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군주(還生君主)- 2nd Story
46화. 임오(壬午)의 난(3): 초전.
개전직후 어느 밤, 발해만 어느 곳.
이전 고구려의 수군기지였던 장해열도에서는 수군청장 이순신의 명에 따라 일단의 조선 수군 선단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전 4군 6진의 수복후, 균은 공들여 이전 고구려의 수군기지였던 장해열도 기지를 수리해 수군 기지로 완전히 바꾸었고 이것이 이번 전쟁에서 훌륭히 사용되고 있었다.
조선 시대의 함들은 다음과 같다.
맹선(猛船)은 상당 기간에 걸쳐서 이름이 바뀌었는데 당시의 조운선 역할도 겸하고 있기에 그랬을 것이다.
이 맹선은 크기에 따라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으로 구분되었는데 각각의 승선인원은 80명, 60명, 30명으로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 수군은 대맹선 81척, 중맹선 195척, 소맹선 461척등 총 737척의 전함을 갖추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배는 선체를 나무못으로 연결하고 구조는 좌우폭이 넒고 배 밑이 편편한 구조였으나 무겁고 느리고 배 밑판이 빨리 부식되는 문제가 있었다.
검선(劍船)은 참과 칼을 뱃전에 꽂아 적이 배 위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만든 전투함으로 고려 시대의 과선(戈船)의 적통 후계선이다. 승선 인원은 15명.
비거도(鼻居刀)는 태종 3년에 왜선을 추격하기 위해 건조된 배로 이들은 작고 빠른 배를 통칭하는 말이다.
병선 크기에 따라 대형 비거도선이나 통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것까지 다양하며 세종 12년이후 전목 비거도선은 배 위에 싣고 다니기도 했다.
판옥선(板屋船)은 을묘왜변이후 명종 10년에 맹선을 대신해 새로이 건조된 전함으로 소나무로 제작되고 평저선으로 수심이 낮은 서해안에서도 운용하기 편하며 승선 인원은 150- 200명, 길이는 30m 내외로 돛은 삼승포나 왕골자리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이런 판옥선도 무게 중심이 높아 바람을 만나면 제어하기 어려웠다는 문제점이 제기되 왜란 이후 영조 11년 윤필순의 상소에 의해 방패는 착탈식으로 고치고, 뱃머리에 곡목을 달게된다.
거북선(龜船)은 이미 태종 15년에 이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것은 판옥선의 상부에 상갑판을 둥글게 변형해 씌우고 그 위에 송곳과 칼날등을 박아 적군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개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대용에 따르면 거북선의 사수와 격군은 125명이고 통영군지에는 277명이 승선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방선은 방패선(防牌船)이라고도 불리우며 판옥선의 보조함으로 건조되었는데 양현에 높은 방패를 달아 적이 기어오르지못하게 했으며 무기는 소구경 화포를 썼다.
병선(兵船)은 조선 전기에는 모든 전함을 통칭했으나 후기에 와서는 방선보다 한 급 낮은 함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통영군지에 따르면 정원은 36명으로 화기를 장비하고 빠른 속도를 이용해 적함을 포착하는 정찰선의 역할이었다.
사후선(伺候船)은 4명이 정원으로 수송과 연락, 정찰 용도로 쓰인 소형 선박이다.
창선(槍船)은 이순신 휘하 군관이었던 나대용이 선조 39년에 창안한 전함으로 거북선보다 작으면서 칼과 창을 빽빽히 꽂은 함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속도가 나는 듯햇고 활쏘기도 판옥선 이상이었다고 전한다.
해골선(海?船)은 영조 16년 전라좌수사 전운상이 만든 것으로 배의 속도가 송골매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서학과 함께 들어온 서양의 조선 기술은 그때까지 연안 항해외에 기능을 못하던 조선의 전투선들을 대양항해도 가능하게 바꾸었을뿐 아니라 외관도 조선이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조선 기술과 어느 정도 융합해 대형선의 외관은 상당부분 서양 범선에 가깝게 변형되어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에도 견뎌낼 수 있는 내구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시작인가..."
기함 브릿지에서 한숨쉬듯 말하는 이순신이었다.
이미 작전은 다 짜져있고 실행이 남은 상태였지만 자신이 청장이 된 이후 훈련은 많이 해봤지만 처음 해보는 실전이기에 긴장이 되어있었다.
"걱정마십시오. 청장님.
벽동에서의 소식은 아직까지 좋은 소식입니다. 곽재우 장군과 정여립 장군이 잘해주고 있고, 곧 한성에서 원군이 올 것입니다."
"그렇겠지.
자, 그럼 우리도 우리 일을 시작하기로 하지. 명의 만력제가 두 번 다시 조선을 침공할 꿈을 꾸지못하도록 하고... 옛 땅을 회복하는 걸세. 태조대왕님이 생각하신 일을 말일세."
이순신이 말한 태조의 일이란 조선 초 명의 홍무제 주원장과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
조선 초 태조의 시기는 원이 북으로 철수하고 명이 개국한 시기와 일치하는데, 홍무제 주원장은 사은사로 온 정도전이 산해위를 지나면서 한 말을 시작으로 조선과 대립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여진 및 북원과의 관계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심각해졌는데 태조 5년인 1396년 3월 29일에는 홍무제가 표전문을 트집잡아 장총등을 억류하는등으로 인해 결국 태조와 장도전은 요동 정벌을 굳히게 되어 준비에 들어가지만 1차 왕자의 난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그렇습니다.
현재 경상 좌수 전대는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해역을 순찰중이며, 경상 우수 전대와 전라 우수 전대는 남해안을 순찰하며 왜인의 행동을 보고있습니다."
수군청이 창설되고 균의 명으로 그때까지의 통제사 제도는 개편되어 수군청장을 중심으로 통제지역은 이전의 통제사때와 거의 차이없지만 함대 개념이 도입되어 우리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각 함대 내의 유기적 행동과 작전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무자총통을 비롯한 대형 화포의 탑재와 그동안 개량된 북한산 소총수들, 그리고 이전부터 유지된 사수들때문에 화력은 이전에 비해 상당히 상승된 상태였다.
명이 대군을 소집하는 동안 조선의 육군과 수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야말로 명의 악몽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1583년 6월 10일.
명의 수도 베이징.
자금성의 삼대전에서는 만력제의 노발대발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본토에서 준비하는 사이에 압록강을 도강해 조선으로 쳐들어간 육군은 벽동에서 풍지박산이 났고. 칭다오와 항저우등에서 준비하던 상륙군은 갑작스런 조선 수군의 기습에 제대로 반격해보지못하고 무너지고 말아 명의 작전수행에 큰 차질을 주고 있었다.
"...도대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우리 명의 대군이 그런 작은 성 하나 뚫지못하고 그대로 무너지다니... 게다가 수군도 그렇소. 말을 해보시오!!!"
"그것은 조선군의 힘을 제대로 예측못한 동창의 실수이기도 합니다."
"이것 보시오. 이부상서. 동창은 지금 황제의 즉위 후 힘이 약해져있소.
동창에 책임을 전가하지마시오."
유양호의 뻔뻔스런 말에 신시행은 기가 질리면서도 수보로서 말은 하고 있었다.
만력제 즉위때 그는 만력제로부터 책난진선(責難陳善)이라는 글을 받고 그가 원하는 만력의 치(萬歷之治)를 이루기 위해 일을 시작하려는 찰나, 이부상서 유양호에게 기선을 뺏기고, 게다가 국경분쟁에서 시작된 이번 전쟁을 명에게 있어 최소한의 피해로 막으려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러는 사이에 그 교만한 조선군들은 힘을 축적해 베이징으로 몰려올지도 모릅니다. 그전에 대군으로 밀어야합니다. 수군도 다시 재편에서 조선에 상륙해야합니다."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해봤소. 이부상서.
우리 명이전의 수, 당뿐 아니라 몽골도 조선 이전 왕조에게서 혼난 적이 있소. 조선인들은 강하오. 이쯤에서 물러나도록 합시다."
이부상서와 수보의 말싸움에 다른 대신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있었다.
하지만 이부상서 유양호는 수보 신시행과 말싸움중에 이런 말로 만력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조선 왕이 보내온 건방진 선전포고문을 보셨습니까?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