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228)

조선왕조실록-선조 

삼려의 난

조선왕의 여가 생활 중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드는 것을 고르라면 그것은 당연히 온천행이다. 온천행은 주로 왕이 병에 걸려 온천욕을 할 필요가 있을 때만 시행되는 되는데 그 이유는 돈이 무척 많이 들기 때문이다. 하긴 호위병과 내관, 궁녀, 수행관료들까지 총 5천여 명이 따라나서는 대규모 행사이니 돈이 안들 수가 없었다.

덕분에 신하들은 왕의 온천행을 만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승지들과 사관들의 적극적인 로비활동과 피 맺힌 절규에 많은 신료들이 공감했고 마침 민심이 어지러운 충청도 지방을 위무한다는 명분도 있어서 큰 반대는 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균이 혼자만 온천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워낙 돈이 많이 드는 행사이다 보니 보통은 대부분의 왕실가족이 참가하는 것이 보통인데 균은 이상할 정도로 혼자가기를 고집했다. 두 대비가 무척 섭섭해 했다는 소문을 듣고 정아공주가 칭얼거려도 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에는 혼자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나섰다.

5천여 명으로 이루어진 행렬은 장관이었다. 균이 탄 연(왕의 가마)를 중심으로 뒤에는 말을 탄 수행 신료들이 따랐고 내관과 상궁나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행궁에서 필요한 물건을 나르기 위해 수많은 잡역부들이 행렬의 뒤에 위치했다. 물론 그 행렬을 호위병들이 쫙 둘러쌌고 행렬의 앞과 뒤로는 상당한 수준의 기병대가 경계를 펴고 있었다.

이러한 왕의 행차는 당시 조선 사람들이 흔히 볼 수 없는 구경꺼리였다. 당연히 한성부의 거의 모든 백성들이 몰려나와서 왕의 행차를 구경했다. 얼마 전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정 3품)의 자리에 오른 유희춘은 반대로 구경을 나온 백성들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대사간 영감."

"허허허. 허봉사가 아닌가? 그래 내의원 생활은 할 만한가?"

그런데 뒤에서 누가 자신을 부른 소리가 들렸다. 유희춘이 돌아보니 내의원 의관인 허준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허준과 관련이 깊은 사람이라면 두 사람을 들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스승인 어의 양예수이고 또 하나는 그의 출사를 도와준 대사간 유희춘이었다.

미암 유희춘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중의 한 명으로 미암일기의 저자이다. 중종 때 벼슬자리에 올랐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균의 즉위와 동시에 귀양에서 돌아와 재등용되었다. 재등용된 그는 한 명의 의관을 이조판서 홍담에게 추천했는데 그가 바로 허준이다.

허준은 1546년생이 아니고 1539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1575년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의과에 급제한 기록이 없다. 허준과 유희춘의 교류가 활발했던 것이 1568년경인데 다음해인 1569년 전후로 의관으로 특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역사가 2년이나 빨리 진행된 상황이라서 허준의 출사도 빨라졌다.

"예, 영감. 소생이 올해 초에 부탁드렸는데 이렇게 빨리 의관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영감께 노고를 끼친 것이 아닌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닐세. 어디 자네가 내가 남남이던가? 나보다는 이판대감이 수고가 많았지. 언제 시간이 나면 나중에 한번 인사라도 다녀오게."

"예. 영감.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혹 편찬은 곳은 없으십니까? 영감께서 노구에 먼 여행길을 가시게 되어 소생이 염려가 크옵니다."

"허허허. 내가 이렇게 보여도 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오래 살아서 건강 하나는 아직 자신 있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행렬을 계속 따랐다. 보통은 이런 행차에서 자신의 위치가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예외가 있으니 그것은 행렬을 지휘하는 무장들과 수행의관들이었고 허준은 이런 점을 악용하여 유희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영감. 이번에 전하께서 온양의 행궁에 많이 머무르실 예정이십니까?"

"그렇지는 않네. 나라의 근본이신 전하께서 계실 곳은 행궁이 아니라 경복궁이 아닌가? 전하의 피로가 풀리면 바로 돌아올 것이네."

"하온데 왜 저렇게 많은 물건들을 나르는 것이옵니까?"

유희춘이 뒤를 돌아보니 유난히도 물건을 나르는 잡역부들과 수레의 숫자가 많아보였다. 자신이 보기에도 거의 대궐이 이사를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거기다 잡역부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상해서 눈빛이 부리부리 한 것이 훈련 잘 된 군사들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좀 이상하기는 하군. 얼마 머무르지도 않을 행궁에 저렇게 많은 물건을 옮길 필요가 없을 텐데."

"거기다 잡역부들의 숫자와 모습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물론 잡역부들의 힘이 넘치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저렇게 많은 잡역부를 고용하는 데 많은 돈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구먼. 내가 나중에 전하께 말씀을 드려야겠네. 그것이 전하의 잘못된 점을 간하는 사간원의 장으로써 내가 할 일이겠지."

그렇게 허준의 밀고를 통해 대사간 유희춘이 자신을 벼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균은 오랜만에 한성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와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척 좋은 척 하고 있었다. 물론 밖으로 나온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균은 휴양을 하러 나온 것이 아니었다.

"상선영감. 주상전하를 호종하시러 가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제조상궁. 나는 제조상궁이 주상전하를 호종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것이 어찌 된 일이오?"

그 무렵 경복궁에서는 대전내관인 정성우와 제조상궁인 양상궁이 만나서 서로를 보고 놀라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사실이 아주 틀리다는 것에 크게 놀랐다.

"네? 내시부에서 전하의 시중을 들기 위해 파견된 인원이 고작 10여명이라고요?"

"그렇소. 양상궁. 이번에 상궁나인들 중에서 더 많은 인원을 차출한다고 해서 우리 내시부에서는 소수의 인원만 보냈소."

"이번에 상궁나인들 중에서 전하의 시중을 들기 위해 파견된 인원이 오십 명을 넘지 못합니다. 그것도 전원 수라간 나인들로만 구성되었습니다."

"뭐요? 그럼 주상전하께서는 도대체 누구를 데리고 나가셨다는 말이오!"

그렇게 경복궁에서 두 사람이 놀라서 입에 개거품을 물고 있었지만 균의 행차는 그에 상관없이 한성부에서 약 250여리(약 100km) 떨어진 온양의 행궁으로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그간 균은 무료했던지 책을 꺼내서 읽고 있었다. 그가 읽는 책의 이름은 신증 동국여지승람이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은 1530년에 간행된 조선의 인문지리서였다. 그것에는 자세하지는 않지만 지도가 그려져 있고 그 고장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적혀있어 그 지역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참고가 되는 서적이다. 거기다 발간된 지 고작 40년도 안된 당시로써는 최신서적이었기에 균이 읽어볼 곳이 많았다. 하지만 읽다보니 너무 지루했다.

"이보게 곽내관."

"……예. 전하. 불러계시옵니까?"

"옷이 참 어울리는군. 누가 보아도 네가 내관인줄 알 것이야."

칭찬을 가장한 균의 약올림을 받은 곽내관 아니 곽재우는 힘없는 자신이 분한지 대답을 하지 않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균의 다음 말을 듣고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옷이 싫다면 저기 궁녀들하고 옷 갈아입게."

"아니옵니다. 전하. 차라리 이것이 낫사옵니다. 열심히 할 터이니 제발 궁녀만은……."

"그럼 수고하도록."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래도 곽재우는 나았다. 최소한 내시로 위장하고 있어서 그렇지 무거운 짐을 지고 온다거나 궁녀들로 위장한 군사들보다는 백배 나았다. 이번에 균의 행차에 따라온 인원은 약 5천여 명 정도였는데 이중 2천명이 호위병이고 나머지 2천명은 짐꾼으로 위장한 군사. 그리고 5백여 명은 내관이나 궁녀로 위장한 군사들이었다.

물론 군사들을 내관들과 궁녀들로 위장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불가능하지 않았다. 내관들은 곽재우처럼 어려서 수염이 나지 않은 자들을 위장시켰고 궁녀로 위장한 자들은 몸이 호리호리한 자들을 골라서 궁녀복을 입힌 후 '가을 햇빛에 궁녀들의 살갗이 탄다'는 이유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러니까 약 4500명의 군대가 호위병 또는 일꾼 또는 내관과 궁녀로 위장하고 균을 따라서 남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균의 온천행은 온천행을 가장한 친정(임금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정벌함)이었다.

며칠 후 균과 그의 군대는 온양의 행궁에 도착했다. 행궁이란 전국 각지에 산재되어 있는 임금의 별장이다. 하지만 임금이 이곳에서 쉬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잠시 머물며 국사를 돌보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그 지역에 여러 가지 특혜를 주어 조선왕조의 부족한 지방통치력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온양행궁은 조선의 임금이 온천을 즐기기 위해서 특별히 만든 행궁으로 사용빈도가 상당히 많은 궁전이었다. 세종대왕이 피부병이 심했는데 여기서 온천욕을 하고 나서 한글을 완성했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였고 원래의 선조역시 아프다고 거짓말하고 이 곳에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음~! 이것은 온천의 냄새.'

균은 행궁에 도착하기 무섭게 당장 온천으로 달려갔다. 온천수의 냄새를 맡는 순간 온몸이 간지러워져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있는 곳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한 후 옷을 홀라당 벗고 온천으로 들어갔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알몸을 보이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이건은 유학의 영향인데 옷을 걸치지 않는 것은 짐승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욕을 할 때도 상반신만 씻고 하반신은 씻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 그 횟수도 적었다. 이는 왕도 마찬가지로 왕이 목욕하는 횟수는 일주일에 한번 이상이 되지 못했다.

거기에다 왕은 체면을 차린다고 껴입을 옷도 무척 많았다. 그러다보니 흘리는 땀은 많은데 제대로 씻지 않고 잠을 자야했고 그런 것이 반복되다 보니 조선의 역대 왕은 불치의 피부병을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균은 이태리 타올로 때를 밀지 않으면 목욕한 것으로 치지 않은 사람 중에 하나였다. 물론 타올에 밀려나서 나오는 것은 때가 아니라 표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밀지 않으면 간지러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부뜩부뜩~~."

균은 온천에 몸을 담구고 때를 충분히 불린 후에 준비해간 석감(비누)와 거친 천을 이용해서 온 몸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비록 현대의 비누와 이태리 타올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나았다. 그보다는 밀어도 밀어도 나오는 때에 균은 온천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한 시진(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균은 눈앞에 떠다니는 건더기에 질겁했다. 본래 임금이 쓰는 온천에는 배수로가 확보되어 있어서 그런 건더기들이 떠다닐 위험은 없다. 하지만 역대 조선의 왕들중에서 균처럼 때를 벗긴 인물도 없었다. 보통은 꽃을 띄워둔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상황은 심각했다. 임금이 쓰는 온천답게 크기도 상당히 크고 온천수가 자동으로 유입되고 배출되는 훌륭한 시설이 비누거품과 이름 모를 건더기들로 뒤덥혀 있었다. 균은 당황해서 당장 목욕을 중지하고 청소에 나섰지만 청소도구도 없이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균은 몸을 대강 행구고 즉시 온천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밖에 대기하고 있던 곽재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면서 말했다.

"수고가 많겠구나. 나중에 꼭 보답하마."

그리고는 어리둥절한 곽재우를 뒤로 한 채 균은 거의 뛰다시피 빨리 걸어서 달아났다. 곽재우와 내관으로 변장한 군사들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정리를 하러 들어간 후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그 처참한 모습에 그들은 손에 들고 있던 청소도구들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잠시 후 온양행궁의 옆을 흐르던 하천이 잠시 검은 색으로 변하는 일이 있었지만 자연의 위대한 정화작용은 곧 하천을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