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228)

조선왕조실록-선조

무진삼란(삼려의 난).

이성량, 이여송부자의 말처럼 명나라 13대 황제 목종 융경제는 얼마 전 실무에 복귀한 대학사 고공의 청을 받아드려 명나라의 제후인 조선왕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10만의 대군을 파견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이를 내각에 지시했다. 이에 상당수의 명나라 신료들이 반대를 표명했다.

명나라 자체도 자국을 방어할 군대가 부족했고 그 군대를 유지할 군사비마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개 속국을 위해서 대규모 군대를 움직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공은 장거정에게 불만이 있는 자들을 포섭하여 지지를 끌어냈고 군사비는 나중에 조선왕에게 배로 받아내면 된다는 논리로 일을 추진했다.

그래서 명나라의 지원군은 예상보다는 빠르게 준비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남쪽에 주둔한 군대까지 불러 모으느라 출정준비에 거의 반년이 소요되었지만 이번에는 황제이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북경근처의 농민들과 빈민들을 모아 병사로 삼았기 때문에 시간이 적게 걸렸던 것이다.

덕분에 명나라 십만 정병의 실상은 농민 5만여 명을 모아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예부상서 겸 대학사 장거정은 반대를 표명했지만 조정의 상황이 고공에게 유리한데다가 균이 저번에 준 서찰도 있어 가만히 있기로 하였다. 하지만 내심 걱정이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명나라 지원군의 출정준비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을 무렵 장거정에게 이성량이 파견한 밀사가 도착했다. 밀사로부터 이성량의 서찰을 받아본 장거정은 이성량의 말이 옳다는 것을 공감했지만 그렇게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고 밀사는 그런 장거정의 반응에 몸이 달아서 설득하기 시작했다.

"상서대인께서도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만 총병관께서는 상서대인께서 이번 일에 움직이지 않으신 것을 크게 우려 하고 계십니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총병관께서는 지휘책임을 물어서 처벌받을 것이고 상서대인께서는 외교책임자로써 책임을 지셔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정작 제안자인 고공은 실무진의 실수 때문에 일을 망쳤다고 주장하고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려 할지 모른다. 이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상서대인. 이번 일은 대인과 저희 총병관, 그리고 조선과 대명제국에 해가 되는 일입니다. 꼭 막아야 하는 일입니다."

밀사는 시큰둥한 장거정의 반응에 실망하면서도 계속해서 장거정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장거정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사실은 장거정도 손을 쓰고 싶었지만 균이 칙사들에게 뇌물을 주는 것을 거절하는 바람에 북경으로 돌아온 칙사들이 균과 장거정의 관계를 악의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서 장거정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곤란했다.

"총병관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게. 그리고 그만 나가보게."

"상서대인!"

"그리고 총병관이 너무 불안해하면 이렇게 전하게. '조선왕은 세간에 알려진 데로 그냥 운 좋게 왕위에 오른 인물이 아니다'라고 말이네."

그렇게 북경에서 장거정과 이성량의 밀사가 접촉하고 있을 무렵, 이성량의 맏아들인 이여송은 집에서 부리던 하인 십여 명과 함께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인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밀입국한 것이지만 조선왕에게 전해줄 밀서와 증표를 휴대하고 있었다.

"역시 조선은 아버님께 듣던 대로 산이 많은 나라이구나."

"그렇습니다. 도련님. 광활하고 기름진 요동벌판에 비하면 산만 잔뜩 있는 땅덩이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 은 같은 광물이 많이 나고 산천이 아름다운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래. 그것은 나도 들었다. 특히 지형지세가 빼어나서 좁은 국토에 비해서 인물이 많이 태어난다고 하시더구나."

"도련님. 아무리 인물이 많아봐야 나라가 작아서 쓰일 곳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긴 우리 가문도 원래 조선에서 살다가 명나라에 와서 출세했지. 빨리 가자. 조선의 도읍인 한성까지는 아직 천리 길이다."

이렇게 명나라의 정세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정작 조선의 정세는 반란의 휴유증이 빠르게 수습되어 가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 들어난 모습만 그랬을 뿐 아직도 한성부 곳곳에서는 여러 가지 밀담이 오가는 처지였다. 그리고 한성부 인근의 북한산성에서도 밀담이 오가려하고 있었다.

"오늘은 귀한 분이 오십니다. 어르신께서도 마음의 준비를 해주시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연이 너도 좀 단장하는 것이 좋을 꺼다."

"네가 깔끔한 옷을 입은 것을 보니 제법 높은 사람이 오기는 오는 모양이구나."

"보통 높으신 분이 아닙니다. 어르신."

"설마 왕이라도 온다는 말이냐?"

"전하의 면전에서 함부로 왕이라고 칭하다가는 어르신뿐만 아니고 지연이도 무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어르신께서 고려의 후예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전하께서는 왕이라고 불리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니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안성희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던 송민진은 뜻밖의 말에 놀랐는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직접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반역에 관련된 자신을 임금이 직접 만나러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얼마 후 안성희의 안내를 받으며 두 소년이 방으로 들어왔다. 둘 다 귀티가 나게 생겼는데 한 명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고 한 명은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송민진은 진지한 얼굴을 가진 소년이 왕 인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상석에 앉은 것은 무뚝뚝한 얼굴을 가진 균이었다. 균은 밤중에 곽재우를 대동하고 송민진을 만나러 찾아온 것이다. 곽재우와 안성희, 안지연은 두 사람만 이야기를 하게 자리를 비껴주려고 했지만 균은 손짓으로 그냥 있으라고 신호했다. 그래서 방 안에는 균, 곽재우, 안성희, 송민진, 안지연 이렇게 다섯 사람이 있게 되었다.

"송상대방이라면 나름대로 성공한 상인이다. 그런데 왜 반란이 가담하여 모든 것을 날렸는가?"

"저는 고려의 후예입니다. 조상의 한을 후손이 갚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이유라는 것이 고작 170년 전에 썩어서 사라진 고려왕조 때문이란 말이냐?"

"당금의 현실도 그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움직인 것이 아니더냐? 너는 그 일을 방해하고 오히려 반란 하나를 더 유도하여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으니 역시 썩어빠진 고려의 후예답구나."

송민진은 자꾸 고려가 썩어서 망했다고 주장하는 균에게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고려왕실이 제대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면 그런 반란은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렵 고려왕실은 민심을 잃을 대로 잃어서 근거지인 수도 개성에서 모병한 군사가 고작 수십 명이었다.

"하지만……."

"고려가 망한 것은 우리 조선 때문이 아니었다. 그 자체의 모순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고 그래서 한번에 무너진 것이었다. 국가의 기강이 바로서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면 백성들이 왕조의 몰락을 두고 보았겠느냐?"

"그것은……. 정도전 같은 자들이 토지를 나누어주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시켜 그리된 것입니다."

"그 말을 바꾸면 고려왕실이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반면 우리 조선은 백성들의 민심을 제대로 읽었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 아니냐? 백성들의 소원이라면 배불리 먹고 등 따신 것이 제일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들이 농사를 지을 토지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고려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조선은 그렇게 했다.

민심은 곧 천심이다. 민심을 모르는 고려가 어찌 천명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었겠느냐? 그리고 진정으로 천심이 있었다면 170년 동안 조선이 지속되어온 이유는 무엇이냐? 그 정도라면 언제든 고려가 다시 부흥할 충분한 시간이 아니더냐? 네가 말하는 조상의 한은 핑계일 뿐이다."

균의 말처럼 송민진은 고려의 후예이기는 했지만 그 자신도 고려의 부흥을 꿈꾸고 있지는 않았다. 고려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 왕조일 뿐이었고 송민진은 상인답게 현실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은 고려를 무너트리고 해준 것도 없는 주제에 세금만 거두어 가는 조선왕조의 몰락일 뿐이었다.

"내가 아는 바로 개성사람들의 불만은 다른 것에 있다고 들었다. 하나는 아무리 유능해도 조선의 관직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직까지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조정의 시책에 의해서 상업 활동에 지장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그러하옵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미 고려가 망한지도 170년이 지나서 고려의 옛 세력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고 송상은 많은 세금을 바쳐 국고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인재가 필요한데 개성의 수많은 인재들을 계속 썩히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로 송상에서 세금을 많이 거두라는 명을 내렸다.

요즘처럼 조정의 세금이 부족한 이때 송상에서 자발적으로 많은 세금을 낸다면 나는 이것을 바탕으로 신료들을 설득하여 개성에 대한 제제조치를 풀어버리려고 했다. 분명한 실적을 내보여주면서 그만한 대우를 해주겠다고 하면 누가 감히 반대를 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너희들이 170년간 공을 들인 일은 이제는 물 건너간 일이 되고 말았구나."

"……."

조선시대에는 지역차별이 상당히 많았다. 이것은 양반 중심의 지배체계를 공고히 하려는 양반들 때문이었는데 지배층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지배체계가 혼란해서 무너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반들은 먼저 서얼들을 차별하여 자기도태를 시작하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지역차별을 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를 보다면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우 사람들의 성품이 사납다는 이유로 관리를 임용하지 않았고 전라도는 정여립의 난 이후 반골의 기질이 있다고 차별하기 시작했다. 개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고려조 500년 동안 수준 높은 학문을 자랑하던 개성출신 선비들이 관리가 되면 자신들의 벼슬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그런 차별이 몇 백 년이나 지속된 것이었다.

덕분에 조선왕조실록에는 개성출신 선비들이 술 먹고 행패를 부린다는 기사가 가끔 나오는데 현실적인 벽에 부딪쳐 좌절하는 그들의 심정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송민진의 행동은 바로 이런 조선왕조의 차별대우에 대한 반발과 거기다 세금을 많이 거두어가는 조정에 대한 반감으로 나온 것이었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이유로 일어난 반란은 적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출신의 유생들을 관리로 등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반란이고 이시애의 난 역시 이징옥의 난 이후 함경도에 대한 조정의 차별을 바탕으로 일어난 반란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도 지역차별문제는 상당히 심각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은 것은 전후사정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내가 송상에 세금을 많이 물려서 촉발된 일이니 내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 빨리 알아냈다면 여기 있는 요원을 통해서 언질을 주었을 것인데 너의 행동이 워낙 은밀하여 자세한 사정을 알아내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나중에 내가 알았을 때에는 너의 행동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포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화가 나서 저번에 그런 말을 남겨 내 계획을 멋지게 망친 그대를 조롱한 것이다. 일단 이번 일로 인해서 송상의 타격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 선에서 어느 정도 최소화 해주겠다. 그리고 너희 둘은 나중에 잠잠해지면 풀어줄 터이니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숨어살도록 하라. 아니라면 너희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전하."

말을 마친 균은 송민진의 말에도 불구하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송민진은 자신이 한 행동이 오히려 자신과 개성사람들의 염원을 망친 것이라는 균의 말이 바로 믿기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연기력을 자랑하는 균이 안타까움과 비장감을 풀풀 풍기면서 한 말들은 가슴속에 남았다.

"전하."

"왜 그러느냐?"

북한산성에서 경복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곽재우가 균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까지도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균을 보니 좀 낌새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사주단자를 요구하는 균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까 전 송상대방에게 하신 말씀이 사실이시옵니까?"

"글쎄다. 사실이면 어떻고 사실이 아니면 어떻겠느냐? 이미 지난 일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 아니냐? 그보다는 그 다음 일을 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어서 가자구나."

균은 뜻 모를 말을 남긴 채 빨리 경복궁으로 향했다. 곽재우는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균의 내심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균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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