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즉위 4년.
한동안 균은 말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여운을 넘겨 심리적으로 이여송을 압박하는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하긴 이번 일이 생길
때까지 이여송과의 알현을 거부한 것부터가 그를 압박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상대가 손을 내민다고 해서 덥석 손을 잡을 정도로
균은 정치력이 부족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아무리 우리 조선의 상국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다. 하물며 조선에 반란을 유도하고
그 주동자를 은닉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작극을 통해서 위기를 탈출하려는 자들에게 고개를 숙일
만큼 우리 조선의 자존심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전하. 아직 우리 명나라가 조선의 내전을 유도하고 자작극을 벌였다는 정확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옵니다.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은 성급하신 결론이옵니다."
"글쎄 성급하다고 보기는 곤란할 듯하군. 이미 알만한 자들은 알겠지만 대학사 장거정과 과인은 친우이고 장거정의 정적은 대학사
고공이지. '장수를 잡기위해서는 먼저 말을 쏘라.'는 말처럼 고공이 장거정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주변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마침 그 주변인물중에서 가장 높은 신분은 바로 과인이고 그런 과인이 강력한 반역자들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고공이
반역자들과 손을 잡고 과인을 치려는 생각을 할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 그런 점을 자네 부친인 이성량도 잘 알고 있기에 큰
아들인 자네를 보내서 과인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
자신의 목적을 바로 간파당한 이여송은 순간 흠칫했다. 균의 말대로 이성량이 아들인 이여송을 파견해 균을 설득하려고 한 것부터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더욱이 장거정과 고공의 사이가 나쁜 것은 온 천하가 다 알고 명군의
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고공이라는 사실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균이 언급한 말과 추리는 균과 이성량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유추할 만한 것이었다.
덕분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던 이여송에게 균은 품에 있던 물건을 하나 꺼냈다. 칙사 유양호가 의주에서 복면괴인에게
받은 밀서와 똑같은 종이였다.
"반역자들을 토벌하면서 노획한 문서 중에 하나이다. 고공과 반역자들이 어떻게 연계하고 있는지 잘 나와 있지. 물론 명나라
조정에 보내봐야 조작이라고 매도당해 휴지조각이 될 문서이지만 한번 참고할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이여송은 밀서를 펼쳐서 천천히 읽었다. 거기에는 김진기의 반란군과 고공이 연계하여 명나라의 자칭 조선지원군이 사실은
반란지원군이라는 사실이 잘 들어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고공이 하고 있는 일들이 사실은 이 밀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것도
이여송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라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정도였다.
'조선왕이 이 정도까지 알고 있었다니, 역시 아버님 못지않은 인물이다. 이런 사실을 다 아는 이상 조선왕도 가만히 참고 있지
않을 것이고 더욱이 이번 일로 인해서 조정이 조선왕에게 책임을 물었다가는 전쟁이 발발할 것인데 이를 어찌한다.'
이여송의 표정에는 걱정스러움이 역력했다. 조선과 명나라의 전쟁은 요동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이성량 일가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였고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조선왕을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왕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과 같은 애송이가 설득하기에는 벅차 보이는 상대였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에 그는 용기를 내어 계속
설득했다.
"전하. 우리 명나라의 일부세력이 조선의 내전에 간섭하고 이번 일을 꾸민 듯하옵니다만 우리 명나라에는 대학사 장거정공 등
전하께 우호적인 세력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을 벌인다면 전하께도 결코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를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득이 되고 안 되고는 과인의 생각이 따로 있으니 더 이상 그대와 논할 필요가 없다."
"하오나 전하!"
"하지만 먼 요동 땅에서 이곳 한성부까지 먼 길을 달려온 것을 보아서 특별히 기회를 한 번 주겠다."
이렇게 말한 균은 다시 옆에 있던 주머니에서 화살을 하나 꺼냈다. 검붉은 피가 묻은 그 화살은 명나라 군대가 대량으로 보유한
석궁에서 쓰는 화살이었고 이여송도 그것이 명나라의 물건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압록강에서 죽은 명나라 병사들의 몸에 박혀있던 물건들이다. 이것과 명나라 군사들의 시신을 일부 넘겨줄 테니 그것들을
증거삼아서 조작된 국경분쟁의 진실을 밝히도록 하라."
"예?"
"자네도 알겠지만 이번 일과 우리 조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따라서 우리 측에서 조사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자네 부친인 이성량은 요동의 명군을 총 지휘하는 장군이고 뛰어난 정략을 가지고 있으며 양국의 전쟁을 바라지 않는 인물 중에
하나이니 이번 일의 진실을 알아내는 데는 적임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과인은 그에게 진상조사를 맡기고자 한다."
"……."
균이 이성량, 이여송 부자에게 준 기회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번에 발생한 국경분쟁의 진상을 조사하는
책임을 떠넘긴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책임을 떠맡으라는 말을 들은 이여송은 순간 놀림을 당한 것 같아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조선왕이 준 기회라는 것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야했다.
"과인은 지금까지 있었던 명나라의 행동에 불만이 많지만 또한 상국인 명나라와 분쟁을 반기지도 않는다. 정치란 변화무쌍한
것이라서 정확한 시간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과인은 최대한의 시간을 그대들에게 보장하기 위해서 최대한 참아보겠다. 그 대신
그대들은 그 시간을 이용하여 황제폐하께서 납득할만한 증거를 찾아내라. 내 말 뜻을 알겠는가?"
"저희를 믿고 저희의 뜻을 받아드려 주신 전하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사옵니다."
균의 말에 덕분에 이여송은 자기 아버지인 이성량이 내린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비록 국경분쟁의 진상조사를 담당하는 책임을
지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조선국왕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척 기뻐하던 그의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아버님께서 총병관으로 재임하시는 이상 조선과의 국경분쟁이 생기면 요동의 군사책임자로써 그 진상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게 되시니 조선왕의 조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선왕도 그 정도는 알 텐데 왜 그런 조건을 내걸고 우리의 제안을 수락했을까? 조선왕이 사람이 좋아서? 아니면 멍청해서?'
이여송은 자신의 제안을 들어주지 않을 듯이 밀어붙이다가 갑자기 아주 쉬워 보이는 조건을 제시하고 제안을 수락한 균을 보고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고 다시 속으로 천천히 균과의 대화내용을 생각해보았지만 도저히 문제점을 찾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요동의 광녕성으로 돌아간 이여송은 아버지 이성량을 만나서 임무완수를 보고하고 자신이 관전한 함흥전투와 자신들이 여행한 조선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아들의 보고를 받은 이성량은 때로는 인상을 찌푸리고 때로는 인상을 활짝 펴면서 제 아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이여송은 마지막으로 균과의 대화내용을 전했다.
"그러니까. 네 말의 요점은 조선왕이 처음에는 안 들어줄 것 같이 행동하다가 나중에는 아주 간단한 조건을 내걸고 우리의
제안을 수락해서 네가 당황했다는 것이냐?"
"예. 아버님. 조선왕이 예상보다 많은 사실을 알고 있어서 설득하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리의 제안을 수락
하는 바람에 소자가 너무 놀라서 조선왕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그 때의 일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 으음~!"
잠시 생각을 하던 이성량은 균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이성량이 자신의 아들이인 이여송을 조선에
파견한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크게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왕에게 자신의 진정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아들에게 경험을 쌓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래서 준비성이 철저한 이성량은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이여송이 조선왕과의 교섭에서 밀릴 것으로 예상하고 조선에게 제공할 이
권을 몇 개 준비해두었을 정도였는데 모두 필요 없어졌다. 그렇게 허를 찔린 이성량이었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결과가
좋은데다가 그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가 짠 계략에 걸려 자멸하는 멍청한 여진족들만 보다가 내 의도를 완전히 벗어난 자를 만나니 기분이 이상하군. 조선왕이
올해 18세의 젊은이라고 했지? 나이를 보아서는 실수로 우리의 제안을 받아준 것 같지만 여송이의 말을 들어보면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될 것 같고……. 아무튼 언제 한번 직접 만나보고 싶군.'
그렇게 생각한 이성량은 자신의 결론을 듣고 싶어 하는 이여송을 그냥 놔둔 채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선 이성량은 조선왕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명나라의 요동 총병관으로써 책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의 지휘소로 향했다. 그리고 압록강이 흐르는 남쪽을 향해 수천기의 명나라 군사들이 출동했다.
명나라의 수도 북경.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건축물인 자금성에서는 명나라 13대 황제인 융경제가 오랜만에 조회에 참가하여 여러 가지 보고를 받고 있었다. 황제인 융경제가 조회에 참석한 것은 참 오랜만의 일인데 그 이유는 융경제 자신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즉위 이전 유왕으로 있을 때부터 융경제는 국사를 돌보는 것보다는 말 타는 것을 즐겼다. 오죽하면 지엄한 황궁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내각대학사인 고공이 황제의 눈을 가리고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고 그 결과 융경제는 조선군의 기습공격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희생당했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자업자득인 셈입니다. 폐하.'
속으로 황제를 비꼬는 장거정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명나라의 신료들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지엄하고 고
귀한 황제라고 해도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일이니 저 높은 곳에서 신하들에게 역정을 내고 있던 황제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래서 황제는 계속해서 이번 사건에 대한 역정을 냈다.
"어떻게 조선을 구하러 출병한 짐의 병사들이 오히려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황공하옵니다. 황상폐하."
"이번에 죽은 병사가 무려 백여 명이나 되고 살아 돌아온 자들은 고작 10여명이라고 들었다. 이런 참사가 내대에 이르러 생기다니 이런 오명이 또 어디 있겠는가?"
"황공하옵니다. 황상폐하."
"그놈의 황공, 황공 소리는 집어치워라! 짐이 지금 듣고 싶은 것은 조선이 무슨 이유로 우리 병사들을 살해했느냐는 것과 그 대처방안이다."
"황공하옵니다. 황상폐하."
앵무새처럼 황공하다고 외쳐대는 신하들을 보고 융경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융경제가 역정을 내고 있는 이유는 이번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말에 타지도 못하고 국사를 돌보게 된 융경제의 불편한 심기가 반영된 것이었다. 이에 신하들은 화가 난 융경제의 분풀이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똑같이 황공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융경제는 중신들을 일일이 지적해서 그 의견을 들어보아야 했다. 그리고 융경제가 처음으로 지목한 인물이 바로 사실상 명나라의 최고 권력자라고도 할 이부상서 겸 내각대학사 고공이었다.
"이부상서(조선의 이조판서급). 이번에 군사를 파견한 것은 먼저 이부상서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이부상서가 아는 것이 많을 터이니 어서 이부상서의 생각을 말해보라."
"예. 황상폐하. 아직 요동도사와 총병관으로부터 보고가 올라오지 않아서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지만 이번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닌 듯하옵니다."
"우발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조선군이 의도적으로 우리 병사들을 해쳤다는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4년 전에 조선국왕이 된 이연이라는 자는 전왕의 친자가 아니라 양자이옵니다. 그래서 왕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무리한 국정운영으로 인해 작년에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옵니다. 조선왕은 운 좋게 반란을 진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민심을 크게 잃어 국내가 불안하옵니다.
이렇게 불안한 국내를 안정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옛날부터 많이 사용하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사옵니다. 바로 다른 나라와의 분쟁을 일으켜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는 것이옵니다. 그래서 소신의 생각으로는 이번 일도 우리 명나라와 분쟁을 일으키려는 조선왕의 흉계일 가능성이 크옵니다."
"……."
고공은 융경제의 질문이 있자마자 이미 오랫동안 준비한 듯 거침없이 설명했다. 비록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각종 미사여구가 들어가지 않아서 좀 거칠게 느껴지는 고공의 설명이었지만 충분히 논리적이었고 오히려 그 거친 어투가 조선이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하는데 어울렸다.
"이부상서. 그것이 무슨 소리이오? 조선은 심각한 내전을 치른다고 국력이 다 소진되어 있는 상황이라서 그렇게 무리한 일을 할 리가 없소!"
"그렇소. 조선은 이미 170여 년간 우리 황조를 성심으로 받들어왔소. 백번을 양보하여 저들이 이부상서의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면 여진족과 왜구정도와 싸우면 되는데 구태여 우방인 우리 황조를 자극할 이유가 있겠소?"
친 장거정계로 분류되는 일부 대신들이 고공의 의견에 반박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박은 곧 다른 이들의 발언에 파묻혀 사라졌다. 이미 명나라 조정에는 장거정을 따르는 자들보다는 그 반대파가 더 많았다.
"이부상서의 말이 맞소. 내가 조선에 칙사로 다녀온 적이 있는 데, 그 때 만난 조선왕은 제 주제를 파악 못하고 야심에 불타던 자였으니 충분히 이번 일을 꾸며 자신의 폭정을 숨기려고 했을 것이 분명하오."
"나도 같은 생각이오. 이번 조선의 내란도 우리 명나라 칙사에 대한 대우문제로 불거졌다고 들었소. 그리고 현재 조선왕은 우리 칙사들에 대한 대접이 불손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니 우리 명에 우호적인 인물이 절대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