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무진삼란(삼려의 난).
"여진족 중앙대열이 무너져 내리다니 포병도 정말 무서운 존재구나."
"저러다가 포병만으로 여진족을 격파하는 것 아니야?"
"와~! 화끈한데, 나도 포병이나 지원해볼까."
벌써 천여 발에 이르는 포탄이 떨어져 한편의 지옥도가 연출되고 있는 여진족의 진형에서 조선군의 최전방진지는 2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다. 그래서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포탄이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폭음과 비산하는 먼지, 사람의 비명소리, 말
울음소리는 그쪽의 상황이 어떤지를 어린 아이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에 몰려오는 졸음과 싸우고 있었던 조선군 병사들은 이제는 눈앞의 구경거리에 정신이 팔려 졸
음 따위는 멀리 쫓아버린 채 적군이 당하는 모습을 감상했다. 물론 그들의 말만 들어는 무척 용감한 병사들로 느껴지겠지
만 사실은 저 포격 뒤에 있을 여진족의 돌격에 긴장해서 일부러 저런 말들로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것이었다.
"멍청한 여진족들. 우리가 화포를 야전에 끌고 나올지는 몰랐을 모양이지?"
"아니지. 우리가 함흥성을 탈환하기 위해 진격해온 것이니 공성전용으로 화포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는 예상했겠지. 하지만 야전용
화포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그 사거리도 개량됐다는 것을 몰라서 무시하고 있었을꺼야."
"하긴 현자총통의 사거리는 원래 800보(1km)였으니 5리(2km)나 떨어져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했겠지."
조선 중기의 화포류는 그 사거리가 대략 1천보 내외이다. 보통은 황자총통의 사거리가 약 1100보로 가장 길지만 현재 중앙군이 보유한 현자총통과 황자총통은 각각 2000보와 1900보의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다. 당연히 충분한 안전거리를 확보했다고 생각하던 여진족이 혀를 찔려 당황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훈련도 잘 안된 얼치기 포병대를 가지고 초탄부터 명중을 시키다니 변 위장도 화포를 다루는 데는 제법 능력이 있군."
"예. 전하. 덕분에 여진족이 많이 당황한 듯 하옵니다."
"곧 여진족이 아군의 정면으로 돌격해 올 것이다. 포병대는 포신이 휘어질 때까지 포격을 계속하고 본진의 병력들에게는 적의
돌격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라. 그리고 후방의 기마대는 천천히 전진시켜 본진의 좌, 우로 배치하라."
"예. 전하."
'그게 무슨 소리야? 여진족이 정면에 돌격해 온다니?'
균이 곽재우에게 내리던 명령을 옆에서 듣고 있던 선전관 이순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병의 장점은 빠른 기동력이다.
기병은 그 장점을 이용하여 보병을 상대할 때 방어력이 강한 정면보다는 방어력이 약한 측면이나 후방을 노리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물론 아군 기병을 전진시키는 것으로 보아 여진족의 우회를 그들로 막겠다는 생각은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좌우로 나누어진 아군 기병은 각각 2천명으로 여진족의 기병을 막기에는 너무 부족한 전력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면방어에 치중하는 것은 이순신의 생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물론 여진족의 장수들이 엄청난 돌대가리거나 아니면 미쳐서 정면 돌격만 고집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포진하다가는 배
후를 찔려서 전군이 무너진다. 전하께서 이점을 간과하시는 듯하니 내가 진언을 올려야 겠구나.'
"전하. 소신 선전관 이순신이 한 말씀 올리고자 하옵니다."
"말해보라."
"본시 싸우는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싸움에 임하는 병사들의 마음가짐이옵니다. 그래서 옛날의 전쟁을 살펴보면 적을 정면에서 공격하기보다는 측면이나 후방에서 공격하여 적군의 공포감을 유발하는 전술을 많이 사용했사옵니다. 그러 하온데 지금 전하께오서 취하신 진형은 전방의 적에게는 강하지만 그런 측후방의 공격에 매우 취약한 진형이옵니다."
"전하! 여진족이 움직이기 시작했사옵니다! 아군의 정면을 노리려는 듯 중앙에 돌격대형을 형성하고 있사옵니다!"
"……."
균에게 측면이 부실하다고 진언을 하고 있던 이순신은 실제로 여진족이 정면 돌파를 노리고 있다는 소리에 말문이 탁하고 막혔다.
그리고 실제로 여진족의 주력부대가 중앙에 전투대형을 빠르게 갖추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신은 당혹스러웠다.
'정…정녕. 여진족의 장수들은 바보라는 말인가?'
"저들이 바보라서 아군의 정면으로 돌격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들끼리 못 믿어서 그런 것이지."
"전하."
그런 이순신에게 말을 건낸 사람은 균이었다. 균은 조선군의 포격에 희생자를 내면서도 돌격대형을 취하고 있는 여진족들을 바라
보면 이순신은 물론이고 곽재우 등 다른 장수들도 모두 들어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반란에 참가한 장백여진은 쥬셔리, 너연, 야류장. 이렇게 3개의 부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그 부라는 것도 여러 개
의 부족으로 다시 나누어지지. 저기 있는 여진족들의 출신 부족만 10여 개는 넘으며 그들의 부족은 지난 4백여 년간 대
대로 싸움을 해왔다. 그런 자들이 갑작스럽게 같은 아군이 되었다고 해서 서로 신뢰하겠느냐?"
"아니옵니다. 전하. 소신의 생각이 짧아 주상전하께 잘못된 진언을 올렸사옵니다."
이순신은 눈앞 에 있는 소년, 물론 덩치로 보아서는 거의 청년인 균이 전략적으로 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다
. 균의 말대로 여진족의 각 부족은 서로 믿지 못하고 언제나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어느 정도 협
력했지만 더 이상 이익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자신들끼리 피를 볼 자들이었다.
"아군끼리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연합군이란 아무리 강해도 오합지졸이다. 거기다 여진족들의 수는 거의 균등하여 어느 한 부족
의 세력이 특별히 강하지 않기 때문에 저들의 작전은 각 부족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그래서 아주 평범한 작전이 아
니고는 안 된다."
"전하. 신들도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옵니다. 하오나 꼭 저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사옵니
까? 그에 대한 대비를 하셔야 하옵니다."
"글쎄, 너무 괴롭히는 것도 사람이 할 도리는 아니지. 흐흐흐."
"……."
균은 만화에 나오는 악당의 대장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을 본 장수들은 분명히 균의 흉계가 여진족에게까지 닿아있음을 확인
하고 마음을 놓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들의 앞날이 왠지 고통스러울 것 같다는 걱정이 생겼다.
시간을 약간 돌려서 포격이 시작되기 직전 여진족의 세 장수 돈고호리, 아패란, 타오가치는 후방의 막사 하나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조선군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작전을 짜는 것이었는데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모두들 우익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우익은 용맹한 우리 쥬셔리부가 맡을 것이니 나머지 2개부가 연합하여 중앙을 맡는 것이 좋겠소."
"아니오. 쥬셔리부는 그 수가 많으니 중군을 맡고 우리 너언부가 우익을 야류장부가 좌익을 맡아서 공격을 하는 것이 더 낫소."
"무슨 그런 말씀을, 우리 야류장부는 장백여진의 삼부 중에서도 가장 조선과 국경선이 길어서 조선군과 싸운 경험이 풍부하오. 그런 정예부대를 그냥 묶어둘 셈이오?"
이들이 작전회의를 시작한 것은 벌써 두 시간째의 일이었다. 처음에 작전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세 개의 부족이 각각 조선군의 정면과 좌, 우측으로 치고 들어가서 단시간 내에 끝낸다는 단순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작전을 채택하는 데는 단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우익을 맡기 위해서 세 사람은 대단한 신경전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그 속내를 살펴보면 상당히 복잡하다. 얼마 전 명나라가 조선국경을 향해 자칭 10만 대군을 출정시켰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자칭 10만 대군 일뿐 실 병력은 오만에 불과했다. 이에 명나라조정은 명나라의 영향력이 강한 건주여진의 여진족들에게 동원령을 내려고 1만이 넘는 여진족들이 명나라의 군대로 동원되었다.
평소에 장백여진은 건주여진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본거지를 지키고 만만한 조선을 노략질 하는 정도에서 대규모 군사행동을 자제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그 압력이 해소되었다. 그래서 사이가 좋지 않던 세 부족은 이번 기회를 틈타서 상대를 꺾고 장백여진을 통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장백여진의 대부족장들은 화령군에게 파견한 지원군에 이런 사실을 알리고 최대한 기회를 보아서 본거지로 회군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나중에 결전을 대비하여 다른 부족들의 군대에 타격을 입히라는 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세 부족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였기에 서로 견제가 되는 처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직접적인 행동을 자제하고 속으로만 상대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조선의 중앙군이 원정을 해왔다. 그리고 조선군이 설정한 전장은 강과 바다로 고립된 함흥평야였다. 이에 세 장수들은 동시에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해냈다. 다른 부족은 고립된 전장에서 조선군과 싸우게 해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들은 유유히 본거지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렇게 여진족들이 서로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이들에게 손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조선의 대마왕 균이었다. 여진족들이 침공할 때는 화령군의 도움을 받아서 아무 저항 없이 진격했다. 덕분에 후방의 여러 성들이 별 저항도 못하고 기습적으로 함락당한 것이다. 하지만 여진족이 본거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조선 북방군의 방어선을 뚫어야 한다.
이에 균은 이동영에게 책을 보낼 때 여진족의 세 장수에게 각각 밀서를 보내서 '너희 부족은 원래는 우리 조선의 신하로써 말 잘 들었으니 이번 함흥에서 있었던 일도 진심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는 용서하고 그냥 돌려보내주마.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가만히 안 둘 것이다.' 라고 거짓약속을 했다.
일이 이쯤 되자 세 장수들은 생각했다. 물론 균의 약속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군의 전력으로는 자신들을 모두 상대하기는 힘들 테니 썩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부족과 조선군이 싸우게 하고 자신들은 돌아가면 어떻게 되든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고 모두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세 장수들은 전장인 함흥평야가 고립된 지형이라서 패하면 피해가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앞장서서 군대를 모두 출동시켜 어떻게든 다른 부족들을 조선군과 싸우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연히 균의 본군과 싸우면 그런 약속이 깨어지기에 빠져나갈 구멍도 필요했는데 그 해결책이 바로 우익공격부대였다.
마침 우익부대가 있는 곳에 다리가 2개나 있어서 멀리 우회한다는 핑계를 대고 전장에서 이탈하기가 용의했다. 그래서 그렇게 긴 시간동안 세 장수들은 자신의 군대가 우익부대가 되겠다고 서로 말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조선군이나 여진족이나 다 졸아버리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조선군이 선공을 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씨우우웅~! 쿵! 씨우우우웅~!! 쿠웅!!"
"으아악~! 살려줘!"
"히히잉~! 히히잉~!"
그렇게 서로 우익을 맡으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그들의 귀에도 조선군의 포탄이 낙하하는 소리와 병사들의 비명소리
그리고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굳었다가 피해상황을 조사해 보고는 쥬셔리부의 돈고호리의 표정
만 굳었다. 조선군의 포격이 중앙에 위치한 쥬셔리부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쳐 줄일 놈. 감히 나를 속이다니!"
"돈고호리. 그게 무슨 소리요?"
"……아무 것도 아니오. 그보다는 적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니 어서 군대를 움직입니다."
"하지만 아직 누가 어디로 공격할 것인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아패란! 당시는 지금 죽는 병사들이 자신의 부하들이 아니라서 여유를 부리는 것이오? 이렇게 된 이상 전 병력으로 조선군을 향해 정면돌격합시다. 그러면 더 이상 우익부대를 누가 맡을지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아도 되지 않소!"
"아니 그게……."
조선왕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이 든 돈고호리는 그 사실을 발설하려다가 참았다. 아무리 야만적이라고 평가되는 여진족이라도 명분은 어느 정도 필요했다. 그런데 자신이 조선왕과 손을 잡고 있었다는 말을 하다가는 나중에라도 다른 두 부족의 협공을 받을 충분한 명분이 되기에 화를 참아 넘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군대만 공격받은 것으로 보아 다른 장수들이야 말로 조선왕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왕 조선군과 싸울 것 다른 부족들도 끌어 들이려고 정면돌격을 주장한 것이다. 예상 밖의 전개에 두 장수는 얼굴빛이 나빠졌다. 이래서는 꼼짝없이 싸워야 할 판국이었다,
"타오가치, 정면공격을 싫어하는 무슨 이유라도 있는게요?"
"……아니오. 그렇게 합시다."
균이 말한 연합세력의 단점이 잘 들어난 모습들이었다. 서로 믿지도 못하는데다가 세 부족의 세력균형이 너무 잘 맞는 바람에 어느 한 부족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싸우기 싫어하는 두 장수 아패란과 타오가치도 돈고호리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 기회를 보아서 조선군에 붙거나 아니면 전장을 이탈해야 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군과 싸우는 것은 너희 두 놈이면 충분하니 우리 병사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싸우지 말라고 해야겠다.'
'이왕 조선군과 싸워 세력이 약화될 것이라면 다른 부족들도 우리 부족만큼 세력이 약해져야 한다. 그러니 두 부족의 피해가 크도록 유도해야겠다.'
이로써 조선군과 싸울 의사가 거의 없는 7천의 여진족과 조선군과의 싸움에 소극적으로 임하려는 4천의 여진족 연합군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조선군의 방어진을 향해 돌격대형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의 적군인 조선군을 향해 등 뒤의 믿을 수 없는 아군을 경계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