 비해서 불리한 입장에서 대결을 시작한다. 그러기에 성공한 반란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이 보아도 반란군이 유리한 점이 너무 많았다.

"어허~! 이사람. 나이가 많은 나도 별로 걱정이 없거늘. 젊고 패기에 한 장수가 그렇게 소심해서야 쓰겠나? 다 네가 여러 번의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니 그만 따르게."

"알겠습니다. 영감. 일단 저와 제 친구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쓸모없는 병사들을 정예병으로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래. 자네를 보니 당장이라도 그 오합지졸들을 정예병으로 기를 듯 하구만. 나 김진기 자네만 믿겠네."

"예. 영감.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정재곤이 물러간 후 김진기는 인자한 표정을 버리고 야심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정재곤이 떠난 방향을 보고 조용히 생각했다.

'멍청한 놈. 네가 미쳤다고 서얼인 내 놈에게 부귀영화를 나누어 주겠느냐? 중앙군은 예상보다 강하다. 네놈들은 주력군이 훈련을 하는 사이 중앙군과 서로 상잔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상처 입은 중앙군을 내가 지휘하는 대군이 밀어버린다면 이씨왕조를 끝장낼 수 있다. 후후후.'

그렇게 김진기는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앞에 있던 서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번 읽고는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은 벌써 화려한 대궐을 거드름을 피우며 활보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 반짝거렸다.

흔히들 천방지축 마골피라고 해서 조선시대 천민들이 가진 7가지의 성이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제시대 때 생겨난 오류 중에 하나로 1985년 조사에서 축씨와 골씨는 아예 없었고 나머지 성들도 벼슬자리에 있던 조상들이 나타나 그 동안의 통설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여기 있는 피시상이라는 인물도 그의 조상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피득창이고 그 가문의 시원은 고려말기로 거슬러간다. 약 700년 전부터 피씨라는 성씨를 가지고 있던 셈인데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성씨를 가진 것이 조선 말기이고 성씨가 일반 평민들에게 보편화 된 것이 임진왜란 때의 일이니 그들이 천민일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피시상은 정재곤의 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그도 정재곤을 따라서 김진기의 사병을 지휘하는 장수가 되었는데 무술은 아예 못하고 책 읽기는 좋아하여 능력은 부족하지만 정재곤의 군사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피시상이 보기에도 자신들이 맡은 병사들은 한심했다. 거기 한술 더 떠서 출전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들은 피시상은 정재곤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 여부를 물었다.

"이보게. 재곤이. 아니 주장. 자네는 전군을 지휘하는 대장이니 우리 군대가 언제 출정하는 지 잘 알겠지?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곧 출정한다고 하던데 정말 사실인가? 분명히 헛소문이겠지?"

"군대의 출정은 내가 아니라 김진기 영감이 결정하는 문제라서 나는 잘 모르네. 하지만 지난번에 들은 바로는 저들을 훈련시킬 시간이 많이 없는 듯하이."

"자네. 아니 주장도 알겠지만 저들이 병사들로 보이는가? 어떻게 저들을 이끌고 출정을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저들에 들어가는 돈은 상상을 초월한다는데 그런 부대를 함부로 운영한다니 영감께서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것 아닌가?"

피시상이 걱정스런 모습을 보이자 정재곤은 그에게 김진기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피시상은 내심 몇 가지가 걸렸지만 충분히 일리 있는 계획이었기에 정재곤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친구인 정재곤이 병사들의 훈련문제로 고민이 많은데 별로 중요할 것 같지도 않은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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