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군주(還生君主)- 2nd Story
36화. 시간이 지나...
1579- 80년의 조선의 모습은 균이 등극하던 1565년에 비해 많이 바뀌어져있었다.
우선 한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을 잇는 5개 대로외에 지선들이 건설되면서 일부 구간들은 복선화가 되었으며 임시 가설용인 배다리가 목조, 석조 다리로 교체되면서 그 주변에 있던 마을이 도시화되어 농업에서 상공업 사회로의 이전이 더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이앙법외에 관개시설에도 신경을 쓴 덕에 농업 생산량은 이전에 비해 대폭 증가되었으며 초보적인 은행이 설립되었고 서양 의학이 들어와 조선의 한의학과 경쟁하고 있었다. 주목할 점 하나는 일부 양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경국대전에 명시되어있었던 서출과 여성에 대한 차별을 마침내 폐지한 것이었다. 따라서 축첩제(+후궁제)와 기녀제도 같이 폐지되었고 이로서 서출과 여성도 공직으로 나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또한 균과 가족들에게도 몇가지 경사와 슬픈 일이 일어났다.
"조선 최고의 왈가닥"이라 불리던 진이가 결국 곽재우를 붙잡아 결혼한 것이었다. 곽재우로서는 고향에 놔둔, 장래를 약속한 여자가 있었지만 진이의 돌진과 균의 반협박에 못이겨 결국 사주단지를 넘기고 말았다. 그리고 균 자신도 결국 결혼하고 말았는데, 결혼한 여성이 바로 중동 소국에서 망명 온 왕녀였고 이것은 조선에 기존의 불교, 유학, 도교, 그리고 새로이 들어온 천주교, 개신교외에 이슬람이 들어오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몇년 후에는 아들 둘을 낳았으며, 각각 이름이 의(영창군)과 혼琿(광해군)으로 결정되었다. 또한 선왕 명종의 비였던 인순왕후 심씨는 1575년에 정아공주를 균들에게 맡기는 것을 유언으로 사망했으며 왕대비 박씨도 1577년에 사망했다. 죽은 사람에게는 안되었지만 균은 이들이 사망함으로서 어느 정도 해방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과거제도도 개편되었는데, 기존의 유학뿐 아니라 노자, 장자, 도가, 법학, 서학등을 추가했을뿐 아니라 평민들도 볼수 있게하여 중국과 완전히 별개의 제도로 바뀌게 되었으며 도량형도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모아 표준을 제정했는데 지금의 미터법에 가까웠다. 잉글랜드와의 교역을 바탕으로 서양의 종교가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천주교와 개신교는 아직 조선에 뿌리를 내리지못하고 있었다. 아직 민중들에게 생소한 면도 있었지만 서민들은 그들에게 친근한 불교에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병무청과 수군청을 중심으로 재편된 군軍도 비밀리에 구입한 서양 범선을 해체, 조립하는 방식으로 서양 범선을 연구해, 판옥선을 대양 항해에 알맞게 재개조하였으며, 태종 시대부터 있었던 거북선도 재건조, 개조하게되었다. 또한 1580년에 실시된 2차 인구조사에 의거해 17세- 60세 성인 남성을 중심으로 상비군화되었으며, 비금도 소총의 제작이 거의 중지되고 북한산 소총이 거의 완전히 보급되었을뿐 아니라 균이 이전에 명한 것- 전황을 바꿀수 있는 하늘을 나는 기구, 큰 석재를 들어올리는 기계, 성벽의 석재의 틈에 발라 굳히는 물질등이 완성되었으며 잉글랜드와의 교역과 늘어난 내수를 바탕으로 비천도 국내 지부외에 명과 왜 전역에 지부 설치가 상당 부분 완료되어 명과 왜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볼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북한산성의 개축이 완료되어 그 위용을 드러내었다.
이때 크리스의 "조선견문록"이 1576년 마침내 출판되었다. 균의 통치에 의해 변화하는 조선의 모습을 외국인의 눈으로 본 이 기행문은 조선 내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명과 왜에도 팔렸지만, 출판 전에 균은 기밀에 관련되는 내용들을 삭제해줄 것을 요구했고 크리스도 그것을 빼도 이야기가 많았기에 승낙했다. 그리고 이 조선견문록은 우선 잉글랜드로 건너가 영문판이 나왔으며 바로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어 유럽이 조선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성의 치안은 균이 즉위하기 전보다 많이 좋아졌으며, 검계들도 어느 정도 사라졌다. 그렇지만 농업사회에서 상업사회로의 이전은 도시의 과밀화와 빈부격차의 문제를 서서히 낳게하고 있었고, 균은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서양의 인쇄기가 수입되었으나 곧 시간이 지나 조선의 인쇄술과 합쳐져 많은 책들이 인쇄되고 개인 도서관과 공공 도서관, 왕립 도서관이 설치되어 이전보다 많은 책들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되었으며, 지방에서는 향약대신 주민들 스스로 자치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의 마을을 자율, 자주적으로 운영해나가기 시작하고있었다. 이런 상황은 균이 오히려 반긴 것으로 이 경향은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이로서 사림들이 주장한 향약은 완전히 소멸되었으며 서양 야금술도 도입되어 이전에 채굴에 문제가 있었던 광산들이 다시 문을 열기 시작해 수출대금 지불에 문제가 없게 되었다.
또한 조선 연합상단 잉글랜드 지부장도 이제 개신교 신자가 되어 귀국한 최미연대신 안지연으로 바뀌었으며, 사쓰마 지부장도 오래 유지한 김석현이 물러나고 다른 사람이 앉았다. 하지만 유럽에도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조선의 상품이 중국 상품과 경쟁하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으며, 특히 서화는 바로크 미술이 중심이 되던 유럽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켜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원래 역사에서는 임진왜란후 일본 자기가 유럽에 수출되어 정체되고 두 차례의 전쟁 후 여력을 잃어버린 중국과 조선 자기에 비해 유럽 자기에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왜란 후의 일본 서화가 유럽 미술의 후기 인상파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에 비하면 상당한 변화가 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균은 자신의 전생 기억들을 적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는 선조의 나이를 감안하면 자신 사후의 세대들을 위해 무언가 지침을 남겨야 했고 이지함도 이미 은퇴해 1578년에 토정비결을 마무리짓고 사망했다. 이에 균도 슬퍼했지만 토정비결의 대량인쇄를 명하고 원래 역사대로 이조판서에 추증했다.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마침내 추밀원이 재개편되어 명실상부한 잉글랜드의 대외정보기구로 바뀌었으며 추밀원장으로 국무장관인 프란시스 윌싱햄이 취임해, 당대의 유명한 극작가였던 크리스토퍼 말로를 영입하고 옥스퍼드와 캐임브리지 대학생들을 첩보원으로 키우는등 메리 스튜어트와 다가올 에스파니아와의 전쟁에 대비한 노력을 하고있었다.
1580년 봄 어느 날.
경복궁, 취로전.
크리스와 균이 최근 정세로 대화중이었다.
"...명의 내각수보가 너무 나가는 것같습니다. 이쯤에서 슬슬 제어하는 것이 낫지않을까요?"
"...장거정의 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요. 부장."
"그렇습니다. 현재 장거정 주변에 배치한 저희 사람에 따르면 고성법으로 인한 피해가 늘어나고있다고 합니다."
장거정은 정권을 잡자마자 행정개혁으로 관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만력 원년(1573년)부터 고성법(考成法)을 실시했다. 관료가 상주하여 황제의 재가를 얻은 사안은 반드시 해결되도록 하여 일의 완급(緩急), 거리의 원근(遠近)에 따라 기한을 정하여 그 집행여부를 책으로 만들어 매달 보고하고 매해 총결(總結)을 지어, 지연되거나 보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조사하여 책임추궁을 행하고 관료의 근무평가에 이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고성법의 실시에서 지방의 무안관(撫按官)이 지체하면 부원(部院)에서 적발하고, 부원에서 기폐하면 육과가 들추어내고, 육과에서 숨기면 각신이 들추어내도록 함으로써 관료에 대한 고찰이 직접 내각에 맡겨지게 되었다. 즉 종래 법제상으로는 아무런 통속관계를 갖지 않았던 내각이 관료체계의 정점에 위치하게 되고, 수보의 권한은 법제적으로 보장받고 모든 관료를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언관은 고성법에 걸릴까 두려워 비판을 자제하게 되었다. 또한 장거정은 재야 사인층의 정치비판을 금지하기 위해 만력 7년인 1580년, 그 결합의 장이 되고 있는 서원도 폐쇄, 탄압하기 시작했다.
또한 불필요한 관서운영은 유보되어, 정부장학생이 감소되고 지방관은 역(役)의 지출을 1/3로 절감해야 했으며 우역(郵驛)의 마필공급도 최소로 축소되고 변경수비군은 1/5을 감소하여 군둔(軍屯)노동력을 증대시키는 등의 긴축재정이 시행되었다.
재무행정상으로는 지방관으로 하여금 관할지역의 세입, 세출, 존류(存留), 기운(起運), 체납상황(滯納狀況)등을 기록한 주소책(奏銷冊)을 매년 호부에 보고하여 감사를 받게 하고 세역수취성적을 고과에 반영시켰다.
호부에서도 각 성별로 재정을 관리하던 체계를 전량(錢糧), 염과(鹽課), 과세(關稅) 등의 항목별로 관할을 통일하는 체계로 고쳐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였고 당시 대토지 집적과 은전(隱田)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균형있는 세역징수를 위하여 그 기초가 되는 장량(丈量)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과세대상을 바로잡고 이에 근거하여 일조편법(一條鞭法)이란 세역징수개혁을 실시했다.
그리고 명 관료들을 화나게 하는 사실 하나가 더 있는데 그가 친조선파라는 것으로 조선을 위한 정책을 대거 입안해 승인했다는 것이었다.
"...명과 왜에 요원들이 얼마나 많이 있소?"
"장거정에게 3명, 만력제에게 7명, 그리고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에게 각각 8명씩입니다.
위치가 어디까지인지는 밝힐 수 없지만 장거정에 대해서는 말을 돌리시는군요."
"^^ 내게도 생각한 바가 있기 때문이오. 왜는 어떻소."
"왜의 움직임은 아직까지 변화가 없습니다. 의외로 시마즈가 큐슈를 빨리 통일해버린 것을 제외하면..."
시마즈는 히젠의 류조지와 휴가의 오토모 가家를 멸망시키고 나자 균의 예상보다 빠르게 큐슈 내의 히고, 치쿠고, 분고, 부젠, 치쿠젠의 영주들을 굴복시키고 마침내 큐슈를 통일시켜버렸다.
처음에는 남 큐슈를 통일해 혼슈로 건너가겠다고 허풍을 떤 적도 있었지만 균의 경고를 받고 바로 접어버렸고, 힘을 축적해 결국은 큐슈를 통일시켜버린 것이었고 이로서 큐슈는 시마즈 가家의 완전 통제에 들어가게 되었고 시마즈와의 협상으로 통해 조선은 큐슈에 대한 몇몇 이권을 얻었다.
"하지만 조만간 왜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오. 계속 주시하는 것이 낫겠지.
그들도 비금도 소총을 복제했을테니까 말이오."
"...그건 그렇습니다만 너무 쉽게 말하시는군요."
"부장에게는 그렇게 보이는가요? 부장이 여기 온지 몇년이나 되었소?"
"1570년이니 거의 10년입니다."
"...제법 되었구료. 내가 약속하리다. 큰 일이 몇번있을터인데 그 일이 끝나면 반드시 고국으로 돌려보내겠소. 그리고 부장 아버님의 일은 정말 유감이오."
"...감사하옵니다. 전하." 약간 슬픔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크리스였다.
균이 크리스에게 한 이 약속은 지켜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