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228)

조선왕조실록-선조

삼려의 난

다음날 균은 아주 오랜만에 늦잠을 즐길 수 있었다. 한성부에서는 새벽같이 일어나 두 대비들에게 인사를 다니고 서류검토를 한다고 바쁘게 보내던 그였지만 이 곳 온양행궁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균도 어떻게 하기 힘든 노대신들이 많이 따라왔지만 그들도 여행의 피로덕분에 아침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전날 온천에 몸을 담근 덕분에 숙면을 취한 균은 오전 늦게 일어나서 수라를 들었다. 그렇게 아침식사를 마친 균은 신료들을 불러 모았다. 아무리 행궁에 쉬러갔다고는 하지만 왕의 결제가 없으면 조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기에 해야 할 일은 꼭 해야 했다. 그래서 행궁에는 중앙관청들의 분소 같은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다들 편히 쉬셨소?"

"예. 전하.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으로 늙은 몸을 온천에 담그니 더 없이 평안하였사옵니다."

"하하하. 영상을 보아서라도 이 곳에 자주 행차를 해야겠구려. 그러면 먼저 밀린 국사를 간단히 처리하고 오후에도 푹 쉬도록 합시다. 첫 번째로 논의할 것이 무엇이오? 영상."

"예. 전하. 실은 어제 이 곳 행궁을 흐르는 하천이 갑자기 검게 물든 일이 있었사옵니다. 때문에 이 곳 백성들이 괴변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여 민심이 많이 흉흉하옵니다. 또한 행궁의 남서쪽에는 광덕산이라는 산이 있사온데 얼마 전 그 산이 울린 적이 있다고 하옵니다. 본시 광덕산이 울리면 나라에 변고가 생긴다는 전설이 있는데다가 이번에 하천에도 괴변이 생기니 이 곳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사옵니다."

"……."

균은 가슴 속 깊숙이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왕이 된 뒤로 잘 씻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런 상황이 연출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어제 목욕한 사람은 균 뿐만은 아니었다. 균을 따라온 5천여 명 중에서 목욕할 시간이 나는 사람들은 다 목욕을 했고 마침 가을철이라서 하천의 수량이 적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에 불과했다.

"본래 임금의 행차가 이르면 그 지역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일이 많사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께서도 이 곳에 이르시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어 민심을 안정시키셨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으니 전례에 따라서 곡식들을 나누어주어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사료되옵니다."

"영상의 말이 극히 지당하오. 즉시 그렇게 시행하시오."

"예. 전하.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내심 찔리는 구석이 있던 균은 두말하지 않고 이준경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꼭 이준경의 말 때문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준 것은 아니었다. 온양의 행궁은 아직 규모가 작아서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묶을 수가 없기에 주변 백성들의 집에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아서 민폐가 생기고는 했다.

이번의 수행원들은 다 훈련 잘 된 정예병들이라서 그런 민폐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편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충분한 배려가 필요했다. 또한 더 중요한 이유도 있었는데 이 지역은 곧 토벌군의 주요 근거지가 되는 곳으로 당연히 백성들의 민심을 잡아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어전회의는 원래부터 긴급을 요하는 문제만 처리를 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 거의 끝났다. 하지만 균은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신료들에게 일거리를 하나 안겨주었다. 하지만 신료들, 특히 충청도 출신의 신료들은 균이 준 일거리에 무척 기뻐했다.

"과인이 행궁에 행차한 것은 과인의 피로를 풀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요즘 들어 충청도의 민심이 흉흉하여 이를 안정시키고자 친히 행차를 한 것이오. 본시 민심을 안정시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과거를 시행하여 그 지역의 선비들에게 출사를 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오. 그래서 과인은 과거를 치러 충청도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인재들을 얻고자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전하. 전하의 성려가 깊으심이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사옵니다.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필시 충청도의 민심을 일거에 되돌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최근 충청도의 민심이 불안하여 소신들은 전하께오서 이곳 행궁에 행차하시는 것을 크게 염려하였나이다. 하지만 전하께서 그렇게 깊은 뜻을 가지고 계셨다니 소신은 감격 또 감격할 따름이옵니다."

'아무리 좋다지만 침까지 튀기길 필요는 없는데…….'

균은 흥분해서 침을 튀겨가면서 격찬을 하는 충청도 출신 신료들을 보고 좀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과거가 양반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자신도 잘 알고 있지만 균과 다른 신료들이 보기에도 충청도 출신 신료들의 반응은 좀 과했다. 하지만 균의 즉위 이래 좀 박대 받았다고 생각하던 충청도일대의 기호사림에게는 이번 과거의 시행은 큰 의미를 가졌다.

지방에서 치는 과거는 중앙에서 치르는 과거에 비해서 쉽게 출제가 되고 특례가 많다. 그래서 중앙에서 치르는 과거가 인재를 뽑기 위한 과거라면 지방에서 치르는 과거는 그 지방의 양반들에게 일종의 특혜를 주는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기호사림파에는 자신들에게 임금의 신임이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어 저렇게 기뻐하는 것이었다.

"흠! 흠! 흠! 경들을 보니 이번 일에 반대의견을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소. 그럼 며칠 후에 행궁근처에서 과거를 치를 것이니 경들은 이번 일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물론 반대의견을 가진 신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균의 말대로 충청도의 민심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는데다가 충청도 출신 신료들의 기세가 너무 강해서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거기다 충청도에 그런 특혜를 주었으니 나중에는 자신들의 고향에도 그런 특혜를 주지 않을까 기대하여 신료들은 즐겁게 과거를 준비했다.

그렇게 혹시 잔소리를 할지도 모르는 신하들에게 일거리를 떠맡긴 균은 다시 온천욕을 즐기기 시작했다. 물론 오늘은 만약을 대비해서 그냥 온천수에 몸을 담그기만 했다. 오늘도 때를 밀었다가는 저 밖에서 이를 갈고 있을 곽재우에게 너무 미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밀어봐?'

다음 날 충청도의 각 고을에는 온양에서 별시가 열린다는 방이 붙었다. 균의 즉위 이래 과거가 거의 치러지지 않은데다가 특히 조정에서 기호사림이 세력을 잃어가고 있어 과거를 거의 포기하고 있던 선비들은 모두 두 손을 들고 기뻐하며 앞 다투어 별시가 치러지는 온양으로 향했다.

"뭐라고? 임금이 온양의 행궁으로 내려와?"

"예. 영감마님. 며칠 전에 오천여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오~! 그래.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온양에 내려온 균이 다음날부터 바쁜 행보를 보이고 있던 반면 송상의 송민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던 김진기는 한참 뒤에나 균이 충청도에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소식을 들은 이상 김진기는 빠르게 움직였다. 즉시 정재곤을 불러서 군대를 출동시키라는 말을 꺼낸 것이다.

"이보게 정장군. 자네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며칠 전 임금이 온양에 내려왔다고 하네. 수행원은 오천여명이라고 하는데 그중에 군사는 약 이천 명에 불과하다는 군. 즉시 군사를 발하여 그들을 치는 것이 어떻겠는가?"

"안 됩니다."

김진기의 말에 정재곤은 단호하게 반대를 했다. 김진기는 서출주제에 자신의 명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정재곤을 끌어내 목을 치고 싶었지만 그만한 장수를 얻기도 힘들고 또 정재곤을 통해서 많은 수의 서출들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냥 참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좋은 기회가 아닌가? 호위병은 고작 2천명이고 자네가 지휘하는 군대는 무려 5천이나 되네. 아니 내 노비들을 모아주면 거의 1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지 않는가? 거기다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면 많은 양반들이 호응을 할 터이니 아무리 임금을 호위하는 군사가 강하다고는 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네."

"그래도 안됩니다. 여기서 온양까지는 거의 이백 리에 달하는 먼거리 입니다. 거기다 우리는 훈련이 안된 보병들이니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면 임금이 도망갈 시간은 충분합니다. 거기에 다른 양반들의 합세를 기다리다가는 중앙에서 내려온 대규모 토벌군과 마주쳐야 합니다."

"음……. 그런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아쉬워서 말일세. 우리가 들고 일어나 충청도를 장악하고 세력을 불리면 족히 몇 만의 대군을 만들 수는 있지만 조정의 토벌군과 싸운다고 희생이 많을 것이네. 하지만 이번에 임금을 죽이거나 사로잡으면 일은 아주 간단히 끝나는 것이 아닌가?"

"저도 영감께서 병사들과 백성들을 아끼시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렇게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무리를 하는 것은 자칫 대사를 그르칠 수가 있습니다. 부디 이번 기회는 포기하십시오."

김진기는 무척 아쉬웠다. 균이 한성부에서 대군의 보호를 받고 있다면 이쪽도 다른 양반들의 지원을 받아서 대규모의 군대를 만들어야 반란이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참여한 양반들에게 많은 이권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균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소수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있다면 자신의 군대만으로도 승산이 있다.

그 경우 다른 양반들에게 이권을 나누어 줄 필요가 없고 그만큼 반란이 성공한 후 자신의 권력과 세력은 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김진기는 지름길을 놔두고 먼 길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지만 정재곤의 말처럼 그 지름길이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마음은 숨긴 채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알겠네. 자네 뜻이 그렇다면 아마도 그렇겠지. 그럼 돌아가서 계속 수고하게."

"예. 영감.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제가 앞장을 설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김진기와 정재곤은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정재곤에게 친구이자 참모인 피시상이 달려왔다.

"이보게 재곤이. 소식 들었는가?"

"무슨 소식? 아! 임금이 온양에 내려왔다는 소식이라면 나도 들었네만."

"아니 그게 아니야. 임금이 충청도의 선비들을 대상으로 과거를 치룬다네. 이미 부여현 관아에 그런 방이 붙었고 선비들이 하나 둘씩 온양으로 향하고 있네. 어떻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가?"

"뭐? 과거를……! 이렇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시상이 자네도 나를 따르게. 당장 영감께 가봐야 할 것 같네."

피시상의 말을 들은 정재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피시상을 대동하고 다시 김진기를 찾아갔다. 김진기는 정재곤을 실컷 욕하고 있다가 정재곤의 방문을 받고 놀랐지만 대시 대범하고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장군, 자네는 방금 전 다녀가지 않았는가? 아니 거기다 피참모까지, 두 사람 모두 무슨 급한 일이기에 나를 찾아온 것인가?"

"영감.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라? 그것이 무엇인가?"

"온양에 내려온 임금이 충청도 선비들을 대상으로 과거를 치른다고 합니다."

"???"

정재곤의 말을 들은 김진기는 잠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고 하면서 그가 말한 것은 하나의 소식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진기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기에 곧 정재곤의 말을 이해했고 얼굴에 기쁨을 감춘다고 힘겨워했다. 정재곤의 말과는 달리 과거의 시행은 김진기가 바라던 바였기 때문이다. 김진기가 이해한 듯하자 두 사람은 추가로 설명을 했다.

"물론 과거가 시행되면 충청도의 민심은 급격히 안정됩니다. 그렇다면 영감의 거사에 동조할 양반들의 수는 줄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 전에 과거를 치르는 유생들로 군사들을 위장시켜 온양행궁을 기습한다면 오히려 손쉽게 거사를 추진할 수가 있습니다."

"내 생각도 그대들과 같네. 이렇게 된 이상 무리를 하더라도 거사를 빨리 치룰 필요가 있겠군. 정말 좋은 소식이면서 나쁜 소식이군."

"그렇습니다. 영감. 하지만 우리측으로 본다면 오히려 잘 된 것입니다. 우리가 거느린 병력을 유생들과 그들이 거느린 하인들, 그리고 보부상인들로 위장을 시켜 온양행궁 근처로 이동시킨다면 적들이 제대로 알아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1만의 군사로 행궁을 공격한다면 기필코 임금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대로 과거가 시행되면 양반들의 동요는 많이 줄어들게 된다. 일단 왕이 화해의 의사를 표시한 격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추가적인 조치들이 더해지면 충청도의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 지금처럼 김진기에게 유리한 환경은 불리하게 바뀔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이번의 과거시행은 그들에게 나쁜 소식이다.

하지만 아주 좋은 기회기도 했다. 대규모 병력을 위장시켜 행궁에 접근시킬 수 있는 아주 기회였다. 그렇다면 반란군은 소수의 호위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손쉽게 왕을 사로잡을 수 있다. 거기다 왕과 함께 조정의 대신들을 사로잡고 과거를 치루기 위해 모인 양반의 자제들에게 관직을 내리는 대신 일종의 인질로 삼아서 충청도를 호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원래 계획대로 다른 양반들과 연계하여 대군을 동원하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명피해 없이 권력을 차지할 수 있어 대의명분상으로 유리하고 반란이 성공한 후 논공행상을 할 때 다른 양반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줄어드는 등 김진기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 찾아온 셈이다.

따라서 김진기는 군대를 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자신에게 불리해지고 지금 움직이면 아주 유리한 조건들이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용의주도한 김진기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다시 한번 상황을 점검하고 나서야 최종결정을 내렸다.

"내 생각도 그렇네. 내가 노비들을 보내줄터니 정장군과 피참모는 최선을 다하여 폭군 이연을 사로잡아 나에게 끌고 오게."

"예. 영감."

세 사람은 군대를 움직이기로 결심하고 세부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균이 충청도 민심을 돌리기 위해서 시행한 온양향시는 김진기의 반란군을 불러드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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