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228)

조선왕조실록-선조

무진삼란(삼려의 난).

같은 여진족이고 서로 이웃한 부족이다 보니 너연군이나 야류장군은 서로가 서로의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지형 역시 평탄한 평야지대였고 조선군의 추격을 받고 있었기에 시간도 부족했다. 그래서 두 군대는 아무런 작전 따위는 없이 병사 개개인의 기량을 겨루는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기병은 의외로 약점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난전이다. 난전이 벌어지면 기병의 장점인 기동력이 사라져 기병은 손쉬운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아패란과 타오가치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퇴각로가 눈앞의 만세교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병사들은 살기위해서 난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말 난장판이군."

어느새 조선군도 만세교 근처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물론 발이 빠른 기병와 일부 부대만 도착하고 정작 중요한 포병과 

주력부대는 아직도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기에 조선군들은 멀리서 여진족들의 싸움을 구경만 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새 시간이 많이 지나 해가 저물고 있었다.

덕분에 조선군의 전군이 집결했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에 걸쳐 있는 저녁 무렵이었다. 그리고 여진족들은 자기들끼리 싸워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조선군의 계획도 여진족을 한쪽으로 몰아넣은 후 작은 살길을 열어주어 자중지란을 일으킨다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싸움은 지나칠 정도였다.

"……화차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지당하신 분부이시옵니다. 전하."

균도 신기전을 발사할 화차를 준비하기는 했다. 워낙 공격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야간에 전투를 치를 가능성이 높았는데 이때 화차를 사용하면 아군과 적군에게 주는 심리적인 효과가 크다. 특히 도망갈 곳이 한정된 여진족들에게 화차의 일제공격이 있다면 백이면 백, 공포에 질려서 서로 도망가려고 대혼란이 생길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털가죽 옷을 핏빛으로 물들인 채 사투를 벌이고 있는 여진족들을 보고는 그 누구도 화차를 쓰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만세교 근처에는 여진족들과 말들의 시체가 널려있었고 여진족들은 원수라도 만난 듯 상대와 끝까지 싸웠다. 얼마나 열심히 싸우는지 조선군들이 끼어들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래도 같은 여진족끼리인데 저렇게 치열하게 싸우다니……."

"자기들끼리 싸우니 우리가 오히려 구경꾼 같잖아."

조선군 병사들은 여진족들의 전투를 구경하면서 같은 민족끼리 너무 심하게 싸운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장수들도 다르지 않아서 균이 있는 지휘부에서도 소곤소곤 그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들은 균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여기 있는 제장들 중에서 북방전선에 근무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송구하오나 없사옵니다."

"그럼 서해평을 침공해서 점거하고 있는 여진족이 무슨 이유로 침공을 해온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말해보라. 

내가 상을 내리겠다."

"여진족들은 오랑캐들이니 당연히 우리 조선을 약탈할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쳐들어온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소신이 알기로는 내부 쟁탈전에서 밀려온 자들이라고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 있는 장수들은 모두 경험이 적은 장수들이라서 여진족에 대해서 잘 아는 자들이 없었다. 하지만 누구 옆에서 고생해가며 많은 

것을 주워들은 자는 있었다. 바로 곽재우였다. 균은 정답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자세히 말해보라는 의미의 눈길을

 주었다. 곽재우는 균의 눈길을 받고는 머리를 짜내서 열심히 답했다. 아니면 공부가 부족하다고 균이 괴롭힐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흔히 여진족이라고 통칭하는 집단은 크게 건주여진, 장백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 나누어지고 건주여진은 5개, 장백여진은 3개, 해서여진은 4개, 야인여진은 3개의 대부족으로 이루어지옵니다. 하지만 15개의 대부족 역시 완전한 통합체는 아니고 다시 여러 개의 소부족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이옵니다.

따라서 여진족은 몇 백 개에 달하는 부족들을 통칭하는 말에 불과하옵니다. 이들은 일찍이 금나라를 세워 고려를 압박하고 중원을 넘본 적도 있었지만 금나라가 원나라에게 망한 후 만주에 다시 돌아와서 살면서 수백 년간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농사와 목축, 그리고 주변 부족을 약탈하면서 살아왔사옵니다.

그래서 강한 부족은 약한 부족들을 약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약한 부족들은 자기보다 더 약한 부족들을 약탈하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부족들은 농사도 잘 되고 산이 있어서 방어하기도 쉬운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거기서도 밀릴 정도로 약한 부족은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 조선으로 내려옵니다. 서해평의 여진족들도 그런 부류들로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여진족의 분열과 대립은 비단 여진족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다. 명나라가 의도적으로 그런 분란을 조정하고 있다는 문제도 있었다. 특히 현 요동총병관 이성량의 경우는 그런 것에 능한 인물로 좀 강한 부족이 나타나기만 하면 주변부족을 움직여 멸망시켰다. 청태조 누루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이성량의 계략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호위부대장의 말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약육강식이 판을 치는 곳이 여진족의 세계이라는 말이다. 그런 곳에서 어느 부족이

 대규모 전력을 상실했다면 주변에 있는 부족들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같은 여진족이니 위로하고 도움을 주겠는가? 아니면 잡아

먹을 좋은 기회라고 여기겠는가?"

"…후자이옵니다. 전하."

"그대들의 말대로 여진족은 호시탐탐 이웃부족을 제거하고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는 자들이다. 저기 피를 흘리며 싸우는 저들에게도 고향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을 것이고 약탈한 물자를 가지고 몸성히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그들의 소원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돌아갈 길은 없어졌고 자신들을 포위한 적들과 싸워야 한다.

그중 하나는 세력이 강하고 자신들의 가족들을 위협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적이고 다른 하나는 세력이 약하고 바로 옆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위협하는 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장들이 여진족 장수라면 어디와 싸우겠는가? 어느 쪽이 승산이 있고 자신의 가족과 부족의 미래를 위한 길인지는 뻔하지 않는가?"

"……."

균의 질문에 장수들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너연군의 장수라고 해도 본거지에 남아있는 가족들과 부족을 위해서 최대한 경쟁부족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세가 등등해진 균은 장수들을 따끔하게 질책했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고 손자병법은 무관이라면 필수적으로 읽게 되는 병서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적인 여진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적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우리 장수들은 무경칠서를 외울 줄만 알지 그것을 활용할지는 모르니 정말 큰일이로다."

"……."

무경칠서는 손자, 오자, 사마법, 위료자, 삼략, 육도, 이위공문대 이렇게 7개의 병서를 말하는 것으로 원래 중국의 병서이다. 조선은 국초에 무경칠서를 도입하여 무과시험에는 이것을 외우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실전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 이유는 무경칠서가 전술과 동시에 전략을 담고 있는 서적이었기 때문이다.

균이 자주 내세우는 '싸우지 않고 이긴다.' 라는 사상도 여기서 나온 것으로 조선의 국가전략을 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균 정도가 아니고는 무경칠서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수로써 적에 대한 착각에 빠져있는 것은 큰 문제였다. 그래서 균은 인상을 찌푸리며 여진족들의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조선군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저녁이 깊어지자 여진족들의 싸움은 어느 정도 승부가 났다. 당연히 수적으로 우세한 너연부의 승리였다. 처음에 3천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던 야류장군은 강 건너편으로 약 500명의 병사를 도하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머지 2500명과 타오가치는 너연군을 막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너연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어 3500명이던 병사가 2000명으로 급감했고 그나마 대부분의 병사들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하지만 너연군이 정신을 차릴 여유도 없이 조선군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다. 조선군의 공격은 화차를 이용한 중신기전 발사로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 신기전은 그렇게 뛰어난 병기가 아니다. 여러 가지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명중률이 한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기전은 주로 대기병전투나 야간전투에 많이 쓰였는데 이것은 신기전이 발사되면서 내는 소리와 불꽃이 적군을 놀라게 하기 때문이었다.

중신기전을 발사하는 화차는 발사구가 100개 정도 있다. 여기에 중신기전을 장전하고 신기전의 도화선을 한곳으로 연결하면 발사준비가 끝나는데 말이 쉽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발사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화차는 몇 차례에 걸쳐서 신기전을 발사한다.

"쉭~! 쉭쉭~!! 쉬쉬쉭~!!! 쉭~!"

도화선에 불을 붙이자 화차는 백 개의 신기전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발사했다. 화차는 단번에 신기전을 다 발사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신기전끼리 부딪쳐 떨어지는 경우가 많고 또 시간을 길게 두고 발사를 해야지 적에게 보여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신기전은 실전용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우와아아~!!!"

밤하늘을 수놓는 신기전들의 비행은 훌륭한 구경꺼리였다. 그런 신기전들이 수천 발에 달하면 불꽃놀이 못지않은 장면이 연출된다

. 그리고 그 장면은 조선군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여진족의 사기는 떨어트리는 효과를 불러왔다. 수많은 조선군의 불화살들

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발사되는 모습과 조선군들이 지르는 함성은 내분으로 지친 여진족들을 위압했다.

"이것으로 우리도 끝인가? 내가 조금만 욕심을 안 불렸다면 대부분의 병사들을 살려서 돌려보낼 수 있었을 텐데……."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신기전을 보면서 아패란은 눈물을 흘렸다. 용맹한 여진족의 전사로써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지만 자신의 판단착오로 죽어갈 자신의 부하들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흘려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의 생각대로 다른 부족을 조선군과 싸우게 만들어 너연부의 번영을 꾀하겠다는 욕심만 안 부렸어도 이런 일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패란은 차라리 항복을 해볼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자신들이 함흥에서 한 일에 이를 갈고 있는 조선군이 자신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싸우려고 했지만 이미 너연군은 싸울 능력이 없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아패란의 귀에 이제 막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진천뢰라고 하는 무기였지?"

"씨이이웅~! 쿠우웅~!!!"

조선군 포병이 발사한 비격진천뢰 수백 발이 고작 2천의 여진족이 몰려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조용히 

기다리던 아패란의 근처에 날아가 그의 상념을 끊어버렸다. 비격진천뢰 특유의 벼락 치는 소리가 늦은 저녁 함흥평야에 울려 

퍼졌다.

즉위 3년인 서기 1568년 12월 3일. 함흥일대에서 벌어진 조선의 반란토벌군과 장백여진의 연합군간의 전투는 이처럼 조선군의 승

리라기보다는 여진족의 자멸로 막을 내렸다. 전투 직전 여진족들은 여러 면에서 유리했지만 여진족은 자중지란이 일어나 그

런 장점을 살리지 못했다.

비록 여진족의 병력은 1천명이 적었지만 여진족은 전원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어 보병이 중심이 된 조선군에 비해서 기동력이

 월등히 좋았고 전력도 강했다. 기병 1명이 보병 8명에 필적한다는 송나라의 병서대로라면 여진족은 조선군 전력의 2배가 

넘는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진족들은 세 개의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이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거기다 세 부족은 정세의 변화로 인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함흥전투에 참가한 여진족 장수들은 조선군은 거의 무시한 채 전투가 끝난 후 장백여진의 세력판도

 변화에만 더 신경을 기울였다.

그 결과 여진족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연합군이 가진 단점을 고스란히 들어내면서 자신들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반

면 조선군은 포병과 총병 같은 여진족이 예상하지 못한 강력한 병종을 보유하고 있었고 여러 병종들이 하나의 지휘부 아래에

서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여진족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조선군은 참가병력 1만 3천명 중에 전사 224명, 부상 105명이라는 경미한 피해를 입은 반면 여진족은 참가병력 1만 2

천명 중에 전사자만 만여 명에 달했고 포로가 된 자도 천여 명이 넘었다. 제대로 달아난 병력은 야류장군 500명 정도였지만 

그마저 북방군에 발견되어 전멸당했다.

의외로 시시하게 끝난 함흥전투가 남긴 것은 제법 중요했다. 먼저 보병이 기병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제대로 

된 포병과 총병이 등장해서 전장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고 일부 조선군의 군기로 태극기가 등장하고 완승을 거두어

 반란을 조기에 종식시킨 점들이 주목을 받았다.

전투 종료직후 함흥성은 함락 13일 만에 조선군에 의해서 재탈환됐다. 성내에는 조흥수가 지휘하는 화령군이 일부 존재했지만 

성밖의 상황을 보고 백성들이 봉기하자 알아서 무장을 해체하고 성문을 열었다. 이에 조선군은 성문을 통해서 백성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당당히 입성했다.

함흥성에 입성한 균은 먼저 여진족이 빼앗아둔 물자를 다시 원주인들에게 돌려주는 한편 일꾼들을 동원해서 다리를 보수하고 근처의 

도로를 정비해서 함흥성을 반란토벌의 전진기지로 삼으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함흥에서 백성들을 위무하면서 기다리고 부하 

장군과 병사들을 북청으로 급파했다.

12월 5일. 1만 3천의 화령군에게 공격받고 있던 북청성의 조선군은 서쪽에서 출현한 대규모 병력에 크게 당황했다. 아무래도 

여진족이 아닌지 크게 걱정을 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1만에 가까운 대규모 지원병력이라는 것을 확인한 북청주둔군은 크게 환호성

을 올렸고 이에 여진족의 패전을 안 이동영은 군대를 회군시켰다.

이동영의 생각으로는 공성전이 아닌 야전이 자신의 장기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지만 화령군에 참가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화

령군이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앞 다투어 도망쳤다. 한때 수만에 달하던 이시애의 반란군도 그렇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6천으로 줄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이 급조된 반란군 한계였다.

그래서 이동영이 길주에 도착했을 때는 남은 병력이라고는 최초에 봉기했을때 가담했던 5천명에 불과했고 나중에 합세한 자

들은 모두 달아나거나 아니면 화령군의 정보를 토벌군에게 팔아서 목숨을 구걸했다. 그래서 이동영의 세력은 무척 초

라해졌고 한때 5개 고을에 떨치던 세력 역시 길주 1개 고을만 남아 있었다.

거기에 이동영이 믿고 있던 화령대군사 김진기 역시 자신이 제안한 병력확보방안 때문에 상황이 불리해진다고 생각하자다시 행

방을 감추었다. 이동영은 혼자서라도 길주를 거점으로 해서 토벌군에 대항할 생각이었지만 절대 움직일 수 없을 것으로 생

각했던 북방군중 일부가 토벌군과 대치하던 화령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12월 9일. 길주전투에서 대패한 화령군은 완전히 무너져 해체되고 이동영은 소수의 심복들만 거느리고 급히 만주로 달아났다. 

이렇게 즉위 3년인 무진년에 있었던 조선의 반란들은 세 번의 싸움으로 아주 빠르게 완전히 종결이 되었다. 하지만 반란의 주동자

인 김진기와 이동영을 체포하는데 실패해서 논란의 소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전하. 중앙군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고 하교하신 데로 처리는 했사옵니다만……. 나중에 일이 커지지는 않을지 소신은 염려

가 되옵니다."

"그렇게 염려할 것은 없다. 어차피 그들이 잡히던 잡히지 않던 다 조처가 되어 있지 않느냐?"

"하오나, 당장 반란의 휴유증을 수습하는데 있어서 많은 문제가 뒤따를 것이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 아니더냐?"

거의 보름동안 함흥에 머물면서 백성들을 위무하며 시간을 보낸 균은 12월 17일. 다시 한성부의 경복궁을 향해서 환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간에 정보부장인 박규남을 만난 균은 그의 보고에 만족을 표했다. 그리고는 내심 불안해하던 박규남에게 

한마디 언질을 해주었다.

"반란은 양날의 검이다. 하지만 그들 덕분에 한쪽 날이 완전히 나갔어. 그리고 나는 그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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