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군주(還生君主)- 2nd Story
45화. Interude(4)
20XX년 7월 20일.
선조의 발자취를 담임 선생님의 안내와 함께 따라가는 이들 고교생들의 여행은 이제 제국 종합 외국어 학교로 이름을 바꾼 사역원과 서학원 내 박물관에 있었다. 박물관 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전시된 번역서와 원서들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선조 선열제님의 업적은 그동안 문약에 빠진 조선을 다시 일으킨 것에 있지요. 그 분은 우리나라의 기본 정신은 문약이 아니라 무강에 있다고 여러번 대신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군사 정책은 조선 초 태종과 세조의 정책에 기반을 두면서 그 이상으로 멀리 나간 것에 있지요. 그것이 결국 1568-9년에 일어난 무진삼란과 1583년에 일어난 임오의 난에서 확실히 드러나지요. 여러분도 국립 박물관에서 봤겠지만 북한산 조총의 위력이 실제 드러난 것이 임오의 난부터랍니다."
선생님의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자 바로 학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데 무엇때문에 명의 만력제는 조선에 대해 전쟁을 벌일 결심을 한 것일까요?"
"장거정 시대에 어느 정도 명은 회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만력제가 장거정 사망시에 20세였지요.
혈기넘치는 자로서는 정거정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거라 생각되요. 그래서 무리는 있더라도 조선에 대해 한번 위신을 세워보고 싶어한 것이라 볼수있지요. 하지만 그것이 되려 회복중인 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이지요."
"전쟁말고 다른 방법도 있을텐데요..."
"당시 명은 장거정이 북원과 화평을 한터라 문제는 없었고, 무진삼란이후 여진은 조선대신 명쪽을 많이 침공했지요. 그것이 어느 정도 신경에 거슬렸다고 할 수 있지요. 게다가 융경제가 도교에 집착했다면 만력제는 재물에 집착했다고 하지요. 또한 조선은 개국 초부터 여진에 대해 당근과 채찍을 쓴 반면 중국은 그 반대인 이이제이를 사용했으니까요."
"하지만 조선은 명과 왜의 움직임에 대해 상당히 포착하고 있지않았나요?"
"그렇지요. 선열제님의 두 눈인 왕실 정보부와 의금부 그리고 비천이 명과 왜에 대해 눈을 떼지않았으며 내부에 대해서도 주시하고 있었지요. 태종과 세조때 공신 문제가 일어났지만 선조 시대에 공신 문제가 일어나지 않은 것도 그 이유지요. 물론 그들이 평민 출신으로 선조를 도와 재상이 된 것도 있지만 기록에 남은 그들의 증언으로 볼때, 그들도 은근히 선조를 두려워한 것으로 알아요."
"왜 두려워했나요?"
"선조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능력, 정보력을 경험을 통해 알고있었기 때문이지요. 평민이었던 그들은 선조를 도와 상단을 세우고 마침내 내각을 총괄하는 재상까지 되었기에 자신들의 처지를 알고있을 뿐 아니라 선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있었기 때문이지요."
선생님의 설명에 질문을 한 그 학생은 납득한 것처럼 보였다.
"만력제도 조선의 변화를 알고있었을텐데요?" 다른 학생의 질문.
"지금은 분열되어있지만 한족의 중화사상은 대단하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중원의 패자라 자처하며 자신들의 문화문명이 최고이고 다른 지역의 문화를 깔보는 경향이 짙지요. 그 중화사상때문에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급격히 발전하는 중인 조선을 깔본 것이겠지요."
"하지만 서학원이 인정되기에는 시간이 걸린 줄로 아는데요."
"네, 그래요.
물론 선조의 명으로 사역원 내에서 영학원으로 출발해 서학원으로 확장되었고 당대의 많은 서양 서적들을 한글로 번역했지만 일부 양반들이 받아들이질 않았지요. 하지만 평민, 중인들은 의외로 번역된 서양 서적들을 읽고 바깥 세계에 대해 눈을 뜬 줄 알아요. 그리고 그들은 선조가 마련하신 상업화, 개편된 과거 제도와 함께 조선을 바꾸게 되지요."
"...그리고 임오의 난에서 조선이 이길수 있는 동력이 되고요." 어느 학생의 말.
"그렇죠.
명은 임오의 난에 있어서 과거 수, 당이 고구려를 칠때와 거의 같은 루트로 쳐들어오지요.
비록 압록강을 도강했지만 워낙 대군이기에 집결에 시간이 걸렸고, 오합지졸이 대부분이었지요.
그 틈을 노려 조선의 선전포고와 반격이 시작되고 선조께서 마련한 신무기들이 이때를 통해 나타나지요.
또한 명의 수군이 조선으로 상륙하려고 했지만 미리 대기한 조선 수군이 되려 급습하지요. 초대 수군청장 이순신이 활약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고 육상에서는 선조의 부마사위인 곽재우와 정여립등이 활약하고요."
"이들이 나중에 또 활약하지요."
"그래요. 임오의 난이후에도 이들은 선조의 군사적 부문의 양 팔로 활동하고 광호제/광무제 시대에도 원로로서 활약하지요."
"그래도 이들은 처음에 미 서부 식민지 건설에 대해 반대한 줄 아는데요?"
"그건 사실이에요. 처음에 이들은 식민지 건설에 대해 반대했지만 이후에 납득한 줄로 알지요.
이들 원로들은 식민지 건설을 에너지 낭비로 생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선조 사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개칭하고 중국으로 진출해 청을 세운 여진에게서 동북 3성을 확득한 터라 그것으로도 제국에게 벅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임오의 난은 그렇게 길지않았어요."
"그건 비록 장거정의 개혁으로 어느 정도 힘을 비축했지만 내정을 제대로 정리하지않고 국경분쟁을 빌미로 조선에 쳐들어갔기에 그렇지요. 명의 황제권은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임오의 난 이후지요. 여진뿐 아니라 베트남, 티벳에게까지 얕보이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지요."
임오의 난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펑- 펑- 쿠쿵-!!!
화포들이 붉은 불을 뿜고 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현재 벽동에서 명군에 대한 집중포격이 시작되었고, 그 기세에 명군은 진군을 못할 정도였다.
"으으... 망할 조선놈들. 언제 저런 대포를 만들었단 말인가..."
"보급부대와 후속부대를 기다린 것이 실수였습니다. 진작에 진군했어야하는데..."
부관의 말에 장군은 이를 갈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이들은 조선군의 상상을 초월한 포격의 집중도에 전진을 못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압록강을 도강해 벽동에 도달했는데... 의외로 단단해보이는 성벽때문에 주저한 것이 실수였다.
한편 벽동에서는...
"쉴 틈을 주지말고 쏴라. 그리고 다른 명군의 움직임은?"
"아직 없습니다."
"그럼 시작하기로 하지. 저들에게 슬슬 악몽을 보여주세."
"네. 장군."
곽재우의 지시에 바로 병사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의 조선 병사들은 균의 개혁을 통해 군관복 안에 비단을 여러 겹 겹쳐만든 방탄조끼를 입고있어 평안도, 함경도같은 추운 곳에서는 보온이 될 뿐 아니라 현대의 케블러 방탄조끼와 맞먹는 강도의 단단함으로 명군의 총탄을 막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