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즉위 4년.
'역시 예상대로 돌아가는군.'
명나라 조정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친조선파 대신이며 이부상서 고공 다음으로 강력한 발언력을 자랑하는 예부상서 장거정은 조정의
공론이 조선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논쟁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방관자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회의 분위기는 계속 고공에게 유리해져 갔다.
하지만 이런 일은 전에 없던 것이다. 명나라 조정에는 고공과 장거정의 양대 세력뿐만 아니라 중립세력이 존재했다. 보통 중립세
력들은 세력이 약한 장거정 일파를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고공일파와 손을 잡고 장거정 일파를 압박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거정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방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결론이 나있는 논쟁이다. 괜히 나까지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이렇게 생각한 장거정은 신료들 간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시선을 돌려 옥좌에 앉아서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융경제를 흘끔 쳐다보았다. 장거정를 비롯하여 눈치 빠른 신료들이라면 알겠지만 융경제는 이미 조회에 나오기 전부터 이번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린 상황이었다. 그래서 장거정이 반대의견을 내지 않는 것이다.
이윽고 신료들의 논쟁을 지켜보기만 하던 융경제는 조회가 길어져 말을 탈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싫었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어서인지 일단 신료들의 논쟁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조용히 논쟁에 참가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있던 고공의 의견을 물었다.
"짐은 이부상서의 의견을 묻고 있다. 그런데 이부상서의 의견에 왈가왈부하는 자들이 너무 많으니 짐이 무척 지루하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짐은 이부상서의 의견을 더 들어보고 싶다. 이부상서는 계속해서 말하라."
"예. 폐하. 물론 일부 신료들의 말처럼 조선왕이 이번 일을 의도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만은 없사옵니다. 이번 일로 인해서 조선왕은 내부문제는 해결할 수 있으나 외부적으로는 위기를 맞게 되기 때문이옵니다. 하오나 이번 일에 대한 조선왕의 책임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사옵니다.
조선왕은 황상폐하의 신하이며 폐하의 황은을 입어 제후국 조선을 다스리는 막중한 자리에 오른 자이옵니다. 당연히 폐하를 대신해 조선을 잘 다스려야 할 조선왕이 언제나 정무에 바쁘신 황상폐하께오서 친히 조선 문제에 시간을 사용하셨을 정도로 조선의 내정을 잘못했다는 것부터가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옵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상폐하께오서는 조선왕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시었는데 폐하가 파견한 군대가 해를 입는 것도 막지 못한 점은 조선왕이 이번 일의 배후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옵니다. 따라서 조선왕은 이번 일에 대한 중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옵니다."
"음~. 이부상서의 말이 옳다. 짐이 생각하기에도 이번 일에 조선왕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고공답다. 황상께서 원하시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고공의 말을 들은 장거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 일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명나라 군대를 습격했는지가 아니다. 그보다 명나라 황제인 융경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번 일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자신과 자신의 제국에 유리한가였다.
사실 이 정도의 일은 군기가 빠진 명나라 군대에서는 매일 일어날 정도로 황제인 융경제가 신경 쓸 정도로 큰 사건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명나라 조정에서 심각하게 의논하는 이유는 이번 일이 외국과 연관되어 있어 명제국과 황제의 위신에 먹칠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조선을 구원한다는 거창한 핑계로 당사자인 조선의 요청이 없는 상황에서 파견했던 군대가 지휘관의 통제에 불응하고 오히려 조선을 노략질하려고 국경을 넘었다. 거기에 정체모를 적에게 기습을 당해서 거의 전멸을 당했다. 이래서는 조선과 인근 여진족에게 명나라 조정과 군대의 무능함만 보여준 국제적인 망신이다.
특히 이번 출정은 무리하다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융경제가 고공의 청을 받아드려 시행된 것으로 이런 결과라면 명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이 추락하는 것은 물론이고 황제 개인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질 염려가 있었다. 특히 이번 사건이 명나라의 국내문제와 연관이 된다면 그 타격은 더 커질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으니 황상께서는 다른 일을 일으켜 이번 일을 무마시키려고 결심하셨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이번 사건의 진범을 찾아내서 응징하는 것보다는 황상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사건을 전개시켜줄 범인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일.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가장 적합한 자가 바로 조선왕이다.'
이렇게 장거정이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사이 조회는 빠르게 진행되어 이미 명나라 조정은 조선왕을 이번 일에 책임을 질 사람으로 지목하고 그 처벌방안을 의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긴 조선왕이 모든 책임을 진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올 책임은 없다. 그래서인지 고공의 의견을 지지하는 신료들이 많았고 융경제도 신료들의 의견을 따랐다.
"다른 신료들의 의견도 들어보았으나 이부상서의 의견이 가장 짐의 생각과 흡사하도다. 짐이 조선왕을 도와주기 위해서 조선에 파견한 군대가 조선 땅에서 조선군으로 보이는 적의 공격을 받아서 많은 사상자가 났다. 조선왕이 이번 일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럼 이제는 조선왕에 대한 책임을 묻는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겠노라. 짐이 생각하기로는 가장 먼저 조선왕에 대한 책임론을 제기한 이부상서가 가장 좋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이부상서는 조선왕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신 이부상서 고공이 말씀을 올리겠사옵니다. 이번에 조선왕이 황상폐하와 우리 황조에 지은 죄는 당장 조선왕을 폐하고 조선을 직속령으로 편입하여 다스린다고 하여도 할말이 없는 대죄이옵니다. 하지만 조선은 우리 명나라와는 역사와 전통이 다른 나라라서 함부로 조선왕을 폐하는 것도 좋은 방책은 아니옵니다.
그래서 소신의 짧은 생각으로는 조선왕을 바로 폐하지는 않고 황상폐하께오서 친히 조선왕에게 훈계를 하시어 황상의 인자하신 덕을 들어내고 조선왕을 감복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상책이라고 생각하옵고 만일 조선왕이 교만하여 황상의 덕에도 감복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조선왕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옵니다."
"……."
'고…고공이 미쳤다!!!'
고공의 말에 장거정의 세력에 속하는 신료들은 물론이고 중립세력에 속하는 신료들까지 안색이 변했다. 고공의 의견은 겉
보기에는 한번 경고를 주는 정도로 끝내자는 무척 온건한 대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황제가 친히 조선왕을 만나 훈계를
한다는 내용에 숨어있는 뜻은 조선왕에게 입조를 요구하자는 것이다.
'입조라니 조선과 전쟁을 하자는 말인가?'
입조의 단순한 뜻은 조정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 상황에 대입해보면 조선왕인 균이 북경으로 찾아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이번 일을 백배사죄해야 한다는 뜻이며 정치적으로 조선이 완전히 명의 속국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자주독립국인 조선으로써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조선이 아무리 우리 명에게 허리를 숙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코 우리 명나라가 무시할 정도로 약소국이 아니야. 가뜩이나 나라사정이 안 좋은 이때에 조선을 너무 자극하는 것은 자칫 우리 명나라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황상께서 저런 과격한 의견을 채택하실 리가 없어. 암! 없고말고.'
대부분의 신료들은 고공의 말을 융경제가 거부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당시 명나라는 도저히 조선과 전쟁을 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융경제는 그것도 모르는 바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융경제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부상서의 의견을 들으니 아주 좋은 방책인 듯하다. 그럼 이견이 없다면 이부상서의 의견을 채택하기로 하겠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
아직 추운 2월말. 거기다 명나라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것이 수도 북경이다. 신료들은 추운 날씨에도 손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이는 장거정도 마찬가지로 방금 전까지 조정의 공론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예상하던 그도 지금은 융경제와 고공의 행동에 놀라서 다른 신료들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상과 고공이 나란히 미친 것인가? 어떻게 조선을 상대로 저런 초강수를 내놓는다는 말인가? 더욱이 조선왕은 지모가 뛰어난
인물. 적으로 만들었다가는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인데…….'
하지만 그 장거정마저도 반대를 표명하지 못했다. 명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융경제와 최고 실권자인 고공의 뜻이 일치된 이
상
그 뜻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렇게 융경제와 고공 다음으로 가장 발언력이 강한 장거정이 반대를 하지 않자 다른 신료들도 승
산이 없다고 보고 나서지 않았고 융경제는 고공의 제안을 정식으로 채택했다.
"그럼 별 이견이 없으니 이번 일은 이부상서의 제안을 채택하도록 하겠노라. 짐은 할 일이 있어서 그만 돌아갈 것이니 나머지는 이부상서가 알아서 세부적인 사안을 결정하고 나중에 짐에게 재가를 받도록 하라."
"성심을 다하겠사옵니다. 폐하."
조회가 끝났지만 많은 신료들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것은 장거정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장거정은 이번 일로 사이
가 나빠질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이니 만큼 더욱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집에 돌아가면 밀서를
써서 조선왕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아아아함~!"
즉위 4년인 1569년 3월.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균은 따뜻한 봄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연일 계속되는 정무로 피로했기 때문인지 잠시 하품을 했다. 내전은 종결됐지만 워낙에 벌여둔 일이 많은지라 균은 최근 들어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서류 처리하는 기계라고 할 정도로 일 잘하는 균이 피로를 느낄 정도라면 그 아랫사람들은 얼마나 고생을 할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미 승지들과 사관들은 전멸했고 운 나쁘게 균의 눈에 띈 젊은 신료들은 서류더미와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거기에 내의원의 의관들이 아예 상주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사태가 심각한지를 알 수 있었다.
'정말 일이 끝도 없구나. 그것만 아니라면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이 천천히 개혁을 할 수 있을 텐데…….'
균아 머리로는 뜻 모를 생각을 하면서 눈은 서류를 읽고 손은 수결(싸인)을 놓는 묘기를 부리며 격무에 시달린 지도 벌써 2달째. 균은 내전 때 군대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내정을 소홀히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작년 말 한성부로 돌아온 균은 일단 올해 1월까지 국정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정계개편에 매달렸다. 하지만 말이 쉽지 수백 개가 넘는 조정의 요직을 4대 당파의 균형을 맞추어가며 일제히 재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덕분에 균은 머리에 금이 갈 뻔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옥의 시작이었다. 2월이 되자 두 가지의 거대한 일거리가 나타났다. 하나는 전국의 토지, 인구, 병역대상자를 조사하는 전국일제조사를 준비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조선의 국방 분야에 대한 추가 개혁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2월 달은 1월 달보다 더 바빴다.
그리고 3월. 이번에는 작년에 균이 출정한 기간동안 밀린 결제서류와 올해 1, 2월에 처리 못한 결제서류가 몰려왔다. 균의 거처인 강녕전을 단숨에 문서창고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특히 자신의 개혁으로 인해 결제서류가 더욱 늘어나면서 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흰 머리를 잡아 뜯어야 했다.
'설마 반란군들이 나를 과로사 시키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균의 흰머리가 늘어갈수록 조선의 힘은 강해졌다. 특히 군사 분야의 발전은 무척 빨랐다. 내전으로 지방통제력이 강해져 지방에서 병사들이 잘 올라오기 시작하여 부족한 병력을 충족시켰고 올해 초부터 57식 북한산 소총이 생산되어 병사들의 무장상태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3월 현재 균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있는 조선의 친위군과 중앙군은 총 병력 4만 명에 직업군인이 2만에 달해서 전투력이 뛰어났고 총 4500정의 각종 소총과 5백여문의 야전포를 확보하여 화력 면에서도 막강했다. 그리고 이렇게 균의 군대가 강대해지자 더욱 더 균에게 도전하려는 세력은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