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228)

조선왕조실록-선조 

삼려의 난

고공은 전 내각대학사(명나라의 재상)로 재직하면서 명나라의 권력을 한 손에 쥐었던 인물이며 장거정의 학문적 스승이며 정치적인 동지인 전 내각수보(명나라의 수상) 서계와는 정적이라고 할 정도로 대립하였다. 그래서 작년과 올해에는 서계와 고공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러 두 사람이 모두 차례로 사임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서계가 올해 7월에 내각수보의 자리에서 사퇴를 하면서 어부지리로 장거정이 명나라 조정의 실권자가 되기도 했지만 아직 고공의 영향력은 조정 안팎에 남아있어 장거정이 운신하는데 불편함이 많았다. 아직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인 고공이 사는 곳에 한 명의 사람이 찾아왔다. 조선에 칙사로 다녀왔던 태감(높은 벼슬의 내시) 유양호였다.

"고대인,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대가 여기에는 웬일인가? 내가 환관들을 싫어한다는 것은 태감인 그대라면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각(명나라 조정)과 사례감(환관들의 관청)이 반목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다 같은 황제폐하의 신하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고공은 유양호를 보고 이마를 찌푸렸지만 직접 찾아온 사람을 너무 박대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유양호의 말대로라면 국익에 관련되는 이야기라니 한 번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공은 내키지는 않지만 유양호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인. 혹시 대학사 장거정공과 조선국왕이 서로 소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십니까?"

"장거정 그 사람이 말인가? 대강 이야기를 들어본 것도 같구만."

"예전에 장거정공이 한림원 학사로 있을 때 조선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갓 즉위한 조선국왕을 만나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북경에 온 조선사신들이 황제께 예물을 바친 후에는 장거정공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런 것이야 서로 교분을 쌓는 것인데 문제가 될 것이 있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국왕의 행보입니다. 제가 듣기로 조선에 내전이 임박했습니다."

"뭐?"

경박한 환관을 만나는 자리라서 더욱 근엄한 모습으로 대화에 임했던 고공은 유양호의 말에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에서 남쪽 국경인 운남까지 거리는 약 1만리에 달한다. 하지만 조선과의 국경인 압록강까지는 고작 2천리. 덕분에 조선의 변란이 명나라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자세히 말해보게!"

"예. 대인. 새로 즉위한 조선왕 이연은 선왕과는 달리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취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지방의 양반사대부들과 대립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조만간에 국왕과 양반들 간에 대규모 무력충돌이 예상됩니다."

"대규모라면?"

"조선남부의 양반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십만의 대군을 만들어 조선의 수도를 공격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고공은 반란군이 십만이나 된다는 소리에 입을 딱하고 벌렸다. 반란군이 십만이면 토벌군도 그 정도는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그 정도면 총 20만인데 명나라도 쉽사리 동원하기 어려운 대병력이었다.

그런데 그런 군대가 황제께서 계신 북경에서 고작 수천리 밖에 안 떨어진 곳에서 싸움을 벌인다니 고공은 조선의 반란이 명나라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느라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유양호는 참을성 있게 고공의 말을 기다렸고 고공은 한참 뒤에나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음. 보통 일이 아니군. 그런데……, 이번 일에 대해서 자네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예. 대인. 사실은 제가 조선의 양반들로부터 언질을 받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잠시 귀를 좀."

유양호는 고공의 귀에 자신이 받은 밀서의 내용을 소근 거렸다. 고공은 유양호의 말을 듣고는 얼굴빛이 환해지더니 크게 반색하였다.

"허허허.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명나라가 반란군을 지원하여 반란이 성공하면 조선국왕과 연결된 정거정은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게 되고 새로 조선에 집권한 자들은 대의명분을 쌓기 위해 더욱더 우리 명나라에 충성을 하게 되니 우리 명나라에도 득이 되고 나에게도 득이 되어 일석이조라는 말이 아닌가?"

"예. 대인. 그렇습니다. 거기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압록강에서 분쟁이 일어나도록 하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언질이 있었습니다."

"아주 좋은 계획일세. 허허허."

고공이나 유양호 모두 만족스러워 했다. 고공은 정적인 장거정을 꺾고 정권을 장악하며 조선에서 명나라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스러웠고 유양호는 얄미운 조선의 도승지와 그 뒤에 있는 조선국왕에게 복수를 할 수 있으며 더불어 고공에게서 정치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세부적인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명나라에서 장거정과 균의 연합에 대항하는 두 사람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취로정 근처의 연못은 아름다웠다. 벌써 가을철이라서 취로정 근처의 나무들이 단풍이 들어서 알록달록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무들의 모습이 취로정 연못에 비치니 잔머리를 굴린다고 정신이 없는 균의 마음속에도 감수성이 생겨나는 듯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전하. 충청도 일대에 헛소문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소신이 김형중 대방에게 일러 역소문을 흘리라고 했기는 하지만 막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송상이 개입하고 있겠지? 우리 조선에서 내 탐보망을 교란할만한 능력을 가진 존재는 송상밖에 없으니 말이다."

"예. 전하. 그 쪽에서 올라오는 보고 역시 송상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내용이 많사옵니다."

"송상이 제 무덤을 파는 군."

균은 박규남의 보고를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창밖의 연못에서 눈을 때지 못했다. 균이 뛰어난 잔머리를 자랑하기는 하지만 가끔은 머리가 멍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여러 가지로 머리를 식혔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김진기의 움직임은?"

"비밀스럽기는 하지만 꾸준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다른 양반들과 접촉하는 횟수도 많이 늘어났고 그 휘하의 사병들도 훈련량이 부쩍 늘어서 첩자들 중에서 탈진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럼 송상과 김진기를 제외한 전국의 동향은 어떠한가?"

"소신의 탐보망과 나상의 조직을 이용하여 조사한 결과 앞서 말씀드린대로 충청도에서 움직임이 유난히 많고 그다음이 개성입니다. 그 외의 지역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만 아직 탐보망이 미비하여 자세한 사실을 알기 힘듭니다. 하지만 함경도와 평안도의 북방군들은 지난번 전하의 조치로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옵니다."

사실 송상의 송민진이 연계한 것은 북방의 이동영이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처했던 이동영이 반란을 일으킬 시도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송민진은 일부러 상당수의 보부상들을 충청도에 풀어서 자신의 의도를 숨기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균이나 박규남은 충청도 일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한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다른 곳에서 겁도 없이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야."

"소신도 명심하고 있사옵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다른 지역의 탐보활동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사옵니다."

박규남의 말을 들은 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반란이란 것은 언제 어디서 일어날 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 어이 없이 일어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조선에서 반란을 제대로 일으킬 능력이 되는 사람만 어림잡아 수천 명은 되는데 균에게는 그들 모두를 감시할 능력이 없었다.

단지 각 지역의 민심의 동향을 살피는 정도가 한계였고 그것은 역대 조선왕들도 해왔던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전국에 비밀경찰을 쫙 깔아버리고 싶지만 현실성이 없었다. 설사 그런 정보망이 있다고 해도 교통 통신시설이 뒷받침 되지 않는 이상은 있으나 마나한 것에 불과했다.

취로정에서 돌아온 균은 어의 양예수를 호출했다. 건강하다 못해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튼튼한 균이 갑작스럽게 호출을 하자 양예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급히 의료기구를 챙겨서 달려왔는데 그의 예상대로 균은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자신을 맞아주었다.

"전하. 불러 계셨사옵니까?"

"그렇소. 어의. 요즘 과인의 몸이 편치 않아서 잠시 온천에서 휴식을 취했으면 하오."

"……."

균의 말에 양예수는 무엄하게도 할말을 잊었다. 보통의 왕들이라면 매일 골골대면서 서류에 치어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눈앞의 소년은 매일 밤새도록 일을 하면서도 체력이 남아서 승지들과 사관들을 괴롭힌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조선 최고의 의원이 자신이 보기에도 웬만한 내금위 위사들보다도 더 건강해 보이는 균이 온천에 가겠다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양예수는 한참 후에나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송구하오나 전하. 어디가 편치 않으신지……."

"어의. 이리 가까이 오시오."

양예수의 말에 균은 양예수를 가까이 오게 하고 그의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균의 말을 들은 양예수는 그제서야 이해를 하겠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예. 전하. 즉시 준비를 하겠사옵니다."

균이 있는 강녕전을 빠져나온 양예수는 즉시 내의원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의관과 의녀들을 모아서 온양행궁으로 행차가 있을 것이라고 알렸다. 그러나 의관과 의녀들도 모두 건강한 균이 요양을 떠난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고 어느 의관 한명이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어의 영감. 소생이 알기로는 주상전하의 옥체가 미령하신 곳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하온데 요양을 떠나신다니요? 거기다 조정의 대소신료들도 반대를 할 것이니 요양을 함부로 떠날 수 있겠습니까?"

"허봉사. 이리 가까이 오게."

내의원 소속 봉사(종 8품)인 허준은 자신이 하늘보다도 높은 상관의 심기를 거스리지는 않았는지 걱정을 하면서 양예수에게 다가갔다. 양예수는 까마득한 후배 의관을 한번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전하의 병증은 신경질증이네."

그러자 허준을 비롯하여 거기 같이 있던 의관과 의녀들은 요양을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 눈썹이 휘날리도록 바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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