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군주(還生君主)- 2nd Story
10화. Interude
20XX년 5월 6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동평관(東平館).
중앙박물관을 구경한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은 이제 선생님의 지도하에 지금의 대한제국의 기틀을 세운 선조의 흔적을 따라 동평관에 와있었다. 동평관은 우리 시대에는 흔적조차도 없지만 이 시대에서는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남아있었다.
"...여러분, 여기가 동평관이에요.
이곳은 조선 시대에 일본 사신이 들어와 머물던 객관(客館)이지만 일본인들의 행패때문에 폐쇄된 적이 있고, 울타리까지 둘렀지요. 이 안에서 무역은 허가했지만 개인적인 거래는 불법이었죠. 조황(祖皇) 재위직전에 일어난 삼포왜란때에도 일본인이 민가에 행패를 부리는 통에 의금부에서 감금을 해야할 정도였죠.
바로 여기에서 크리스 아델레이드와 시마즈 유메가 만났고, 여기에서 그녀는 조선어를 배웠고 유럽의 언어를 가르쳐주었지요. 그래서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냈다고 하지요.
그것이 사역원에 영학청. 후에 서학청으로 개편된 기관이 생기게 된 거에요."
"그런데 크리스 아델레이드가 조선어를 배운 것이 어느 정도였나요?" 어느 학생의 질문.
"그녀는 원래 영국 귀족이었고 유럽 대부분의 언어에 능통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우리 한국어를 배우는데에는 오래 걸렸다고 하죠. 기록상으로 2년이 걸렸다고 해요."
"2년이요!?"
"거의 2년이에요. 그때에는 이미 서광대로를 비롯한 일부 도로들과 함께 역참들이 놓아지고 인구와 세금조사등이 완결되어 인구는 약 1천 2백만으로 밝혀졌지요. 그리고 이를 통해 많은 짜투리 토지를 찾아내어 적절한 세금을 거두어 왕조의 재정은 더 풍족해졌을뿐 아니라 지방의 통제도 더 훨씬 원할해졌기에 조황께서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죠. 대동법도 이때 시작된 것이에요.
그때 일본에서는 역사시간에 배운 것처럼 시마즈 가家가 움직이기 시작해 오토모 소린을 멸망시키고 남 큐슈를 통일했지요. 이 사이에 시마즈 유메는 제궁으로 들어오게 되지만 여전히 후궁 대접을 받았고 창덕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요."
"왜 유메에게는 그랬을까요?"
"유메가 시마즈 요시히사의 손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정략적인 것이지요. 그때문에 조황께서도 난감했지만 시마즈- 조선의 동맹관계때문에 형식상이라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겠죠.
그리고 당시 일본 전국시대의 영향도 있어서 조황께서는 상당히 조심하신 것으로 봐지지요.
첩자 또는 암살자라는 것때문에 말이에요."
"그래도 그녀는 참고견뎠죠."
"네, 게다가 유메도 그런 사정을 알고있었기에 그런 것을 묵묵히 받아들인 것이겠죠."
"그 사이에 크리스는 뭘하고 있었지요?" 어느 학생의 질문.
"그녀는 조황의 허락을 얻어 조선을 돌아보는 것이 허가되었어요. 그리고 나온 것이 이것입니다."
선생님은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자신이 가져온 책을 내보였다. 그 책의 제목은 "조선견문록(朝鮮見聞錄): Insight of Chosun"이었고 초판은 1576년이지만 현대적인 장정으로 표지가 다시 입혀진 것이었다.
"이 책은 제국의 이전인 조선에서 나왔지요. 후에 유럽에서 출판된 이 책을 보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은 조선이란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녀는 유럽의 여러 언어를 할 줄 알았기에 여러 언어판을 낼 수 있었던 것이지만 유럽에서 먼저 나온 것은 영역본이죠."
"...그래서 일본 대신 조선을 찾게되는 유럽 상인들이 오게되는군요."
"그래요. 그들의 목적은 네덜란드처럼 상업적인 목적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초기 제국주의의 형태지요. 물론 후에 제국에 의해서 대부분 저지되었지만..."
"그런데 어떻게 조황의 여행허가를 얻었나요? 그녀는 우리 말을 배웠다지만 그 당시에 조선 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을텐데..."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외국인 혐오증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명과 왜에 국한되었지 유럽까지는 아니었지요. 하지만 유럽 사람 특유의 모습에는 어느 정도 기겁했던 것은 확실하지요."
"..."
"그녀가 활동하기 시작한 1572년은 남명 조식 선생이 사망하는 슬픈 일도 있었지만,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 일어난 해지요. 일본에서는 시마즈 가家가 남 큐슈를 통일하고, 중국에서는 장거정이 고공을 몰아내고 대학사의 수장이 되었지요. 친조선파가 명 관료체계의 최고위에 오른 것이죠.
알다시피 퇴계 이황 선생은 1569년에 은퇴, 다음해인 1570년 11월에 고향에서 사망했지요. 또한 조식 선생은 1571년에 은퇴하여 고향으로 내려갔지요. 또한 같은 시기에 시마즈 가家의 전 당주였던 시마즈 다카히사도 사망하지요. 또한 이때 서양은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연합해 터키와 싸운 유명한 레반트 해전이 있었지요."
"왜 내려가셨을까요?"
"조식 선생은 토정 이지함 선생과 막역한 친구인 것으로 알려져있어요. 그에 대한 조언을 받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이 해는 조선과 이후 제국의 대외정보기관인 비천(砒天)이 성립되었고, 이미 설립된 국토안전국(國土安全局, DNS: Directory of National Security)의 전신인 왕실 정보부와 같이 협력하는 형태가 되었지요."
"이미 정보부장이었던 박규남과 사이가 어땠을까요?" 다른 학생의 질문.
"크리스와 박규남의 사이는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있지요. 아무래도 해외와 국내의 정보를 서로 총괄해 왕을 보좌해야하는 형태였으니까요. 그리고 비천의 첫 성과는 무진삼란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김진기의 행방을 찾아낸 일이지요."
"와아-"/"대단하네~." 학생들의 환호.
아마 이들은 tv에서 본 스파이물과 비슷한 상상을 하고있었을 것이었다. 이러는 중에 또 다른 학생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동명은 어떻게 되었나요? 비천이 결국 찾아냈나요?"
"당시 요동 사령관, 이성량의 도움을 받은 것도 있어서 시간이 걸렸지만 찾아냈죠."
"그런데 조황께서는 미 대륙의 존재를 알고계셨나요?"
"개인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실록에는 일본 너머에 큰 바다를 지나면 큰 대륙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으로 봐서 아마 크리스와 선조 간의 대면에 사관에게 적게했을 것이라 보고있지요. 그리고 제국이 미 대륙 서부에 진출한 것은 1590년이후지요. 또한 미 대륙 서부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선조 다음의 광호제(光昊帝: 우리 역사에서의 광해군)부터죠."
동평관을 둘러보는 사람들 속에서 학생들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게속 듣고있었고 이제 이들의 다음 여정은 북한산성였다.
세상이 마음에 들지않으면 자신을 바꿔라. 그렇지않으면 눈을 막고, 귀를 막고, 입다물고 고독하게 살아!
-쿠사나기 모토코, 공각기동대 Stand Alone Compl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