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5화 (205/228)

환생군주(還生君主)- 2nd Story 

30화. Interude(3) 

20XX년 6월 10일 

신시(伸市), 비천 본부 내 아델레이드 관. 

이곳에 견학온 고등학교 어느 반에서의 학생들과 담임 선생님의 질의문답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동명은 어떻게 찾아내었나요? 비록 야인여진이 동의했다고 해도 흑룡강에서 압록강까지 오는 것은 힘들었을테니까요." 

"당시 명의 요동 사령관은 이성량(李成梁)이라는 것을 기억해요. 그 사람은 명으로 귀화한, 조선 왕족의 혈통을 부분적으로 받은 사람이고 그래서 어느 정도 조선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요. 

게다가 요동의 지리적인 위치상 조선을 많이 의지할 수 밖에 없었지요. 당시 명은 서서히 쓰러져가고 있었고 조선은 선열제의 힘으로 일어나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다른 여진부족들이 동의하지않았겠죠. 무진삼란에서 그렇게 혼이 났으니까요." 

"그래요. 여진족은 무진삼란이후 이동명이 계속 도발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그의 술책에 말리지 않았지요. 그 덕에 비천이 이성량의 협조를 얻어 이동명을 찾아내게 된 것이지요. 당시 여진은 이성량의 관리하에 있었기 때문이었기도 하고요." 

"잉글랜드와 교역을 시작하면서 서양 학문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데 거기에 대한 반발이 있었을 것같은데요." 

"그랬지요. 유학, 특히 주자학을 숭상하던 소수의 기호사림파들이 반발했지만 성리학을 대신할 학문을 찾던 남명학파와 영남학파는 그것을 오히려 반기고 유학과의 절충을 시도했었지요. 

선열제의 힘에 의해 조선은 농업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로 이전이 확실히 되고 있었기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보다 상단에 취직하거나 군으로 가는 것이 더 이득이 되었던 거지요. 그리고 확실한 통계가 잡히기 시작한 것도 선열제 시대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분은 결혼을 좀 늦게 한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분은 결혼을 약간 늦게했지요. 나태함을 벗어던지고 새로이 부활하는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비妃가 되신 분이 상당히 의외였지요. 멀다면 멀고 가까우면 가까운 나라에서 왔으니까요." 

"...상당히 의외였던 분이지요..." 선생님의 대답에 어느 학생이 중얼거렸다. 

"또한 선조 시대를 기점으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활발해지지요. 조선 전기 이상으로 말이에요. 여성의 사회적 권리도 확대되고 여성도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게 된 것이 선조 시대부터지요." 

"...신문도 발행되었다고 들었어요." 

"아, 잊을뻔했네. 

선조 시대 중기부터 명의 전보를 본따 홍문관에서 조정의 시책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지요. 

고대 로마도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생각하고 아우구스투스가 마무리지은 거지요. 

고대 로마의 신문, 악타 세나투스(Acta Senatus)는 속기로 기록되어 공문서보관소인 타불라리움(Tabularium)에 보관되고 읽을 사람은 가서 읽게 만들었지만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는 관보로서 원로원 의결 사항이나 공직 선거결과를 자세히 기록해 속주나 식민도시의 로마 시민에게 알리는 것으로 나뉘지요. 

이것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몰라도 우리 제국에서 신문이 나온 것은 선조때지요." 

"하지만 잉글랜드는 에스파니아 무적함대를 격파하기 위해 조선의 대포를 수입했는데, 일본처럼은 되지않았군요." 

"...그 당시에는 선조 선열제께서도 유럽에 관여하기 꺼렸었지요. 거리 탓도 있었으니까 말이에요. 지금과 달리 유럽과 극동 아시아간의 교역은 상당한 위험이 있었지요. 하지만 선열제 다음 분인 광호제 또는 광무제께서는 미국 대륙의 서부 개척과 함께 유럽사에도 관여하게 되지요." 

"그때까지 골치거리였던 서출에 대한 문제도 개혁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서출에 대한 문제뿐 아니라 그때까지 엉망이던 도량형을 개정해 조선의 표준 도량형도 만드신 분도 선열제시지요. 서출에 대한 문제는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과 관계있는데 경국대전이 만들어지면서 공식화되지요. 이때문에 많은 서출들이 고통을 받고 이에 대한 상소도 만만치않았서 결국 선조 선열제께서 손을 대게 되지요." 

"...반발도 만만치 않았을텐데요." 

"일부 양반 세력들이 반대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당시 선열제께서는 군사력과 함께 뛰어난 정치력을 가지고 계셔서 반대를 하려고 해도 반대할 여지가 없게 정책을 짜셨기 때문이지요." 

"그 시대를 기점으로 서양 문명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문제가 있지않았을까요?" 

"일부 사림파들은 선조께서 명대신 서양 문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보고 상당히 두려워했던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그들은 선조가 아닌 명의 눈밖에 나지않을까를 더 두려워했던 거지요. 그래도 그들도 사실을 인정하지않을수 없게되지요." 

"...자신들이 신봉하는 성리학이 사실은 현실을 반영하지못하는 단순한 공론일뿐이었다는 것을 말이로군요." 

"그렇지요. 원래 공자가 유학을 제창한 것은 당시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그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요순시대로 되돌리고 예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지만, 철학으로 사람을 가르칠수는 있어도 인간의 행동원칙을 교정할 수는 없지요." 

"...국가 철학이라는 것도 있지않나요?" 

"국가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국가 철학이라는 것도 필요하지만, 실제로 인간의 행동과 사회가 바로잡게 하는 것은 법 밖에는 없지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유학은 실패했다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선조께서는 그에 대한 법을 제정하신 것이고요." 

"당시 사정으로 어느 정도 유학 원리에 따를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시대에 서출과 여성에 대한 신법이 생긴 것은 상당한 진전이지요." 

잠시 후, 선생님은 아델레이드 관에서 여러가지 설명을 더하고 아이들과 같이 떠났다. 

이제 이들의 다음 여행지는 사역원과 서학원이었다.

해가 바뀌어 1574년 3월 어느 날. 

명, 광녕성. 

요동방면군 지휘소. 

요동 총병관 이성량(李成梁)은 누군가와 만나고 있었다. 

"요동 총병관 이성량이오." 

"조선 연합상단 베이징 지부장 최미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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