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160 회]
무진삼란(삼려의 난).
반란군의 조흥수부대가 함경도 감영이 위치한 함흥을 공격한 것은 21일의 일이었다. 화령(화려에서 고쳤음.)군 소속의 조흥수 부대는 여진족 1만 2천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전원 기병이었고 보급물자도 주변에서 약탈했기에 신속히 이동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도 있었지만 주셔리, 너연, 야류장 세 부족간의 갈등이 잦아서 늦게 도착한 것이 이 정도였다.
"돈고호리님, 아패란님, 타오가치님. 저기 보이는 성이 함흥성입니다. 함경도에서는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갑산보다 훨씬 번화하게 보이는군. 그렇다면 지키는 군사들도 많이 않겠나? 아무리 오합지졸이라도 저런 성벽에 의지해서 싸우면 물리치기가 까다롭네."
"바로 함락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안 그래도 이동영장군의 본군이 도착하면 이곳에서 합세할 예정이 아니었습니까? 여기서 조선군의 진출을 차단하는 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저희측 보병을 기다려주십시오."
"아니야. 아니야. 그러면 이런 허허벌판에서 며칠씩 보내야 하는 데 그러는 것은 우리 적성에 안 맞아. 당신들도 안 그렇소?"
돈고호리의 말에 아패란과 타오가치도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러자 용기를 얻은 돈고호리는 조흥수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주셔리부의 용사들아! 저 성에는 따뜻한 잠자리와 맛있는 식사. 그리고 감미로운 술과 아리다운 여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대로 여기서 죽치고 기다리겠는가?"
"아닙니다! 돈고호리님!"
"그럼 가자! 나를 따르라!"
"쥬셔리부 따위에 우리 너연부가 질 수는 없지. 너연부의 용사들은 나를 따르라!"
"우리 야류장부도 지지 않는다. 자! 가자!"
조흥수가 말릴 뜸도 없이 세 장수들은 자신들의 병사들을 움직였다. 1만 2천에 달하는 대규모 기마대가 일제히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여진족들이 목이 터져라 내는 고함소리는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와 요란한 말 울음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모습만 보아도 감히 상대할 자가 없어 보일 지경이었다.
"이…이봐! 여…여진족이다!"
"자네. 무슨 헛소리야. 압록강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무슨 헛소리야? 자네 어제 먹은 술이 덜 깬 건가?"
"저기를 보라고! 저 먼지구름을 보라는 말이야. 함경도 일대의 아군 기병을 다 모아도 저 정도는 안 나올 거야!"
"맙소사! 수만은 되어 보여! 어서 징을 울리게. 여진족이다! 여진족이 쳐들어왔다!"
함흥은 함경도 감영이 위치한 곳이지만 북방군이 있는 최전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평시 주둔하고 있는 병사는 고작 몇 백 명에 불과했고 게다가 방심하고 있었다. 여진족의 대군을 발견한 병사들이 징을 울리고 소리를 질러 여진족의 습격을 알렸지만 함흥성의 성문은 닫칠 줄을 몰랐다.
"웬 징소리지? 어디서 풍물놀이라도 하나?"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사당패가 와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모양이지. 하아암~!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지 빨리 교대하고 따뜻한 곳에서 쉬고 싶군."
"그런데 땅이 울린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아? 말울음소리 같은 것도 멀리서 들리는 것 같고?"
"그런 것 같기는 한데……. 뭐, 별일이야 있겠어? 고작해야 말 장수들이 때를 지어 돌아다니는 소리겠지."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적의 내습을 알리는 징소리와 여진족이 다가오면서 내는 소음에도 하품을 하면서 잡답을 나누는 수준이었다. 그들의 생각에 여진족의 습격은 아주 옛날의 일이지 결코 지금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여진족의 습격에 대해서 제대로 연락을 받지 못했기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봐! 저…저건. 말 장수가 아니야! 대규모 기마대라고!"
"제기런! 왜 이런 곳까지 여진족이 나타나는 거야!"
반쯤 졸고 있던 그들이 여진족의 습격을 알게 된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그들의 시야에도 대규모 기마대가 일으키는 먼지구름이 보였고 말발굽소리와 말울음소리가 귀에 들렸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징소리를 들은 수문장이 나타나서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지휘해 성문을 닫기 시작했다.
"무엇들 하느냐? 네놈들은 저 징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나…나으리."
"적 기병이 들이닥치기 전에 어서 성문을 닫아라! 어서……. 커어억~!"
병사들을 지휘하던 수문장이 갑자기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그의 등에는 여진족이 쓰는 화살이 서너 개나 박혀있었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여진족들의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는 수문장 혼자만 쓰러진 반면 이번에서는 성문에 모여 있던 병사 십 여 명이 입가에 피를 흘리며 나동그라졌다.
"도…도망가자!"
졸지에 지휘관과 동료들을 잃어버린 조선군 병사들은 한 사람이 달아나자 성문을 닫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앞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여진족 기병들은 반쯤 닫혀있는 성문을 통해서 함흥성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들의 얼굴에는 방금 전 도망간 조선군에 대한 비웃음과 손쉽게 성문을 통과했다는 기쁨이 그대로 들어나 있었다.
"하하하! 이 머저리들! 성문을 닫지 않아서 고맙다. 그 댓가로 죽어라!"
"으악~!"
"차라리 수수깡을 빼는 것이 더 낫겠군. 겁에 질려서 저항도 못하는 것들이 병사들이라니……."
"컥~!"
도망치던 조선군 병사들이 가장 먼저 성내에 침입한 여진족이 휘두른 칼의 희생자가 되었다. 차라리 용기를 내서 성문을 닫았다면 살 수 있을지 몰랐지만 도망치는 바람에 그들은 목숨을 잃었고 그들의 가족들 역시 위험에 빠졌다. 조선군 병사들의 시체위로 여진족들의 비웃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들의 말이 힘차게 내달렸다.
"막아라! 최소한 가족들이 달아날 시간은 벌어야 한다!"
길목 곳곳에서 일부 조선군 병사들은 용감하게 자신들의 무기인 당파창(삼지창의 발전형)으로 여진족들에게 대항했다. 시가전이라서 조선군 병사들이 유리한 점도 적지는 않았지만 너무 수가 적은데다가 조직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대규모의 여진족들에게 손쉽게 무너졌다.
"제법 성가신 놈들이군. 여봐라! 활을 쏴라!"
여진족 장수들의 명령에 따라서 병사들이 활을 쏘았다. 여진족의 활은 조선의 각궁보다 못하지만 상당히 우수한 활인 맥궁이었다. 원래 맥궁은 고구려시대의 유명한 활인데 조선인들이나 여진족들이나 다 같은 나라의 백성들이었기에 여진족의 활 역시 위력적이었다. 곧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에서 화살들이 날아올랐다가 곧 조선군의 머리위로 쏟아졌다.
"으악! 어머니!"
"내 눈이!"
"저기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빨리 치워버려라!"
여진족은 워낙 많고 조선군은 워낙 적다보니 여진족이 일제히 화살을 날리기만 해도 조선군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리고 기병이 돌격해서 쓰러진 채 신음하는 조선군 병사들까지 모두 죽여 버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군 병사들은 백성들과 섞여 달아나기에 바빴고 여진족들은 빠른 속도로 성의 중심부로 진격했다.
그렇게 저항하는 조선군 병사들을 도륙한 여진족 기마대는 먼저 성내의 주요 관아를 공격했다. 이동영과 조흥수의 부탁으로 민가에 대한 약탈은 일단 금지되었지만 관아는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관아에는 수많은 재물과 관기(관아에 속한 기생)들이 있어서 여진족들의 약탈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관아에 난입한 여진족들은 저항하는 포졸들을 한칼에 베어 넘겼다. 소수의 포졸들은 마치 허수아비인냥 동헌의 앞뜰에 몸을 뉘었고 관아에 있던 관리들과 서리들은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벌벌 떨다가 포졸들과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여진족들은 겁에 질려 울고 있는 관기들을 들쳐 업고 기분이 좋은 듯 마음껏 웃었다.
"음하하하~!!!"
"까아악~! 엄마야!"
"제발 사…살려주시오!"
"으아악~!!!"
여진족들의 웃음소리와 여자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내는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방금 전까지 함경도 감영이었던 건물을 가득 채웠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여진족들은 더욱 기뻐했다. 이런 것들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여진족들에게는 오히려 일상적인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음하하하! 역시 조선은 재물도 많고 예쁜 계집들도 많구나! 저기 쓸모없는 사내놈들은 다 베어버려라! 그리고 재물과 계집들을 다 챙긴 후에 이 곳에 불을 질러라! 그리고 다른 곳으로 간다!"
"예. 돈고호리님. 뭣들 하느냐? 어서 재물과 계집들을 챙기고 불을 질러라!"
잠시 후 관아에서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비명소리와 불길은 이동영의 금지령에도 불과하고 점차 함흥 전체로 퍼져나갔다. 성밖에 있다가 뒤늦게 들어온 조흥수는 성내의 참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그는 돈고호리 등 여진족 장수들을 찾아가 왜 이동영의 부탁을 어겼는지를 따졌다.
"돈고호리님.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원래 약탈은 관아에만 하는 것으로 약속하고 부족한 물자는 저희가 공급해주는 것으로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저렇게 일반 민가들까지 약탈하시다니요?"
"원래 약탈이란 승리자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다. 우리는 그것을 행사했을 뿐이고 또 그래야지 내가 거느린 전사들의 사기가 올라서 다음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면 민심이 동요합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에게 해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전사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것은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이다. 그러면 다음 전투에서 우리는 패할 것이고 그만큼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그래도 좋다는 말인가?"
"제 말은 그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가만히 있으라. 우리는 그대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온 지원군이지 그대들의 부하가 아니다. 더욱이 이렇게 큰 성을 함락시킨다고 동료들을 많이 잃어버린 내 부하들에게 그대들의 사고방식을 강요하지마라. 우리는 조선인이 아니라 여진족이다."
"…알겠소이다."
장백여진은 조선과 가장 인접한 곳에 사는 여진족들로 대대로 조선을 약탈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은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백성들을 약탈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조흥수는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눈앞에서 동포들이 죽어 가는데 그것을 두고 보아야 하는 자신에게 환멸감마저 느꼈다.
여진족 1만 2천으로 구성된 화령군 조흥수부대는 단 두 시진(4시간)만에 함경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함흥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며칠동안 함흥에 머물면서 성내의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으며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덕분에 함흥은 처참할 정도로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은 남부여대를 한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도망친다고 해서 그들의 고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여진족들이 도망가는 사람들을 잡으러 쫓아 나왔기 때문이었다. 여진족들은 마치 놀이를 즐기듯이 도망치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래서 함흥사람들은 도망치지도 못한 채 여진족들의 횡포와 약탈을 감수해야 했다.
화령군의 부장 조흥수가 낸 비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여진족의 희생자는 약 백여 명. 그것도 함흥전투에서 낸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입은 손실을 모두 합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군의 전사자는 3백~5백여 명, 민간인 피해는 수천 명이 나왔다. 그 정도라면 함경도 제일의 도시인 함흥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큰 피해였다.
당시 조선의 주요도시들 중에서 인구가 1만을 넘어가는 도시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함흥이 아무리 큰 도시라고 해도 조선 제 2의 도시인 평양이 고작 4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함흥은 도시 전체가 초상집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여진족들은 함흥에서 이동영의 군대를 기다리면서 계속 약탈을 자행했다.
함흥전투의 결과가 이동영에게 알려진 것은 이틀 뒤인 23일의 일이었다. 조흥수가 보내온 서찰을 읽은 이동영은 얼굴빛이 하애졌다. 자신도 여진족이 난폭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진족에게 충분한 물자를 공급하고 작전계획에도 이점을 고려한 상황이라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런 참극이 있을 수가 있다니……. 백성 수천 명이 때죽음을 당하다니……. 대체 조흥수는 일을 어떻게 했길래, 저런 일이 생겼다는 말인가?"
"조부장께서도 최선을 다하셨습니다만 여진족들은 부장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여진족, 그자들이 나를 망치려고 작정을 한 것인가? 반란이 성공하는 것은 민심의 향배가 가장 중요한데 이래서 어떻게 백성들을 우리 편으로 만든다는 말인가?"
"조부장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다. 차라리 군대를 나누지 말고 같이 운용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인데, 아니 계획대로 함흥성을 포위만 하고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동영과 조흥수 역시 장백여진들을 완전히 믿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의 초기계획은 여진족이 조선군의 주력을 함흥일대에 묶어두는 사이 이동영이 해안가를 돌면서 세력을 키우고 다시 합세하는 것으로 함흥 같은 곳에 여진족을 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예상보다도 너무 빨리 함흥성이 무너지면서 일이 꼬여버린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다는 말이냐? 이 일을 어찌해!"
이동영은 너무 실망했는지 다른 부하장수들이 있는데도 큰 소리를 질렀다. 당장 내일 길주를 점령하는 첫 전투가 있는데 이래서는 원래의 목표인 무혈입성은 물 건너 간 셈이었다. 아니 아직 소문이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니 길주는 문제가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단천, 북청 같은 주요 고을들의 상황은 최악일 것이 분명했다. 이동영에게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