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삼려의 난
그날. 운총만호 이동영은 송상대방 송민진이 보낸 정보를 통해 균이 온양으로 행차를 했다는 것을 알고 거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직 그의 예상대로 충청도에 반란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반란을 유도할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동영은 즉시 여진족에게 지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자신이 지휘하는 병력을 준비했다.
원래 만호라는 직책은 고려시대 때는 말 그대로 1만 가구에 해당하는 백성들을 다스리며 거기서 나오는 장정들을 군사로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직책이었다. 하지만 중앙집권화가 강화된 지금에 와서는 만호란 이름뿐인 직책으로 전락하여 휘하 병력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동영은 170년을 이어온 조선왕실의 방계혈족이고 중앙정부의 토호말살 정책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대토호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가 동원 할 수 있는 정규군만 3천여 명에 달했고 그의 가신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군대를 합치고 아직 명맥을 유지하는 지방토호들의 지원을 받는다면 1만의 군대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원래부터 여진족과 싸우느라 전투력이 뛰어난 함경도 백성들을 동원하면 상당한 군대를 모을 수 있었다. 이동영이 직, 간접적으로 가지고 있는 토지만 해도 2만결을 넘어가는데 거기서 일하는 소작농이나 노비들만 해도 몇 만이나 되고 재산을 풀어 군대를 모은다면 여진족에게 장담한 대로 2만의 농민군을 무리 없이 모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나으리. 일단 정규군만 1만에 농민군 2만 정도는 충분히 확보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문제는 명분입니다. 조선은 대의명분에 죽고 사는 나라입니다. 그럴 듯한 명분이 있으면 상황은 더욱 유리해 질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그렇게 명분이 중요할까?"
"물론 없어도 별 문제는 없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렇다면 그럴 듯 한 것 하나정도는 만들어 둘 필요가 있겠군."
"예. 그렇습니다. 특히 우리가 곧 차지할 한성부에 사는 사람들은 대의명분이라면 깜박하고 죽으니 하나 정도는 만들어 두어야 합니다."
부장 조흥수의 말에 이동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래 이동영은 그렇게 명분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중심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한성부로 진격할 명분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충청도 의군과 함께 폭군을 처단한다.' 라던지 '토벌군이 밀리고 있어서 한성부로 지원을 가겠다.' 라는 간단한 명분이면 충분했다.
반란은 충분한 대의명분을 갖추고 분위기가 조성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당시 사람들이 판단능력이 미숙한데다가 교통 통신기술의 미비로 인해 헛소문에도 쉽게 동요를 했다. 거기다 군중심리에 휩싸이면 반란이 일어날 충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동영 등에게는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중요한 조선이었지만 명분은 만들기 나름이고 그보다는 실제 이익을 보장해주는 편이 반란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로 보았다. 한마디로 자신의 처지가 만족스럽다면 위험하게 반란을 일으킬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동영은 그 자신도 무관이고 대대로 최전방인 함경도에서 살아온 무관가문의 후예였다. 후방에서 평화롭게 공자와 맹자를 찾는 조선의 선비들과는 처한 입장이 달랐고 그래서 부장 조흥수의 조언에도 그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무관들이라서 문관들만큼 번지르르한 대의명분을 만들어내기는 그렇다. 그것은 나중에 충청도에서 일어날 반란군의 명분을 보고 일부 차용하거나 아니면 뛰어난 선비에게 부탁을 해서 만들도록 하지. 하지만 아무리 명분이 번지르르 해도 실력이 뒷받침이 안 되면 곤란하다."
"예. 나으리. 다른 곳에도 연락을 보내서 최대의 병력을 끌어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곧 충청도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고 조정은 그들을 막는다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때가 문약한 현 왕실은 무너지고 강력한 왕실이 들어서 무너져 가는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 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
"예. 나으리."
그와 동시에 이동영은 세부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여진족의 대군이 나타나면 자신의 군대가 지키고 있는 압록강 국경선을 개방하여 근거지인 갑산까지 인도를 한다. 그 사이 함경도의 토호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갑산에서 전 병력이 일단 모여 결의를 다진 후, 전군을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을 하는 것이다.
한 무리는 곧장 남서진하여 함경도 제일의 도시인 함흥을 점령하고 그 일대의 관군을 괴멸시킨다. 그사이 다른 한 무리는 남동진해서 길주와 단천, 북청 같은 해안의 주요 고을들을 공략해서 후방을 든든히 한 후 함흥에서 합세하여 그대로 추가령을 넘어 한성부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계획일 뿐이었다. 이동영은 3만의 반란군과 1만의 여진족 이렇게 4만의 반란군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정세변동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4만의 군대중 이동영의 세력은 고작 1만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병력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충청도의 반란군이 얼마나 잘 싸워주느냐가 가장 큰 변수였다.
'김진기라고 했던가? 정도전의 후예여, 부디 선전을 해다오.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네게 달렸다.'
그렇게 이동영이 반란준비로 여념이 없을 무렵. 개성의 송상 본단에서는 송상의 십여 명이나 되는 대방 중에 하나이면서 그중에서도 가장 신망이 높았던 송민진이 다른 대방과 비방, 사속들이 모인 자리에서 은퇴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사람들은 송민진의 은퇴에 아쉬움을 표시했지만 다른 대방을 선출하면 되는 일이었기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송상은 개성지역 상인들의 연합체로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홍삼의 판매로 인해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만상, 경상 같은 강력한 경쟁자가 생겨서 어느 정도 결집력이 높아지지만 현재는 상인들의 느슨한 연합체였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상업 조합으로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대방이라고 해도 큰 힘은 없었다. 고작해야 조정으로부터 받은 상업적 권리를 소속 상인들에게 적절히 분배하고 다시 그들에게서 적절한 세금을 거두어 조정에 납부하거나 소속 상인들끼리의 분쟁조정하고 다른 곳과 거래시 소속상인끼리의 경쟁을 방지하여 출혈경쟁을 막는 등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송대방.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역대 대방들 중에서 그대만큼 인망이 있고 상재가 뛰어난 대방이 어디 있겠소. 많은 상인들이 섭섭하게 생각할 것이오."
"내가 대방으로써 재임할 때 남쪽에서 나상이 등장하여 남부지방의 상권을 모두 빼앗아갔소. 초기에 나상의 발호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오."
"하지만……. 그것은 송대방만의 잘못이 아니오. 송대방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 대방들 모두의 책임이오. 그런데 우리들 중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송대방이 물러난다면 그것은 잘 못된 일이오."
"이미 내 뜻은 굳어졌소. 거기다 요즘 내가 거느린 상회의 경영사정도 좋지 않고 일부 상인들의 행태도 마음에 들지 않소. 그럴 바에는 나 혼자서 물러나는 것이 모두에게 좋지 않겠소?"
"알겠소. 송대방의 뜻이 그렇다면 섭섭하지만 어찌 할 수 없지 않겠소? 그동안 수고하셨소."
"수고하셨습니다. 대방어른."
송민진은 다른 사람들의 만류에도 대방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최대한 상단의 공직에서 벗어나 자신의 일로 인해 아끼고 사랑하는 송상이 타격을 입는 것을 최소화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생각에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이럴 필요는 없지만 혹시나 실패할 경우 자신의 동료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거기다 그에게는 내심 일부 상인들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송상의 시작은 조선왕조의 개창으로 인해 여러 가지 차별을 받고 관직진출이 사실상 금지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옛 고려의 수도답게 개성도 인재가 많은 곳으로 조선왕조 역시 이점을 인정하고 학교를 세워 유생들을 교육시켰다. 하지만 그들이 그 뜻을 펼칠 기회는 주지 않았다.
그래서 개성의 유생들은 자신의 학문을 쓸 곳이 없어 술을 마시며 젊음을 소진시키거나 상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송상의 구성원 대부분이 자신 또는 자신의 선조가 그런 아픔을 겪었는데도 상당수의 상인들은 그 점을 잊고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송민진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대방의 자리에서 물러나 자신의 상회로 돌아온 것이다.
"숙부님. 아쉽지 않으십니까?"
"내 나이가 벌써 오십 줄인데 청춘을 다 바쳐 발전시킨 송상을 떠나는 것이 어찌 아쉽지 않겠느냐? 하지만 조정에 유능한 자가 있다면 어느 정도 나의 개입을 눈치 챘을 것이니 송상을 위해 떠나는 것이다."
"정확히는 송상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또한 송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기도 하시겠지요. 이미 조선이 고려를 무너트리고 성립 된지도 170여년, 사람들은 고려를 잊고 조선을 다르고 있습니다. 숙부님은 고려 왕씨이시니 남다르겠지만 솔직히 저도 숙부님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 그것이 정상이겠지. 하지만 나 같은 사람도 많이 있단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우리 개성사람들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더냐? 단지 우리를 상계로 내몰고 나서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전부이지 않느냐? 그렇게 세금은 거두어가면서도 관직에 나가 나라를 위해 힘쓸 기회는 주지 않으니 어찌 우리 개성사람들이 완전한 조선의 백성들이 될 수 있겠느냐?"
송민진이 대방자리에서 떠나면서 조카딸 안지연 역시 송상의 본전행수자리를 버리고 같이 돌아왔다. 그래서 두 사람은 송상의 본전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던 그들은 곧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들은 싫던 좋던 간에 이미 반란에 연루가 되었고 조만간에 그 사실이 들통 날 것이기에 이곳을 떠나야 했다.
"너도 어서 떠날 준비를 하거라. 송상의 내 동료들과 보부상들은 잘 모르는 일이고 나의 친족도 아니니 군자금이란 명목으로 세금을 바치면 충분히 죄를 용서받겠지만 너는 내 유일한 혈육이니 필시 연좌되어 관기(관아에 소속된 기생)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
"……네. 숙부님."
"너무 상심한 표정을 짓지 말거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는 것이 내키지는 않겠지만 관기로 끌려가도 이곳에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함경도의 이동영에게 몸을 의탁하기로 하고 서둘러 짐을 꾸렸다. 이미 송민진의 재산은 상당수 이동영에게 지원이 된 후라서 정리할 재산이 많지 않았지만 송민진은 한때 개성에서 알아주던 부자라서 처리할 것이 많았다. 그렇게 물건들을 정리한다고 부산을 떨고 있던 두 사람 앞에 안지연의 뒤를 이어 송상의 본전행수가 된 안성희가 나타났다.
"성희야. 여기는 웬일이니?"
친구인 안성희를 본 안지연은 반갑게 맞았다. 안 그래도 고향을 떠나서 섭섭한데 친구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는 것이 기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웃어주고 친근한 표정을 지어주던 안성희는 안지연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송민진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어르신 모시러 왔습니다. 저를 따르시지요."
"나를 모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이냐? 나는 이미 대방도 아니고 송상과는 별 관계가 없는 처지니라. 그런데 본전행수가 나를 대리로 올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
"어르신께서 가실 곳은 송상이 아니라 북한산성입니다. 그리고 저는 송상 본전행수라는 직책 이전에 외수사에서 파견된 요원입니다."
"성…성희야……!"
안성희의 말에 두 사람은 너무 놀라서 부르르 떨었다. 북한산성은 임금의 근위부대가 주둔하는 주요 근거지이고 외수사는 임금의 재산과 한성부의 상권을 관장하는 임금의 직속기관이다. 얼마 전까지 같은 밥을 먹던 안성희가 첩자였다고 하니 두 사람은 눈이 동그래져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네가?"
"주상전하께오서는 즉위하신 직후부터 정보의 중요성을 실감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모아서 외수사 내에 정보부를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조선의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철저한 점조직으로 이루어지기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송상에 저 말고도 더 많은 첩자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송상은 조선에서 가장 빠르게 많은 정보를 취급하는 곳, 저희들도 최우선적으로 감시 감독하고 있는 곳이 송상입니다. 덕분에 송상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반란군이 어디에 있는지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대방어른께서는 반란진압에 공을 세우신 셈입니다."
"그럴 리가? 네가 송상에서 일한지가……."
"횟수로 3년입니다. 또한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것은 횟수로 4년에 가까우십니다."
의외의 인물에게 뒷통수를 맞은 격이 된 두 사람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입만 벙긋거렸다. 그때 안성희가 휘바람을 불었고 곧 십여 명의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포박하고 송민진의 집을 뒤져 서류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성희는 균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주상전하께서 어르신께 이런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반란군을 돕는다고 수고가 많았다. 물론 나를 대신해서 부지런히 전국의 정보를 모아준 것은 더욱 수고가 많은 일이다. 비록 이번 일로 인해 더 이상 무료로 송상의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 대신 송상이 나의 영향력 하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 역시 그대의 수고덕분이다. 다시 한번 그대의 공을 치하한다.' 이상입니다."
"나…나는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었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어르신. 이번 반란을 진압하신 일등공신이시지요. 그럼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안성희의 말대로 병사들은 두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정중한 자세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안성희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길었던 자신의 임무가 끝난데다가 그들이 죽을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임무를 위해서 만난 사람들이지만 몇 년간 같이 지낸 사람들이 죽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 무렵 개성으로 진입한 1사단 소속 기병 2천명은 먼저 송상의 본단을 포위하고 일부병력을 진입시켜 일부 서류들을 확보하는데 힘썼다. 병사들이 찾는 서류는 보부상단과 관련된 서류들로써 나중에 송상을 쥐고 흔들기 위한 약점잡기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큰 수확은 없었다.
"첨벙첨벙~!"
"이봐. 곽내관~! 어서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라."
"…예. 전하."
곽재우는 자신을 진짜 내관처럼 부려먹고 있는 균을 속으로 욕하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알아서 옆에 있던 거친 천으로 균의 등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균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곽재우는 균이 안 보이는 곳이라서 한껏 인상을 썼다. 잠시 후 한참동안 등을 밀던 곽재우의 힘이 빠진 듯 하자 균이 입을 열었다.
"이봐. 곽내관. 아니 재우야. 너도 올해 나이가 열일곱이라서 장가들 나이가 다 되었지?"
"그러하옵니다. 전하."
곽재우는 이상할 정도로 다정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균에게 오히려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있는 힘껏 다시 균의 등을 밀었다. 그리고 다시 곽재우의 등을 미는 속도가 줄어들자 균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참한 규수를 하나 알고 있는데 소개시켜 줄까?"
"!!!"
'전하가 알만한 규수라면 전하의 여동생이자 장안 최고의 왈가닥 진이낭자가 아닌가? 얼굴은 아름답지만 전하의 성격을 그대로 빼어 닮아서 엄청난 성격의 소유자라고 들었는데…….'
"벅! 벅! 벅!"
곽재우는 순식간에 무아지경에 빠졌다. 아까 전까지 피로를 느끼던 두 팔은 힘이 용솟음 쳤고 정신은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고 오직 균의 등을 밀어주는 데만 전념했다. 가끔 균에게 시달리는 것도 무척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균의 여동생까지 가세한다면 그것은 이승에 있는 지옥이다.
일례로 역사적으로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 난 승지와 사관들이 요즘 아주 친하게 지내면서 매일 술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만 보아도 균의 성격을 알만하다. 하지만 균의 동생 진이는 그런 균도 한 수 접어주는 인물이다. 오죽하면 균이 악몽을 꿀 때 진이의 이름을 외칠 정도이니 과히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인 것이다.
집에서는 그런 부인에게 시달리고 밖에서는 균에게 시달린다면 곽재우의 인생은 암흑 그 자체가 된다. 아니 차라리 정말 내시가 되는 편이 더 행복할지도 몰랐다. 물론 그전에 아버지 곽월에게 맞아 죽겠지만은 말이다. 이렇게 곽재우가 암울한 장래를 상상하고 있을 때 머리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쿵!"
"내 말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그렇게 등을 심하게 밀면 되냐? 재! 우! 야!"
'전하, 저는 다른 사람이 있어요!'
"저어아 저아느 다르으……."
오늘 균은 이상하게도 곽재우에게 아주 친근하게 대했다. 곽재우 앞에서 자신을 '과인'이라고 칭하지도 않고 '나(원래는 여가 맞는데 그 뜻이 나입니다.)'로 칭하는 것과 지금 곽재우의 두 빰을 적당히 당기는 장난을 치는 것을 보아도 그랬다.
"일단 내가 소개시켜줄 규수는 올해 열다섯이고 아주 참하고 아름다운 여자란다. 가끔씩 이상한 일을 하는 흠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주 귀엽게 보이지. 애교도 많고 머리도 좋아서 신부감으로써는 어디에 내놓아도 문제가 없을 듯하고 말이야……."
'그건 친동생이니까 귀엽게 보이는 것입니다. 특히 전하는 귀여운 여자아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조선 최고의 팔불출이시잖아요.'
"거기다 자수도 잘 놓고 붓글씨도 잘 쓰고 요리도 잘한단다. 이정도면 거의 만능이 아니겠니? 아 또 그리고 뭐더라?"
균의 자랑은 계속되었다. 그럴수록 균이 소개하는 참한 규수는 균의 여동생 진이로 좁혀졌기에 곽재우는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균은 신이 나서 제 동생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곽재우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균을 보고 진지한 생각에 잠겼다.
'그냥 명나라로 도망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