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무진삼란(삼려의 난).
물론 16세기 무렵에 기병과 보병이 정면대결 한다면 상당수 기병의 승리로 돌아간다. 기병의 빠른 이동력과 강한 충격력은 아직도 충분히 위력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병의 몰락은 이미 시작된 상황이다. 그전의 기병은 같은 기병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강자였지만 지금은 번번이 보병에게 발목을 잡히고 있다.
그 이유는 보병이 개인화기인 총의 등장으로 강력한 원거리 공격능력을 갖추었지만 기병의 발전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기병에 비해서 보병은 싼 값에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는 경제적인 이점도 가지고 있어서 세계 각국은 점차 기병을 대신해 보병을 양성하고 있던 시대가 바로 지금이었다.
물론 장수들이 생각하는 데로 분명히 여진족의 기병은 강하다. 하지만 군대를 단일병종으로 구성하는 것은 그만큼 전술의 폭을 한정하는 문제가 있다. 반면 토벌군은 보병을 주력으로 하고는 있지만 여러 가지 병종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만큼 전술의 폭이 넓다. 한마디로 균이 꺼내들 수 있는 패가 여진족이 가진 패보다 많다는 소리이다. 그래서 균은 여유만만 했다.
'그러니 기병만 많다고 겁낼 필요는 없지. 물론 패를 잘 못 냈다가 더 피해가 클 수도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개의 병종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만큼 강한 군대도 찾기 힘들다.'
장수들과 별 의미 없는 회의를 마친 균은 침울했던 마음을 달래려는 듯이 책과 종이를 가지고 와서 몇 자 끄적거렸다. 그리고는 끄적거린 책과 종이를 곽재우에게 주어 어디론 가로 보냈다. 다음날인 29일. 잠시 휴식을 취한 토벌군은 다시 안변을 출발하여 함흥방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동영의 화령군 본대가 단천을 함락시킨 것도 29일의 일이었다. 단천을 지키고 있던 병력은 급히 소집된 병사 오백여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 정도로는 단천성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1만의 대군이 당도하자 단천군수는 달아나고 병사들은 흩어져 버리거나 화령군에 가세해왔다.
"역시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강공을 취하니 적들이 당황하여 알아서 무너지는구려."
"그렇소. 대원수. 이제 단천을 손에 넣었으니 다음은 이성현(북청과 단천사이에 있던 작은 고을)을 빠르게 점령하고 그곳을 발판으로 북청을 함락시켜야 하오. 특히 북청은 함경남병영이 있는 곳이니 이곳 단천처럼 허무하게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니 충분한 준비가 필요할 것이오."
"대군사. 무슨 걱정이겠소? 이미 점령한 단천과 이성에서 군사를 모으면 3천의 군사를 어떻게든 얻을 수 있을 것이오. 거기다 길주에 있던 우리 군대가 북진하여 명천현까지 점령했다고 하니 우리 군대의 병력도 1만 5천에 달하게 될 것이오."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시시각각 토벌군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할 것이오."
화령대원수 이동영의 말에 새로이 화령대군사라는 지위를 받은 김진기가 나름대로 공손히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의 자식뻘에 가까운 이동영이 나이가 많은 자신에게 높임말을 쓰지 않는 것이 김진기는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균과 싸우려면 김진기는 이동영의 힘을 빌려야 했다.
보부상들의 안내를 받아 함경도에 도착한 김진기는 자칭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조흥수를 만나서 이동영에게 자신의 계책이 적힌 편지를 보낼 수 있었고 이에 이동영은 김진기를 초빙하여 협력을 요청했다. 그 결과 세력은 없지만 아는 것이 많은 김진기가 군사로 활동하는 대신에 나중에 이동영이 왕위에 오르면 영의정으로 임명해주는 것으로 협의되었다.
물론 김진기는 정도전이 그랬던 것처럼 신권정치를 구현하여 자신이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가 되기를 바랐고 이동영은 이방원이 그랬던 것처럼 강력한 왕권을 만들어 조선을 호령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동지가 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주 강력한 공동의 적이 있기에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그래서 이번 무진삼란의 두 주역인 이동영과 김진기가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백성들의 민심이 좋지 않아서 후방에 많은 군대를 주둔시켜야 한다는 점이 가장 문제가 아니겠소? 원래라면 지금쯤 함경북도는 모두 우리 손에 들어오고 우리 군대도 3만은 넘었어야 하는 것인데……. 그래서 빠르게 진격하는데 무리가 많소. 혹시 대군사께 좋은 생각이 없으시오?"
"백성들은 어리석은 존재요. 그 점을 잊으셨소?"
"그렇다면?"
"이시애의 난을 기억해보시오. 특히 그가 퍼트린 소문 말이오."
백 년전 이시애는 자신이 난을 일으키기 전에 소문을 하나 퍼트렸다. 그리고 그 소문에 격분한 함경도민들은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적극적으로 합세하여 조선전기의 최대 반란이라고 불리는 이시애의 난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시애가 퍼트린 소문을 보면 좀 당황스럽다.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 군사들이 수륙 양면에 걸쳐 함길도로 진격해 오고 있다. 충청도 군병은 배를 타고 경상, 후라도에 와서 정박하고 있다. 조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를 보내 설한령을 통해 북도로 들어와 장차 본도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
지금의 함경도가 조선의 영역이 된 것은 고려 말기의 일이다. 새로운 영토를 확보한 조선은 남쪽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했는데 자연환경이 척박하고 여진족의 침입이 많아서 함경도로의 이주를 꺼렸다. 그래서 조선은 할 수 없이 죄를 지은 자들을 함경도로 보내서 부족한 인구를 충족했고 함경도민들은 조선정부에 여러 가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남쪽에 대한 지역감정이 심했고 저런 소문에도 쉽게 흥분했다. 거기다 이시애는 언변이 있는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임금인 세조가 속아서 자신의 심복인 신숙주를 감금했을 정도였다. 그런 이시애가 한 거짓말에 백성들은 대부분 속아 넘어갔고 무려 4개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럼 이번 일을 왕에게 뒤집어씌우자는 말이오?"
"그렇소. 대원수. 원래 소문이라는 것은 조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소. 나도 예전에는 조정에서 실시하는 수미법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현혹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지만 정세가 바뀌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소. 하지만 교통이 불편한 함경도에서 일반 백성들이 정확한 함흥의 실정을 알기란 불가능한 것이니 적당한 헛소문을 유포시키자는 말이오."
"역시 김공은 대군사가 될 자격이 있는 분이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역시 예전부터 반란을 일으켜 균을 쫓아내려고 했던 사람답게 김진기의 머리는 그런 부분에서는 잘 돌아갔다. 그의 말대로 균이 가장 고민을 하던 수미법에 관련된 헛소문도 그의 작품이었다. 양반들에게 세금을 걷는 것이 수미법인데 이것을 백성들에게 돌려 경제적인 이익도 취하고 백성들에게 불만을 조장했던 바로 그것을 말한다.
그 소문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론적으로는 균이 직접 내려오는 바람에 실패했다. 김진기의 입장에서는 아주 힘들게 소문을 퍼트렸지만 균은 김진기를 도박판으로 불러드려 한판에 그를 올인시켜 버렸다. 그리고 지금 김진기는 이동영에게 붙어서 훈수나 해주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아직 그의 뛰어난 머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성군 그 자가 북방군에 보내는 소금이 있는데 보통의 소금보다 유난히 짜고 맛이 쓰다고 하오. 북방군에 보내지는 소금이 잠시 모이는 곳이 바로 함흥인데 함흥의 일부 백성들이 그 이상한 소금을 먹고 광증에 시달려 난동을 부린 것이라고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오."
"아! 그 수가 있겠구려. 백성들에게 그런 소문을 전파하면서 그 소금을 조금씩 나누어준다면 백성들은 자신들도 광증에 걸릴까바 아주 조금만 소금을 먹어보고 소문대로 맛이 이상하니 우리의 소문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오."
"그렇소. 대원수. 내가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오. 원래 사람들을 거짓말로 속이려면 약간의 진실을 동반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 아니겠소? 하하하!"
"참으로 좋은 생각이오. 내, 꼭 대군사의 조언을 받아드리겠소. 하하하!"
원래 조선의 소금은 자염이고 균이 만드는 소금은 천일염이다. 두 소금을 비교하면 대체로 자염의 염도가 낮고 맛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균이 북방군에 소금을 무상지급할 때부터 왕이 최하급소금만 나누어 준다는 소문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두 소금이 그렇게 굉장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고 또한 무료라는 점 때문에 그런 소문들은 곧 사라졌다.
때문에 이동영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 험한 산길을 걸으면서도 균을 타도할 생각만을 하고 있던 김진기에게는 아주 흥미가 가는 사실이었다. 김진기는 자신의 특기인 모략을 사용하여 소문을 그럴 듯하게 지어냈다. 그래서 화령군의 주둔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소문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지난번 함흥의 백성들이 여진족에게 학살당했다는 소리는 욱일승천하는 화령군의 기세를 조정의 헛소문이다. 사실은 함흥의 백성들이 조정에서 보내주는 하얀 소금을 먹고 광증이 생겨서 스스로 자해하거나 난동을 피우다가 죽은 것이다. 조정에서 보내준 하얀 소금은 너무 짜고 맛도 쓴 것으로 조금 맛보기만 해도 사람이 먹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은 평소부터 경원시해오던 우리 함경도의 백성들을 모두 죽이려는 조정의 흉계이다.'
화령군이 쓴 방법도 함경도의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전략이다. 언제나 조정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함경도민을 자극시키자는 것이었다. 물론 실제 소금을 먹어본 국경지역의 북방군과 그의 가족들은 헛소문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나머지 지역에서는 천일염의 쓰고 짠 맛에 소문을 믿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이동영과 김진기가 지휘하는 화령군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군하여 함흥의 여진족과 연계를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화령군은 어느 정도 민심이 안정되어간다고 생각하자 다시 군대를 움직여 12월 1일에는 다시 이성현을 함락시켰고 다음 날인 2일에는 이성현을 떠나 함경남도 병영이 있는 북청을 행해서 진격했다.
이때 화령군의 병력은 이동영의 본대만 1만 3천명이고 지휘하는 잔류군이 3천여 명이었다. 반면 북청에 주둔한 조선군도 대략 2천 명이나 되어 성을 지키면서 싸우면 화령군의 진격을 어느 정도는 저지할 만한 병력이었다.
안변에서 함흥까지의 거리는 대략 300여리가 조금 안된다. 그래서 균이 지휘하는 토벌군이 함흥에서 서쪽 30리 지점에 위치한 한당고성에 도착한 것은 약 4일 후인 12월 2일 저녁나절의 일이었다. 그나마 길이 평지였고 부대 내에 말고 수레가 많아서 빠르게 도착한 편이었다.
균이 이끌고 온 토벌군 1만 3천명은 다섯 개 부대로 재편되어 있었다. 원래 토벌군소속 병사들은 대부분 부사관 이상의 하급지휘관이 되는 사람들이었고 때문에 일부 기병과 총병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보병이었지만 이번의 상대인 화령군과 여진족은 보병만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 강했다.
그래서 균은 일반 병사들중 말을 잘 타는 군사 2천 명을 기병으로 임시 편성했고 이런 식으로 궁병, 포병, 총병을 선발해 재편했다. 덕분에 1, 2사단은 기병, 3사단은 궁병, 5사단은 포병, 6사단은 보병, 수도여단은 총병으로 재편되었다. 참고로 각 사단은 비완편부대이기 때문에 규모가 2천명에 불과했고 수도여단은 완편부대이기 때문에 규모가 3천에 달했다.
한편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조흥수가 지휘하는 화령군으로 위장하고 있는 여진족은 기병만 1만 2천에 달했고 그 전력도 거의 감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탈로 인해서 사기가 오른 상황이었고 함흥을 지키던 조선군의 미약한 저항으로 인해서 남쪽으로 갈수록 조선군은 약하다는 이동영의 말을 실감했기에 싸우겠다는 투지가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조흥수가 제대로 여진족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서로 원수지간이 세 부족이 따로 놀고 있었다. 현재는 아군이라서 조용히 지내는 듯하지만 재물과 식량, 여자를 두고 칼부림을 하는 경우도 자주 일어났다. 때문에 여진족은 세 무리로 완전히 갈라졌고 쥬셔리부가 5천명, 너연부가 4천명, 야류장부가 3천명의 병력을 각각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12월 2일 현재 함흥에서 북청까지의 병력은 다음과 같이 배치되었다. 가장 서쪽에 있는 균이 지휘하는 토벌군 1만 3천, 함흥의 여진족 기병 1만 2천명, 북청의 수비군 2천명, 그리고 가장 동쪽에 있는 이동영이 지휘하는 화령군 1만 3천명이었다. 따라서 양군의 목표는 눈앞의 적을 격파하고 포위된 아군과 합세하여 적의 본군과 대결하는 것으로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병력이 1만이나 적은 토벌군의 열세가 두드러졌다. 거기다 1만 2천에 달하는 여진족은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더욱이 토벌군과 여진족이 싸울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은 기병에게 유리한 평야지역이라서 토벌군 내에서도 걱정하는 이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