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228)

조선왕조실록-선조

무진삼란(삼려의 난).

며칠 후 이동영이 담당하고 있던 압록강 국경을 건너 여진족의 대부대가 조선으로 넘어왔다. 출병을 약속한 장백여진의 연합군이었다. 이동영의 근거지인 갑산은 국경에서 고작 백 여리밖에 안 떨어져 있는 곳이므로 세 개 부족으로 구성된 여진족들은 국경을 돌파한지 단 이틀 만에 갑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잘들 오셨소. 나 이동영이 세 분을 다시 보게 되어 무척 기쁘오. 그래, 먼 길을 온다고 힘들지는 않으셨소?"

"하하하. 우리 주셔리 부는 명예를 중시하는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소. 명예를 중시하는 우리가 약속을 어길 리가 있겠소?"

"우리 너연부의 전사들도 진정한 전사들이오. 이장군이 우리 부족에게 도움을 먼저 주었고 이제 우리의 도움을 청했으니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우리 야류장부도 마찬가지오."

여진족 장수들은 자신들이 약속을 지키는 명예로운 전사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이동영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번 내전에 개입하여 이동영이 주는 여러 가지 물자를 얻고자 왔을 뿐이지 진정으로 이동영을 돕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용병인 셈이었다.

물론 여진족들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정말 믿으려면 많은 기간동안 상호교류하면서 교분을 나누어 마음으로 친구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이번 일처럼 이익에 따라서 움직인 경우라면 믿기 어려운 상대일 뿐이다. 하지만 이동영은 그런 것은 내색하지 않은 채 웃는 얼굴로 그들을 응대했다.

"내가 여러분들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따뜻한 방에 술상을 준비해 두었으니 들어가서 잠시 피로를 풀도록 하시오. 그다음에 머리를 맞대고 공격계획을 논의하도록 합시다. 아! 물론 여러분의 부하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내리고 쉬게 할 터니 너무 염려 마시오."

"하하하! 역시 이장군의 배려는 언제나 감사하오. 그런데……. 나는 저기 있는 저 계집이 마음에 무척 드오. 저 계집이 내 시중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저 살결이 흰 계집이 마음에 드오. 우리 부족의 계집들과는 또 다른 풍미가 있구려."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조선의 계집들은 참 아름답게 생겼소."

'저놈들이!!!'

대놓고 자신에게 여자를 요구하는 여진족 장수들을 본 이동영은 심사가 뒤틀렸다. 비록 내색은 안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여진족들을 기습해서 다 때려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반란에 성공할 수 없고 반란에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과 자신의 가문, 그리고 부하들이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동영은 분을 삭이며 그들의 청을 들어주어야 했다.

'지금은 비록 네놈들의 힘이 필요해 내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다만 조선을 장악해서 최소한의 국력을 확보하면 네놈들부터 잡아 죽일 것이다.'

자신의 묵인 하에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골라서 방으로 들어가는 여진족 장수를 보면서 이동영과 그의 부하 장수들 그리고 병사들은 분을 삭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외국군대를 함부로 불러드린 자들의 운명이었다. 잠시 그들을 지켜보던 이동영은 기분이 안 좋았는지 곧 자리를 떠났다.

"헤! 헤! 함경도란 정말 오지구나."

"그렇습니다. 영감. 하! 하! 하!"

"그래도 이만하면 조정의 추격군은 오지 않겠지?"

"하긴 워낙 험한 길로만 돌아다녀서 추격하고 싶어도 추격해오지 못할 것입니다."

김진기와 그의 심복들은 인간승리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고생을 하면서 함경도에 도착했다. 충청도 부여를 출발해서 강원도 초입에서 송상 보부상인들을 만나 그들의 안내로 백두대간을 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올라온 지도 벌써 열흘째. 명문양반출신이며 벌서 오십 줄에 이른 김진기가 소화하기에는 힘든 여정이었다.

"왜? 감격한 표정으로 있는 것이오? 이제 겨우 함경도의 경계선에 들어온 것뿐이니 앞으로도 이만큼은 가야지 갑산에 도착하오."

"헉~!"

김진기 등은 양반의 체면 따위는 잊어버린 채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심정을 형용하기는 힘들지만 군대를 막 제대한 사람에게 다시 입대하라는 것과 같은 파괴력을 지닌 말이었다.

"이보시오. 그…그것이 정말이오?"

"참! 내가 잘못 생각했소……. 앞으로 갈 길은 지금까지의 길에 비해서 거리는 비슷한데 산이 훨씬 험하오. 아마 시간이 더 많이 걸리고 힘도 배로 들 것이오."

"컥~!"

김진기들은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떨어트리면서 가슴을 움켜잡았고 온몸을 떨었다. 그간의 가뜩이나 헬쓱헤진 양반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그들을 지켜보던 보부상인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귓속말을 나누었다.

"우리가 저들을 돕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저런 멍청이들이 반란군에 가세한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나으니 조금이나마 도움은 될 수 있을 거야. 그래야 함경도의 반란이 성공해서 우리 대방어른께서 풀려나실 가능성도 높아지지 않겠어?"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까지 김진기를 데리고 온 자들은 송상의 전 대방 송민진을 따르던 보부상들이었다. 송상의 보부상단은 약 3천여 명의 대규모 인원을 자랑하는데 실제로는 몇 십 명 단위의 소규모 상단으로 운영되었고 상호간에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경쟁을 조정하는 대방의 책임과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큰 편이었다.

송민진은 나중에 상인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보부상인들 중에서는 그가 다시 송상의 대방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았고 여기 이들처럼 송민진의 석방을 위해서 스스로 반란군에 도움이 되려는 자들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있었다.

"별 수 없어. 이미 대방어른은 반역자로 체포되신 몸.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언젠가는 처형되실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반란군을 돕는 것이 대방어른께 도움을 받은 우리들의 할일이야."

"하지만……."

"가자! 반란군은 곧 봉기할꺼야. 그전에 저들을 넘겨주는 것이 좋겠지."

균이 있는 경복궁에서 서쪽으로 향하면 한 채의 큰 저택이 나온다. 바로 전 덕흥군의 사저였던 인하궁이었다. 그렇게 큰 건물은 아니지만 현 국왕인 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에 궁이라는 호칭이 붙은 것으로 규모는 확장되지 않아서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 인하궁에 살고 있는 사람은 무척 많다. 먼저 균의 친어머니 정씨부인을 비롯하여 큰 형인 하원군 이정과 다섯 부인, 그리고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 마지막으로 인하궁의 폭군이며 균의 여동생 진이 이렇게 12명의 일가가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인하궁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우애앵~! 할머니. 진이고모가 자꾸 볼을 잡아 당겨요~."

"할머니. 진이고모가 자꾸 아기를 만지작거려서 막내가 울어요."

"마님. 진이 아가씨께서 정원을 쑥대밭으로……."

"마님. 진이 아가씨께서 부엌에 있는 그릇을 몽땅 가지고 나가서 던지기 놀이를……."

"아이고! 머리야. 정말 진이가 내 딸아이가 맞을까?"

균이 세자가 되어 경복궁으로 떠난 후, 인하궁은 진이의 독무대가 되었다. 최소한 균이 있을 때는 진이가 균에게만 엉겨 붙어서 다른 곳에 피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귀여운 손주들을 대상으로 각종 만행을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집 뒤의 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장안에 소문난 왈가닥들과 친분을 맺고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녔다.

저번 정월대보름에는 귀밝이술을 먹고는 취해서 경복궁에 놀러가겠다고 때를 쓰는 바람에 방에 가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창문을 부수고 달아나는 일도 있어 가족들과 하인들을 경악시켰다. 또한 어디서 배웠는지 치마를 입고도 담을 넘는 뛰어난 기술도 가지고 있어 통제가 아예 불가능했다.

'이미 장안에 왈가닥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시집이나 제대로 갈 수 있으려는지…….'

이미 한성부내에는 균과 진이 남매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물론 균이야 왕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일개 소녀에 불과한 진이가 악명을 떨친다는 것은 그간 가족들의 고충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회초리를 들어도 그때뿐이니 덕분에 어머니 정씨부인의 주름살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었다.

"으앙~! 지니고모~! 놔주세요."

"아우~! 귀여워라! 어쩜 말하는 것도 귀엽니?"

"하머니! 어머니! 고모가요!"

"후후후. 설마 이 고모가 그 정도의 방해에 굴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아! 그리고 두 분 오늘 외출하셨단다. 알! 겠! 니!"

"고모! 자모해서요."

"호호호! 귀여운 조카. 우리 뭐하고 놀까? 호호호!"

진이의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하인들은 안절부절했다. 진이의 저런 높은 음의 웃음소리라면 괴롭히기가 최고조에 달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때 하인들의 귀에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두려운 소리가 들렸다.

"진이야! 나 왔어!"

"탁~!"

그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온 집안을 가득 메우던 진이의 웃음소리는 툭하고 멎었다. 그리고 진이가 거의 문을 부수다시피 열고 나오더니 담을 행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담을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진이야 뭐하니?"

"으악~!"

진이는 간신히 올라섰던 담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진이가 떨어져 널부러진 담 위로 한 명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인하궁의 폭군을 단숨에 잠재운 그녀의 얼굴을 보고 얼굴빛이 변했다.

"어머! 방집사님(원래는 정집사였는데 정씨가 너무 많아서 고쳤습니다.). 안녕하세요?"

"…예. 세희아가씨.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어머! 방집사님, 계속 식은땀을 흘리시네요?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아…아닙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집사를 비롯한 하인들은 널브러져 있는 진이가 있는데도 감히 구출하러 갈 생각을 못했다. 방금 전 세희라고 불린 여인이 낑낑거리며 담을 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희라는 여인은 힘겹게 담에 올라서서는 말했다.

"어머! 여긴 계단이 없네요?"

"벽…벽에 계단이 있는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희아가씨."

"전 진이가 나타나기에 계단이 있는 줄 알았어요. 그건 그렇고 진이가 요즘 피곤한 모양이지요?"

세희가 손가락으로 아직도 땅에 누워있는 진이를 가리키자 그제서야 방집사가 명을 내렸고 하인들이 달려갔다. 하지만 세희가 돕겠다고 나서자 모두들 그 자리에서 정지하고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아가씨를……."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닙니다. 아가씨. 안 도와주시는 것이 돕는 일입니다. 그보다는 어서 담에서 내려오셔서 대문으로 들어오시지요."

"네. 방집사님. 아쉽지만 그렇게 하지요."

방집사는 진심어린 표정으로 세희를 만류했다. 세희는 그런 방집사에게 감복했는지 다시 낑낑거리며 담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끼가 낀 담장 위가 미끄러웠는지 세희는 그만 굴러 떨어졌다. 그것도 쓰러진 진이의 위쪽으로 말이다.

"쿵~!"

"진…진이 아가씨~!!!"

"빨리 의원을 불러라!"

다행이도 세희가 떨어진 곳은 진이의 위가 아니고 바로 옆이었다. 그래서 진이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벗어나 무사히 구출되었고 놀러온 대상이 없어진 세희는 진이가 데리고 놀던 아이를 데리고 놀아주기로 했다.

"진이가 자는 모양이니 내가 놀아줄게. 자! 우리 뭐하고 놀까?"

"무서워! 무서워!"

아이는 세희의 말에 그렇게 싫어하던 진이의 곁으로 가서 진이의 손을 잡고 '무서워'라는 말을 연발했다. 진이는 아이를 괴롭히기는 하지만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희는 스스로 의도하지는 않지만 엄청난 사고뭉치였다. 인하궁의 폭군인 진이가 도망다니는 유일한 인물. 바로 김세희라는 여인이었다.

"왜 날 무서워하지?"

김세희는 아이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우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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