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228)

조선왕조실록-선조

무진삼란(삼려의 난).

"간밤에 조선군이 성밖에 진을 쳤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돈고호리님. 그동안 소문에 토벌군이 빨리 출정했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지금 서쪽에 위치한 버려진 고성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정확한 적 병력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많아도 2만은 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럼 조선토벌군중 기병은 얼마나 되나?"

"예. 아패란님.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중앙군의 편제상 대략 2천여 명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보병들이야 볼 것도 없고 약해빠진 조선기병 2천이라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 정도라면 우리들과 부딪치면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을……."

화령군이 가진 정보는 송민진이 무너지기 이전의 자료였다. 그래서 조흥수가 알고 있던 정보 역시 한계가 있었고 최근 중앙군이 재편이 됐다가는 것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영된 자료가 있다고 한들 여진족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 감히 야전에서 여진족 기병을 당할 자가 어디 있겠느냐는 자신감에 차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군은 지방군과는 다릅니다. 최소한 북방군에 필적하는 조선의 정예부대입니다. 거기다 신무기까지 가지고 있어서 결코 우습게보아서는 안 되는 적입니다."

"그래봐야 얼마 안 되는 보병이 주력이오. 평야에서 기병, 특히 우리 여진의 기병을 당할 군대는 없소."

조흥수는 여진족 장수들이 토벌군을 깔보는 듯하자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넒은 만주평원에서 사는 기마민족인 여진족에게 있어 보병은 성을 지키는 데만 쓸모 있는 존재였고 전투의 주력은 당연히 기병이었다. 거기다 함흥성 서쪽은 성진강이 만들어내 기름진 충적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어 보기에는 기병에게 무척 유리한 지형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기병이라서 공성전에는 맞지 않소."

"그야 당연한 소리. 거기다 우리 여진족의 장기는 야전인데 그런 이점을 포기할 수도 없지요."

"그러면 당장 병력을 이끌고 나가서 적을 격파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소리오. 눈앞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있는데 어찌 마음 편히 쉴 수 있겠소? 당장 나가서 싸웁시다."

"좋소!"

여진족의 장수들은 조흥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그를 배제한 체 자신들끼리 의논을 하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되서 바로 출정을 결의했다. 원래부터 성질이 급한 여진족 장수들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조흥수는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자신이 여진족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냥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조선왕 만나기가 황제폐하를 뵙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다."

"저희들도 그렇습니다. 도련님. 가뜩이나 험한 길을 따라서 천리 길을 왔는데 또 천리나 되는 험한 길을 가야지 볼 수 있다니, 도련님께서 많이 힘드실 듯합니다."

"어쩔 수 있겠나? 다 아버님의 명이니 따를 수밖에……. 그런데 조선에 벌써 반란이 2번이나 일어났다며? 그렇다면 조선왕이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말인데 그런 자와 손을 잡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대인께서는 뛰어나신 분이지만 이번만큼은 문제가 있다고 보입니다."

함흥의 바로 아래쪽의 고을인 정평을 지나가던 이여송 일행은 한참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서 길을 재촉했다. 원래 그들은 균을 만나러 한성부로 갔다가 균이 함경도로 친정을 떠나는 바람에 다시 천리에 가까운 먼 길을 따라와야 했다. 하지만 이제 곧 조선왕을 만나서 일을 끝낼 것을 생각하니 그렇게 어두운 얼굴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도련님."

"왜 그러나?"

"조선왕이 있는 곳은 반란군과 대치하는 전장입니다.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조금 기다렸다가 만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번 전투에서 조선왕이 패하면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데 전투이전에 조선왕에게 밀서를 전하는 것은 나중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번 기회가 조선군의 전력을 가능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나? 아버님은 비록 아무 말씀도 안하셨지만 우리의 바로 남쪽에 있는 조선의 정보를 조사해가면 여러모로 득이 될 것이야. 거기다 최근에 조선이 저렇게 큰 전투를 치른 적이 없으니 다시 없는 좋은 기회일세."

젊은 이여송의 말을 들은 늙은 하인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고는 마음에 든다는 듯 말했다.

"하하하! 역시 큰 도련님이십니다. 원래 사신의 목적은 상대방과 대화를 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허실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거기다 사실은 대인께서 제게 조선의 상황을 자세히 염탐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런가? 과연 아버님다우시군. 그럼 빨리 가보세."

"예. 도련님."

'아버님의 성격상 내가 큰 아들이라고 해도 완전히 믿으실 분은 아니야. 아마도 이번 밀행은 아버님이 나를 시험해보려는 생각이셨겠지. 하지만 나도 아버님의 핏줄을 이은 자식이니 그렇게 어수룩하지는 않아.'

요동의 제왕이라 불리던 이성량은 무척 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여진족들을 이간질시켜 수십 년간 잘 통제해온 인물이다. 이성량은 의심이 무척 많았고 자식인 이여송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생을 하면서도 조선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멀리 함흥까지 따라왔다. 균으로써는 본의 아니게 관전무관(전쟁을 구경하는 타국의 무관)을 하나 둔 셈이었다.

북청의 근처에 도착한 이동영은 기다리고 있던 조선군 기병에게 책 한 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만든 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한 조선왕실족보의 족보였고 이동영의 조상인 이원계의 이름이 선명하게 올라가 있었다. 자신의 조상의 이름이 올라간 왕실의 족보를 본 이동영은 무척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막사에서 다시 한번 책을 보고 또 보고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책장에 숨어있던 종이 하나가 떨어져 다리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균이 이동영에게 보내는 아주 짧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모든 것을 다 용서할 마음이 있었다. 비록 왕실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태종대왕께서 방계왕족들에게 심하게 대하신 것은 사실이었고 나도 방계의 왕족으로 왕위에 올라 그대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히 새로운 왕실족보를 만들어 그대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조선왕실은 전쟁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위해서 천명을 받아 고려를 무너트리고 일어났다. 그런 왕실에 외세를 끌어들여 백성들을 학살한 자가 있다면 태조대왕을 비롯하여 역대 제왕들이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거기다 만 백성들의 아버지인 내가 내 자식들을 죽인 자를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사약 먹고 편히 죽을 생각 따위는 하지 말고 목 깨끗이 씻고 기다려라.'

원래 사약을 내리는 것은 그래도 죽은 자의 명예를 지켜주는 행동이다. 반역에 관련되거나 강상죄(반인륜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유교국가 조선에서 신체를 훼손하는 것은 그가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잘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균이 이를 갈면서 쓴 편지를 읽은 이동영은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12월 3일. 아침부터 한단고성의 조선군 진형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전투준비가 아니라 병사들에게 아침을 주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것 역시 곧 있을 전투를 대비한 행동이었다. 병사들에게 아침을 배불리 먹인 조선군은 함흥성의 서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 선전관."

"예. 전하. 하교하시옵소서."

"이번 전투의 승패를 어찌 보는가? 무조건 과인이 옳다고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라."

"……소신이 보기로는 어렵사옵니다."

"왜? 적의 기병이 너무 많아서?"

말을 타고 행군을 하던 균은 옆에 있던 이순신을 불러서 갑자기 이번 전투의 승패를 물었다. 이순신은 일개 하급무관인 자신

에게 자꾸 물어보는 균이 이상했지만 곧 죽어도 말하고 죽는 성품을 가진 그였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천천히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소신이 무과를 준비하면서 기병의 효용성에 대해서 읽은 구절이 있사온데 금나라 기병 10여기에게 송나라 보병

 2천명이 무참히 깨진 적이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물론 송나라 군대와 전하의 군대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진족은 기병의

 장점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 승리를 장담할 수 없사옵니다."

"물론 기병이 보병보다 강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옛 신라는 보병과 궁병 3만으로 20만 당나라 기병을 격파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지형이 신라군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각 지형에는 거기에 적합한 병종이 있는데 그 때의 경우에도 당나라 기병의

 기동을 좌우의 산에 방해하여 당나라 기병이 전면돌격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신라군이 공격을 해 승리를 거둔 것

이옵니다. 만일 지형이 좋아서 당나라 기병이 우회기동을 할 수 있다면 신라군이 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이곳의 지형도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느냐?"

"……."

평지에서 자신들이 유리하다는 말에 당사자인 이순신은 물론이고 곽재우 등 다른 호위병들도 잠시 비틀거렸다. 특히 곽재우의 경우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균을 바라보기도 했다. 물론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균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에게 머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호위대장인 임꺽정만 균과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갈 길을 재촉하는 처지였다.

조선군이 행군하고 있는 함흥성의 서쪽은 상당한 크기의 평야지대로 성진강과 광포강이 서로 같이 얽혀 흐르는 비옥한 평야지대였다. 그래서 남북으로 길쭉한 직사각형의 평야를 이루고 있었고 동쪽과 서쪽, 북쪽은 강이 남쪽은 바다가 막고 있는 고립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패한 쪽은 도망도 못치고 몰사당할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다.

'이곳은 기병에게 유리한 평야지대이고 도망가기도 힘든 지형이다. 따라서 양군은 사생결단의 자세로 전투를 치러야 하는데 아무리 아군의 전력을 높게 평가해도 여진족에 비하면 열세다. 가딱하다가는 여기서 아군이 완전히 괴멸당할 수도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균의 말에 질겁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균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역시 연륜이 부족하니 천하의 이순신이라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군. 뭐, 전투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장수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별로 상관은 없겠지.'

"선전관은 언제 적군이 나올지 모르니 행군을 재촉하라고 앞쪽에 전하라. 그리고 호위부대장은 망원경을 꺼내서 함흥성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라."

"예. 전하."

'함흥성이 함락되지 않았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인데 좀 아쉽군.'

두 사람에게 명을 내려 주변에서 떠나게 한 균은 아직도 잘 보이지 않은 함흥성 방면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아침 늦게 한단고성을 출발한 조선군은 얼마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 멀리 함흥성과 그 앞을 흐르는 성천강이 보이는 곳이었는데 거기에 도착하기 무섭게 병사들은 전투준비를 갖추느라 부산했다. 특히 후방의 포병대의 경우에는 대포가 발사될 땅을 단단히 다지는 했기에 중노동을 해야 했다.

곧 조선군의 전투 준비는 끝났다. 먼저 최전방에는 장창을 든 보병이 그 뒤에는 소총을 든 총병이 그 뒤에는 활을 든 궁병이 포진했고 또 그 뒤로는 포병과 지휘부가 위치했다. 마지막으로 기병은 본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다. 일단의 포진이 끝나자 병사들에게 잠시 휴식이 주워졌다.

이윽고 함흥성의 문이 열리고 거기서 기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들은 것은 1만 2천이라는데 병사들이 보기에는 족

히 2만은 넘어가는 듯한 대병력이었다. 하지만 병력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성천강을 가로지르는 만세교를 넘는데 여

진족은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해는 어느새 중천에 가까워졌다.

"저놈들 정말 많기는 많네. 정오가 되도 다 포진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너무 많은 것 아니야? 아군의 2배는 되어 보이는데?"

조선군의 병사들은 휴식을 취하면서 잡담을 나누었다. 지난번 온양전투는 전투라고 부르기도 힘들었기에 사실상 이번이 그들에게는

 첫 번째 전투인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병사들은 은근히 많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여진족은 성천강을 넘어

 조선군의 앞쪽 5리(2km)지점에 포진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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