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174 회]
즉위 4년.
"도대체 무슨 일인데 주상전하께오서 전부 강녕전으로 오라는 어명을 내리신 거지?"
"그러게 말이야.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만나는 으슥한 후원에 있는 정자에서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어디가 편찮으신가?"
"이미 참상관(중급관리)이나 된 사람이 궁중용어를 모르면 쓰나? 그럴 때는 '옥체가 미령하시다' 라고 하는 거야."
"그런가? 워낙 입궐한 적이 적어서 그런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네."
"조심해. 전하께서는 우리를 보호해주시겠지만 양반들은 우리가 말실수를 하면 그것을 꼬투리 잡아서 난리를 친다구. 그리고 입궐하면 처신을 잘해야 해."
어느 날. 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외수사에 소속되어 있던 모든 부장들을 소집했다. 비금도를 담당하던 황재훈마저 불려 올라왔을 정도였으니 부장들은 무슨 큰 일이 있거나 균에게 이상이 생겼다고 판단하고는 전전긍긍하며 입궐했다. 그리고 내전내관들의 안내를 받아가며 강녕전으로 들어선 후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설마 우리가 홍문관(문서를 관리하는 관청)에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
물론 홍문관의 문서고 못지않게 책과 문서들이 쌓여있었지만 이곳은 홍문관이 아니었다. 그동안 햇빛을 못 보았는지 아주 허연 얼굴에 눈 밑에는 검은 반달이 선명하게 들어난 균이 그들을 반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류더미에 파묻혀있던 관리들이 하나둘 창백한 얼굴로 부장들을 같이 반겼다.
균과 관리들의 창백한 얼굴을 본 부장들은 순간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격이라는 옛 속담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들의 불안한 예상은 곧 균의 입을 통해서 실현되었다. 인수인계를 하라는 균의 말에 관리들은 몇 마디 조언을 남긴 채 순식간에 사라졌고 부장들은 얼떨결에 그들을 대신해서 서류더미에 파묻히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그대들은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일은 이제 후임자들에게 맡기고 귀가하여 며칠간 푹 쉬도록 하라."
'당…당했다! 전하를 가장 측근에서 모신 우리가 전하의 괴팍한 성격을 잊고 지냈다니…….'
"그럼 이제 일을 해볼까?"
간단한 의논 정도로 알고 마음 편하게 찾아왔던 부장들은 오늘따라 균의 말이 사악하게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균은 이미 쌓여있는 일거리로는 양에 차지 않았는지 부장들에게 종이 뭉치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덕분에 부장들의 얼굴은 굳어졌다. 아까 전 창백한 얼굴로 달아나듯이 나가버린 관리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일을 하자는데 왜 그렇게 질린 표정들인가?"
"아…아니옵니다. 전하."
"보아하니,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그대들의 낯빛이 별로 좋지 않구나. 설마 단체로 식중독이라도 걸린 것인가?"
"아…아니옵니다. 전하."
'큰일이다. 우리의 건강을 살펴보시는 것을 보니 우리를 단단히 부려먹으실 모양이다.'
균은 나름대로 따뜻하게 안색이 좋지 않은 부장들을 위로했지만 부장들은 도리어 불안했다. 부하들의 건강을 주군이 챙겨주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저 눈 앞의 주군은 부하들이 건강해야지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장들은 마음을 비우고 균의 입에서 떨어질 무지막지한 일거리를 기다렸다.
"그런가? 하긴 아직 춘삼월인데 식중독이 있을 리가 없지. 별일이 없다니 다행이로다. 앞으로 그대들은 할 일이 많은데 함부로 몸을 상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건강에 각별히 유의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과인이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먼저 오늘부로 외수사를 해체하겠다."
"저…전하!"
난데없이 외수사를 해체하겠다는 균의 말에 부장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물론 왕의 얼굴을 신하가 쳐다보는 것은 중벌을 받을만한 일이었지만 자신들이 몸담았던 비금도상단의 후신이며 균의 든든한 권력기반에 되어준 외수사가 사라진다는 말에 부장들은 그런 예법마저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균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물론 피로가 쌓여서 얼굴표정이 무표정해진 상황이라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누구보다도 구 비금도상단인 현 외수사를 만드는데 고생을 많이 한 사람치고는 너무 태연자약했다. 그렇게 균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부장들을 진정시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외수사, 아니 비금도 상단이 창립 된지도 횟수로 11년. 만으로는 10년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처럼 한때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했던 상단도 과인이 거느린 일개 관청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과인의 심복들인 그대들이 모여 있기에는 너무 작은 곳이 되어버렸다."
"……."
맞는 말이었다. 조선의 관청은 각각 격이 다른데 '사'로 끝나는 관청은 상대적으로 격이 낮은 관청이다. 내수사와 동급의 관청으로 편제된 외수사의 경우에도 최고위 관직이 정 5품관에 머물렀을 정도로 비중이 낮았으며 그 이상의 관직을 주려면 황재훈이나 박규남처럼 다른 관직을 겸하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대들도 잘 알겠지만 이번 반란진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국정의 주도권을 과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번에 그대들이 세운 공도 적지 않으니 외수사라는 작은 관청에만 모아둘 수가 없도다. 그래서 이번에 외수사를 폐지하고 그 기능을 조정의 여러 관청에 이양할 것이다.
물론 그대들도 맡은 분야에 따라서 새로운 벼슬을 받게 될 것이다. 과인이 나누어준 종이에 세부적인 임무와 필요한 자료가 적혀있으니 나중에 참조하라. 그럼 간단히 그대들의 새로운 직책을 알려주겠노라. 먼저 전 병기주부 나원호."
"예. 전하."
"그대를 병조의 속아문인 군기시의 부정으로 임명한다. 비록 군기시의 부책임자인 부정이라고는 해도 총책임자인 정이 임명되지 않을 것이니 그대가 군기시의 실무를 총 책임지게 된다. 따라서 이 나라의 병기는 그대가 총괄하게 되니 과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전하!"
균의 말을 들은 나원호는 숨이 잠시 막힐 정도였다. 군기시는 병조에 속한 관청으로 바로 무기를 만들고 개량하는 관청이다. 따라서 외수사의 병기창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었고 중복되는 임무를 가진 두 관청을 하나로 통합하여 나원호에게 맡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였다.
하지만 새로 받은 부정이라는 벼슬은 상상 이상이었다. 군기시에는 정 3품인 정, 종 3품인 부정, 종 4품인 첨정, 종 5품인 판관 등 종 6품인 주부보다 높은 벼슬이 즐비하다. 그중에서 부정이라면 현재에 비해서 무려 6품계나 승진한 것이고 해당 관청의 실권을 장악하기에 충분한 고위직이었다.
"전하. 신을 아끼시는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신은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하오나 소신이 종 6품의 미관말직에서 종 3품의 요직으로 갑자기 승차하게 된다면 다른 신료들이 이를 문제 삼아 전하께 심려를 끼치지는 않을까 우려되옵니다.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전하."
"신들의 생각도 전 병기주부와 같사옵니다. 특히 삼사의 대간들이 벌 때처럼 들고 일어나서 문제를 삼는다면 전하께서 이번 기회에 하고자 하시는 일에 걸림돌이 될 것이옵니다. 하오니 이번 일은 다시 명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너무 급격한 승진에 불안감을 느낀 나원호 등은 반대를 표했다. 사실 그들에게는 벼슬의 높낮이는 별 상관이 없었다. 원래라면 그냥 일반 백성으로 살아갔을 자신들을 등용해 벼슬아치로 만들어준 것만 해도 그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백골난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급의 관리들보다도 많은 녹봉을 받는 상황이니 그렇게 아쉬울 것이 없었다.
"이미 과인이 내린 결정이다. 다른 자들을 걱정할 것 없도다."
"하오나 전하……."
"그대들은 괜히 과인의 얼굴이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나?"
"……."
그제서야 나원호 등은 균의 얼굴이 창백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선의 관직을 모두 합치면 거의 1만개에 근접할 정도로 많다. 이중에서 실제 업무가 배당되어 있는 관직을 실직이라고 하는데 이 수는 총 5606개에 달하며 그중에서 어느 정도 비중이 있는 자리라면 몇 백 개에 달한다.
덕분에 대규모 인사를 단행하여 4대 당파의 세력균형을 맞추고 덤으로 자신의 심복들에게 고위직을 안겨주기 위해서는 고려해야 할 것이 한두가지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정세가 불안한 상황에서는 변수들까지 최대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서처리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균마저도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된 것이고 거기다 꼼꼼하기까지 한 균이 부장들을 호출했다면 이미 일처리가 끝났다는 말이 된다. 덕분에 부장들은 할 말이 하나 밖에 없었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전하."
"그럼 계속해서 새로운 직책을 알려 주겠다. 전 병기 주부 김호진은 호조의 속아문인 군자감의 부정으로 임명하여 조선의 모든 군량미와 군수품을 책임질지어다. 또한 전 선전관 박규남은 의금부의 부정으로 임명하여 조선의 모든 탐보망을 일임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군자감은 조선군의 군량미와 군수품 그리고 관리들에게 주는 봉미까지 관리하는 관청으로 덕분에 그 비중이 컸다. 또한 의금부는 국왕직속의 사법기관으로 비밀스러운 정보를 다루고 다른 자들의 간섭을 받지 않기에는 최적의 기관이었다.
"전 건축직장 나중현은 공조의 속아문인 선공감의 첨정으로 임명하여 올해 있을 대로공사의 총책임을 맡길 것이며 전 농업직장 이영식은 예조의 속아문인 봉상시의 첨정으로 임명하여 농업기술을 연구하게 할 것이다. 또한 비금만호 황재훈은 만호직을 그대로 유지하되 이조의 속아문인 내수사 전수(정 5품)를 겸하여 비금도와 내수사를 같이 관장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선공감은 국가적인 토목공사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올해 있을 대로공사를 주관하는 곳이었기에 나중현에게는 적지였으며 봉상시는 국가적인 제사와 시호를 내리는 일, 그리고 농업과 관련된 일등을 모두 하는 곳으로 부분적이지만 농업을 관장하는 관청이었다.
한편 황재훈은 다른 부장들과 달리 벼슬이 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수사라는 조직과 비금도를 같이 관장하면서 군자감 부정 김호진과 맞먹는 수준의 재정과 그 이상의 조직을 관리하게 되었기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밖에도 균은 북한산성을 지키는 산성연대를 여단으로 증강시키고 지휘관으로 임꺽정 등을 임명하고 서유생은 형조의 속아문인 전옥서(죄수를 관리하는 관청)의 주부와 부여단장을 겸하게 했다. 이로써 측근인사는 거의 완료되었다.
"자세한 것은 과인이 나누어준 서류에 있으니 충분히 검토한 후 해당관청으로 찾아가도록 하라. 두 개의 상이한 조직을 합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 일이니 마음 단단히 먹고 이번 일에 임할 것이며 과인이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성심을 다하겠사옵니다. 전하."
'성심을 다하겠다면서 표정은 울상이군.'
균은 표정이 어두운 부장들을 보면서 좀 못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이번 일로 그들은 더욱 출세는 했지만 그 대신 그들이 몸담았던 비금도 상단은 조선조정에 완전히 흡수가 되어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균도 이번 결정을 내리면서 그렇게 기분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상 비슷한 임무를 가진 기관을 여러 개 운영한다는 것은 낭비에 가까웠다. 더욱이 균이 바라는 것은 비금도 상단이 해체되어 조선조정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었다.
"몸담고 있던 외수사, 아니 비금도 상단이 해체되니 섭섭한가?"
"아니옵니다. 전하. 전하께오서 신들에게 높은 벼슬을 제수하시었는데 신들이 어찌 섭섭하다고 생각하겠사옵니까?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아니다. 과인이 보아하니 그대들은 지금 과인에게 거짓을 고하고 있다. 하긴 과인도 이번 일을 결정하면서 기분이 찹찹한데 그대들이라고 좋을 리는 없겠지. 하지만 비금도 상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니 너무 심려들 말라."
"망극하옵니다. 전하."
"원, 아직도 죽을상들이라니? 그럼 며칠 밤을 지새운데다가 비금도상단을 직접 창설한 과인은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르라는 말인가? 자자. 그렇게 죽을상을 짓지 말고 자네들이 조정을 비금도 상단으로 만들면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아니 들 그런가?"
조정을 비금도 상단으로 만들라는 균의 말에 부장들은 모두 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가우뚱거리는 듯했다. 그래서 균은 간단한 힌트를 주기로 했다.
"과인은 무척이나 바쁜 몸이다. 그런 과인이 그대들을 일일이 나누어 배정을 했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 느껴지지 않는가?"
균이 부장들을 배치한 것을 보면 육조에 각 한명씩은 배치가 되어있었다. 이조는 황재훈, 병조는 나원호, 호조는 김호진, 공조는 나중현, 예조는 이영식, 형조는 서유생, 그리고 군사지휘관인 임꺽정과 의금부의 박규남은 논외였다. 잠시 생각을 하던 부장들은 그제서야 모두 다 양반관료들의 입김이 약한 속아문에 배치가 되어 있고 그리고 서로 떨어져 배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