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삼려의 난
균은 이순신에게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넨 후에 그에게 종이 한 장을 다시 건넸다. 바로 충청도 일대의 지역이 상세히 그려진 지도였다. 일반적인 조선의 지도는 대강의 지명과 위치만 나와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균이 건네준 지도는 정확하지는 안지만 충청도의 대략적인 지형과 주요교통로까지 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보다시피 충청도의 지도이다. 과인이 자네를 부른 것은 한 가지를 묻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네에게 부여에 있는 오합지졸 1만 명이 주어지고 이들을 이끌고 온양을 기습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경우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
이순신은 함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일단 하급 군관인 자신을 불러서 왕이 작전을 짜봐라 하는 것부터가 상식 밖의 일이었고 더욱이 현재 왕이 있는 곳을 공격하는 작전을 짜보라니 그 역시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래서 균은 어느 정도 사실을 공개해서 이순신의 두려움을 풀어주어야 했다.
"자네도 눈치를 챘겠지만 과인은 이 곳에 온천욕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수행원 5천여 명 중 군사가 4500명이라면 그것이 평범한 행차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과인의 친정이며 반란군에게 던져주는 미끼였다."
"…소신도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었사옵니다."
"그렇기에 과인이 그대를 부른 것이다. 이미 북한산성에서 자네가 이것저것 알아보겠다고 기웃거릴 때부터 과인 역시 눈치를 채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북한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네에게만 휴가가 주어진 것이고. 그래야지 자네가 유성룡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도대체 전하는 어디까지 알고 있다는 말씀이신가? 아니 아예 모르는 것이 없는 것을 아닐까?'
"아니 과인도 잘 모르는 것이 많아. 단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잘 알기 때문에 단편적인 사실에서 대강의 흐름을 읽어낸다고나 할까?"
"!!!"
균의 말을 들은 이순신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자신이 유성룡을 통해서 퇴계 이황과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조선에 수많은 하급 군관 중에 하나에 불과한 자신의 행동을 제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 존재가 눈앞에 있다. 그것도 고작 열일곱의 소년이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럼 그대의 의견을 듣고 싶군. 과인이 그대를 부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니 말이다. 더 자세한 정황은 그 지도위에도 일부 언급을 해두었으니 참조해서 생각해보게."
"……신…신의 생각으로는……."
잠시 후 이순신은 자신의 생각을 천천히 말했다. 처음에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인지 떠듬거렸지만 점차 자신감을 되찾고 균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이순신의 계획은 반란군들의 계획과 거의 일치했다. 아무래도 평지보다는 산지가 사람들의 눈이 적고 훈련이 안된 병사로 구성된 반란군의 특성상 다채로운 전략전술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그 작전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이는 균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작전을 짠다고 해도 반란군의 한계가 뚜렷하여 그 이상의 작전을 구상하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만능이 아닌 이상 분명히 허점이 나올 것이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 이순신을 불러서 작전을 짜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균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겠다. 아무래도 내일이면 우리는 반란군을 두 눈으로 구경할 수 있겠지. 그런데 자네의 생각에는 내일의 승패가 어떻게 날 것이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호위군의 승리이옵니다."
"아니 왜? 우리가 논의 한 것은 단지 탁상공론일 뿐이다. 전장의 상황이란 변화무쌍한데 어찌 승패를 장담할 수 있겠는가?"
"손자병법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진정한 명장은 싸우기도 전에 이긴다는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을 설정한 후 적군을 그곳으로 불러드리셨습니다. 호위군의 전력이 강대하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지만 적군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소신이 감히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사유이옵니다."
"짝! 짝! 짝!"
균은 이순신의 답변이 마음에 드는 듯 무의식적으로 박수를 쳤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박수 같은 것이 있기는 했지만 지엄한 왕이 박수를 치는 것은 체통에 어울리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균은 잠시 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헛기침을 몇 번하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이순신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그대는 정 8품의 선전관이다. 앞으로는 과인을 근처에서 호종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이번 전투가 끝나면 며칠 동안 고향집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한다. 자네 모친인 변씨 부인과 자네 장인인 방진이 믿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으니 이번 기회에 출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지. 아참! 자네 맏아들 회가 올해 1살이니 한창 귀엽겠군."
"……."
'도대체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이순신은 균의 배려가 고맙기는 했지만 더욱 균이 무섭게 느껴졌다. 다음 날 11월 1일 아침. 드디어 온양별시가 시행되었다. 별시에 참가한 선비와 그 하인들이 오천 명이 넘을 정도로 대성황이었는데 덕분에 온양행궁이 아닌 남쪽의 공터에 임시 시험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과거를 치렀다.
수천이나 되는 응시생들이 자리를 시험장에 잡고 시험을 기다렸다. 잠시 후 균은 가마를 타고 나타나서 준비된 옥좌에 앉았다. 균이 옥좌에 앉자 대기하고 있던 악공들이 어악을 연주했고 호위병들이 늘어서 왕의 위엄과 시험장의 엄정함을 드러냈고 그다음 균이 내린 시험제목을 내관이 받아서 현제판에 붉은 끈으로 매달아 공개했다.
일단 시제가 공개되자 응시생들은 시험지에 붓을 놀려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논술시험이 과거의 전부는 아니고 시험관의 질문에 답하는 구술시험도 있었지만 별시의 경우에는 그런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균은 옥좌에 기대어 시험을 보는 응시생들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방긋 웃었다.
옛날 선비들이라고 부정행위를 안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심했다. 과거시험에 부정행위가 급증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16세기 무렵인데 이때 은거하고 있던 사림들이 대거 관직에 진출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자 부정행위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균이 지켜보는데도 은근히 부정행위를 하는 자들이 있어서 균을 심심치 않게 해주었다.
'오호 이 녀석은 붓뚜껑 안에 컨닝페이퍼를 숨겼군. 저 녀석은 품속에 아예 책을 숨기고 보고 있고, 어라? 이놈은 바로 내 앞에서 손에 쓴 것을 보고 있네? 컨닝페이퍼는 도포자락에 숨기는 것이 가장 안 보일 텐데……. 나도 전생에서는 저런 일 많이 했었지. 그때 책을 하나 만들어갔던가?'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는 옛말처럼 컨닝도 많이 해본 사람이 잘 찾는 법이었다. 어느새 균은 백여 명에 가까운 부정행위자들을 찾아내서 시험지를 빼앗았다. 물론 갑자기 시험관들의 움직임이 빨라진 것에 놀란 선비들은 부정행위를 중단했지만 균의 예리한 감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좌측 세 번째 줄에서 청색 비단옷 입은 사람. 소매자락에 책이 들어있다. 저런! 그만 책을 흘렸구나."
"예. 전하. 즉시 시험지를 빼앗겠사옵니다."
"우측 일곱 번째 줄에서 계속 움직이는 사람 보이느냐? 치질이라고 변명을 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밑에 책 깔고 앉은 것이다."
"예. 전하. 즉시……."
하지만 일일이 부정행위자를 지목하는 균의 체통이 없는 행동에도 균의 주변에 있던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시험장에 책을 가지고 들어왔다면 무기를 반입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많은 부정행위자가 나온다면 균의 호위체계에 구멍이 생겼다는 소리이니 관련자들은 모두 처벌대상이다. 그래서 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생각했다.
'전하가 계신 시험장의 경비가 저렇게 허술했다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고 책임을 추궁당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저렇게 우회적으로 질책을 하시다니 다 부족한 우리 신하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러시는 것이다.'
'사관과 승지들은 전하의 성격이 신경질적이라고 하던데 이제 보니 참으로 인자하신 분이구나. 하긴 전하께서 저렇게 인자하시고 사려가 깊으시니 나중에 분명 성군이 되시겠구나.'
그렇게 균의 옆에 있던 호위병과 시험관, 내관, 상궁나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일부러 가볍게 질책하는 균에게 내심 감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창 부드럽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균의 속마음은 달랐다.
'후후후. 의외로 컨닝하는 사람들을 잡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네. 다들 이 맛에 시험감독을 하는구나. 좋아. 이제부터 치르는 모든 과거는 다 내가 주관해야지. 카카카.'
그렇게 사악한 균이 혼자 신이 나서 과거시험장의 일부 선비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을 무렵 제 2사단장 유태수와 제 3사단장 오운은 휘하 병력을 동원하여 과거 시험장 바로 남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오늘 정오 무렵 광덕산기슭에서 반란군이 출몰할 것이라고 균이 미리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총 4500명의 호위군중에서 5백 명은 그대로 균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고 나머지 4천명은 두 장군이 지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두 장군이 지휘하는 4천명의 병사 중에 3천명은 비금도소총으로 무장한 총병이었고 나머지 1천명은 백병전에 대비한 창병들이었다. 그래서 두 장군은 병사들을 4열종대로 길게 배치하고 병사들에게 전투준비를 시켰다.
"이제 첫 실전이라서 그런지 병사들이 긴장한 것 같군."
"뭐, 긴장할 것까지야 있겠나? 반란군들이 보고는 두 배나 많은 병력에 놀라서 자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설마 그러겠는가? 그들의 추축도 구 중앙군소속 병사들이었으니 그렇게 우습게보면 곤란하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의 소총이 발사되는 소리만 들어도 알아서 무너지지 않을까?"
"하긴 우리도 저 소리를 들으면 가끔 놀라는데 이번에 동원된 소총은 3천여정이니 정말 천둥벼락보다도 큰 소리가 나겠군."
유태수, 오운 두 장군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전투준비는 모두 끝났다. 아니 그렇게 많은 준비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만약 반란군에 기병이 있다면 목책을 설치할 필요가 있지만 반란군은 훈련도 안 된 보병이다. 참호를 파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그 역시 없는 편이 더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호위군은 부대를 전투대열로 배치하고 병사 개개인에게 전투 준비시간과 휴식시간을 주는 것만으로 전투준비를 거의 마쳤다. 단 반란군에게 병력이 작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창병들은 뒤쪽에 따로 배치하고 명령이 떨어지면 앞으로 달려 나와 백병전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런데 유장군. 왜 전하께서 우리 군에 참호를 파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일까? 거기다 과거시험장 바로 근처에 위치를 하라니 좀 이상하지 않는가? 안 그래도 저쪽에 백성들이 우리를 이상하다고 쳐다보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 전투를 하라니……."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반란군의 정면돌격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는 군."
"정면돌격?"
"자네라면 잘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적군의 대열에 돌격을 하겠는가? 아니면 우회해서 준비가 안 된 곳으로 공격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반란군에게 준비가 안 된 모습을 보여서 정면돌격을 유도한 후 그다음 총병의 일제사격으로 끝장을 낸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미 아군의 전력이 예상보다 많다고 소문이 났을 텐데……. 반란군이 바보가 아닌 이상 군대를 회군시킬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일은 절대 없으니 전투준비나 잘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네."
두 장군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전투를 대비했다. 하지만 그들은 균의 이상한 지시에 대해서 의문점이 많았다. 적군의 움직임을 함부로 단정 짓는 것은 무척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균과 이순신의 대화처럼 반란군의 움직임은 균에 의해서 강요되고 있었다.
반란군 아니 천명충의군은 마곡사를 떠난 지 꼬박 하루가 넘게 걸려서 겨우 산지에서 벗어나 평야지대에 도착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호위군이 진을 치고 있고 목표물인 균이 선비들을 괴롭히고 있는 과거시험장이 나타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이 산지를 강행군하느라 너무 지쳐서 고민이 많았다.
"이보게 주장. 병사들이 너무 지쳤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주고 밥을 먹이는 편이 좋겠네."
"하지만 시간이……."
"지금 병사들을 데리고 가봐야 힘이 없어서 싸우지 못할 것이네. 거기다 적진에 무작정 돌입할 수도 없으니 첩자를 파견해야 하는데 그 시간동안이면 병사들에게 밥을 먹이고 휴식을 줄 수 있네."
"알겠네. 그렇게 하지. 전군 정지! 여기서 잠시 휴식한다! 배가 고픈 사람들은 간단히 요기를 하라!"
정재곤의 명령이 전해지자 병사들은 신음소리를 내며 길 좌우로 쓰러졌다. 사람들이 적은 길을 골라서 그것도 산길로 하루 종일 강행군을 하는 바람에 피로가 극심했다. 병사들은 간단한 요기꺼리를 먹기도 했지만 대부분 누워서 잠을 청했다. 첩자를 파견한 후 정재곤과 피시상은 그런 병사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병사들이 너무 많이 지쳤군. 그래 남은 병력은 얼마나 되나?"
"한 9천여 명 정도?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네. 하지만 우리 예상보다 많은 수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사실이니 이번 강행군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네."
"하긴. 몇 십 리나 되는 산길을 하루 종일 달려온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저 정도면 상당히 양호한 것이지. 그것은 그렇고 첩자가 돌아올 때까지 자네도 좀 쉬게나. 그래야지 나중에 힘껏 싸울 수 있지 않겠나?"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우리 같이 쉬세."
두 사람과 여러 부장들은 근처 공터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윽고 적진을 염탐 갔던 첩자가 돌아와서 자신이 본 사실을 고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들은 정재곤과 부장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군복을 입은 사람이 오천은 되어 보인다고?"
"예. 과거시험장이라서 그런지 군복을 입은 사람들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데 그 수가 족히 만 명은 넘어 보였습니다. 그중에서 절반쯤이 군복을 입고 있었느니까 오천 명이 군인입니다."
"말도 안 되네. 어떻게 2천명이던 호위대가 갑자기 5천으로 늘어나겠나?"
"소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입니다요."
"끙~!"
첩자를 내보낸 정재곤 등은 모두 신음소리를 냈다. 믿기는 어렵지만 첩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척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후퇴할 수도 없었다. 이미 군대를 일으킨 이상 자신들은 반역자가 되었고 조정에서는 더 많은 대군을 동원하여 자신들을 공격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지금 총력을 다하는 것이 더 현실성이 있었다.
"전군에 출정준비를 명하시오."
"주장! 하지만 적군이 너무 많지 않소?"
"이미 칼은 뽑아들었고 상대도 그것을 보고 칼을 뽑은 셈이오. 다시 칼을 칼집에 넣는다고 상대가 용서해 줄 것 같소? 차라리 상대편이 더 나타나기 전에, 아니 승산이 있을 때 한번 겨루는 것이 상책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