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군주(還生君主)- 2nd Story
53화. Interude(5)
20XX년 7월 20일.
제국 종합 외국어 학교, 박물관 밖 온실.
선조 선열제의 흔적을 따라가는 이들 고등학교 어느 반 학생들의 여행은 이제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고, 선생님의 설명은 계속되었지만 박물관의 유물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섞여 잘 안들렸지만 어느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제국 이전의 조선 시대에도 온실이 있었지요. 그게 이것이랍니다."
이들 선생님이 말하는 뒤에는 현재의 비닐 하우스와 조선 시대의 온실이 놓여져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온실이 있었나요?" 어느 학생의 질문.
"왕조실록에도 몇번 나오지만 꽃은 제 계절에 피워야한다는 유교 논리에 따라 그렇게 상업화되지않았지요. 농가가 온실을 통해 겨울에도 꽃을 피우고 식물을 재배하게 된 것은 역시 선조 선열제 시대지요. 선조 시대에 도로가 놓아지면서 그때까지 농업 사회였던 조선 사회가 상공업 사회로 변화되고, 마침내 명과의 국경분쟁으로 야기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요동도와 남서도라는 새로운 영토를 얻게된 것도 영향이 컷지요."
조선 시대의 온실은 현재의 조사에 의하면 세종때부터 세조까지 4대동안 어의로 활동했고 의방유취의 저술에도 활동했던 전순의(全循義)의 산가요록(山家要錄) 뒤의 동절양채(冬節養寀), 즉 겨울에 채소를 기르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안에 온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조선 온실의 건축은 건물의 크기를 형편에 따라 정한 다음에 3면에 벽을 쌓는데 황토와 볏짚을 섞어 만든 벽돌로 벽을 쌓고 화강암으로 구들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구들장 위에 흙을 45cm 높이로 쌓은 후 아궁이에서 바깥쪽으로 15도 경사를 지게 바닥을 파고 받침돌을 놓은 후, 흙으로 빈틈을 메웠다. 아궁이에 가마솥을 걸고 솥뚜껑에 구멍을 내 온실 내로 들어가는 나무관에 하고 온실 창에 기름 종이를 바르면 완성된다.
서양의 온실이 1600년대에 등장하는 것에 비하면 약 300년이 빠르다.
"그리고 임오의 난이후 마침내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개칭하지요.
1584년 3월 10일, 경복궁에서 선조께서는 황제즉위식을 올리고 종묘에 제를 올린 것으로 나와있어요. 명은 임오의 난에서 패배한 후, 반란과 내란으로 10여년을 소비하기에 조선이 그들의 제후국이 아닌 독립국가로 선언해도 손을 쓸 수 없었지요. 그렇게 시작한 명의 내란은 1595년이 되야 끝나지만 이미 황제권은 약화될대로 약화되고 중앙의 명도 잘 전달이 안되었지요.
만력제는 재물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임오의 난도 발전하는 조선의 재물을 노리고 국경분쟁을 일으킨 것이라고 하지요. 그도 원래 영명한 사람이었지만 관료들의 말을 잘 따른 것도 있었고, 임오의 난이후 자신의 재물욕심을 줄이고 명을 일으켜 세우려 하지만 완고한 한족 관료들때문에 실패하지요. 그때문에 명이 완전히 쇠퇴하고 여진의 누르하치가 통일하는 틈을 만들어주지요."
"...일본은요?"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혼슈는 통일되지만 큐슈는 시마즈에 의해 통일되었고, 조선 상인들이 큐슈뿐 아니라 혼슈에도 서서히 진출중이었지요. 토요토미는 큐슈를 침공하려고 했지만 방어가 워낙 단단한데다, 시마즈 일족들이 그것을 제국에 알렸기에 제국이 토요토미를 주시하게 되었지요. 이에 토요토미는 당시 대마도주인 소 요시토모를 통해 사카이 상인이었던 시마이 소시츠와 코니시 카츠유키를 보내 제국의 상태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되려 비천에 의해 탐지되어 그 둘은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제궁에 들어가 선열제와 후궁인 시마즈 유메를 만났다고 전해지지요.
이미 제국은 요동도와 남서도를 바탕으로 서양 무역을 독점중이기에 그 부가 쌓이고 있었고, 그것을 보고 두 사람은 놀랐다고 전해지지요."
"토요토미가 그것을 보고 탐내지않았을까요?" 다른 학생의 또 다른 질문.
"당시 토요토미는 아들 츠루마츠가 3세로 사망했기에 그 충격으로 변해있을지도 모르고,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는데다, 서양 무역을 독점중인 제국의 부가 탐났을지도 모르지요."
"제국을 보고 온 두 사람의 보고로 제국이 만만치않다는 것을 알고있었을텐데요???"
"그렇지요. 게다가 요동도는 제국의 다키아같은 곳이었고, 남서도는 중요한 서방 무역 창구였기에 그곳에 대한 방비도 대단했지요. 분노한 토요토미는 대신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조선 병역을 발동하고 이즈모에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하지요. 이미 그에 대한 사항은 비천이 상당수 파악했는데 말이에요."
"...엄청난 무리수를 두었군요..."
"당시 사카이 상인들은 교역을 통해 어느 정도 깨인 사람들이었기에 일본 통일을 위해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를 지원한 흔적이 있지요. 그런 그들마저 제국을 상대로 무리한 전쟁을 벌이려는 자신을 막으려하니 토요토미로서는 강하게 밀고나갈 수 밖에 없었겠지요."
"이 시기에 잉글랜드도 스페인을 물리치지요."
"그래요.
1585년에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 대사가 보는 앞에서 프란시스 드레이크를 25척 함대의 제독으로 임명하고, 그 다음해에 펠리페 2세는 보복 계획을 개시하지만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로부터 전권 위임을 받았지요. 물론 여왕의 목숨을 노리는 베빙턴 사건이 일어나지만 추밀원이 막아내고 이를 통해 추밀원은 성장할 기반을 다지지요.
1587년 2월 8일에 마침내 메리 스튜어트는 추밀원의 함정에 걸려 재판을 받고 처형되지요.
잉글랜드로서는 스페인과 전쟁 전에 위험 요소를 제거한 것이었고, 결국 스페인은 이 소식과 드레이크의 30척 함대가 카디스 공략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적함대를 준비하지요.
당시 무적 함대 아르마다는 127척, 해군 8,000명, 육군 19,000명, 대포 2,000문과 함께 사령관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었지요. 그는 해군에 익숙하지않았다고 해요.
1588년 5월 28일에 무적함대는 리스본에서 출항해 파르마의 육군 18,000명과 합류하기 위해 출발하지만 그 해 7월의 잉글랜드 해협 해전으로 결말이 나지요.
당시 영국함대는 하워드 경을 사령관으로 프란시스 드레이크와 존 호킨스를 부관으로 해 전함 80척, 병력 8,000명이었지만 조선에서 받은, 서양식으로 개조된 총통과 그들이 새로이 개발된 대포의 힘, 그리고 기상의 도움도 받아 무적함대를 격파하지요. 그리고 플리머스 공방전, 8월 7일의 칼레 공방전에서도 승리함으로서 제해권을 스페인에서 뺏는데 성공하지요.
무적함대는 54척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해요.
당시에 프랑스는 앙리 3세의 암살이후 앙리 4세가 즉위하고 정적들을 하나씩 처리하는 한편 1593년에 파리에서 삼부회를 개최해 내란으로 무너진 프랑스를 일으켜 세우는 중이었고 미국 동부에서는 스페인인, 영국인, 프랑스인들이 개척하는 중이었지요."
"그리고 어느 때에 잉글랜드와 제국이 친선 조약을 맺는 것으로 아는데요?"
"그것이 1600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을때 맺어진 것으로 알아요. 그때까지 우호조약은 가조약된 상태에서 잉글랜드는 스페인과의 닥쳐올 전쟁이 있었고, 제국도 임오의 난이후 이제 왜와 대결을 두고있었기에 서로가 가조약된 우호조약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잉글랜드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국도 왜를 완벽하게 영향권 안에 두게되자 안심하고 친선 우호조약을 정식으로 맺게되지요. 이후 유럽 국가들과도 하나씩 조약을 맺게되고 대사관을 상호설치하지요."
"양반계급이 사실상 무너진 상태니 반대는 없었겠군요."
"선열제의 화폐개혁으로 양반계급은 사실상 이름뿐이고 시대 흐름을 타 상업으로 일어난 일부 소수 양반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양반들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와 함께 중인들이 제국의 새로운 계층으로 성장해 제국을 이끌고 나갔지요. 또한 선열제의 개혁으로 평민들이 진출하기 시작하지요. 당시 선열제의 내각이 평민출신들이었기에 실력에 있어서 문제가 아니었지요."
"선열제 다음인 광호제도 대단하신 분으로 알고있어요."
"광호제 또는 광무제의 옛 이름인 광해군은 임진란의 실적을 바탕으로 선열제의 눈에 들게된 분이지요. 비록 2남이었지만 그로 인해 임진란 후에 황세자로 책봉되요. 그전까지 황세자는 없었고요."
"광무제께서는 형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영창군 의가 있었지만 그는 광해군과 달리 문예에 능숙하고 군무에는 별로 능하지못했던 것으로 알고있어요. 그에 반해 광해군은 문과 무에 통달하고 엄청난 교육도 받아내었지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지켜보던 선열제에 의해 임진란이후 황태자로 발탁되었던 것으로 알아요."
이들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제국 종합 외국어 학교 박물관을 떠났다. 여름방학이후 이들의 다음 여행지는 제국 황실의 개인영지나 마찬가지인 비금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