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 방현으로
표사들이 합류하자 상단에 소속된 하인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방현까지는 매우 멀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단주가 재촉하고 나서자 하인들은 마치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상단에서 이번에 취급하는 물품은 농산물과 광석 그리고 삼베였다. 다행이 주의해야 할 물건이 없었기에 상단은 매우 빠르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장수가 탈 것은 마차였다. 석가장이 위세처럼 매우 호사스러운 육두마차였다.
마차에는 장수 외에도 단주와 표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올라탔다.
단주는 장수를 보며 말했다.
"소장주님. 출발을 할까요?"
단주이 말에 장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단주는 손짓을 했고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마차가 열 수레였고, 호위하는 무사 수만 오십 명이었다. 스무 명은 석가장 직속 무사였고, 서른 명은 표사들이였다. 이정도 크기라면 웬만한 산적은 접근조차 하지 못할 위세였다.
마차에 안자마자 표두가 장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소장주님."
장수는 표두와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이제 곧 만날 수 있는 유운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그를 만나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소장주님!"
표두의 말에 장수는 정신을 차렸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표두와 대화를 해야만 했다. 석가장에서도 표국과의 인연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장수의 말에 표두는 웃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표두의 말에 장수는 귀찮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옛 기억을 생각해 보았을 뿐입니다."
"옛 기억이요? 실례지만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장수는 자신이 말을 실수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겨우 15살인데 옛 기억을 생각했다는 게 웃겼던 것이다.
'말을 조심해야겠구나.'
"제 나이는 올해 15살입니다."
"15살이십니까?"
표두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장수의 몸은 뚱뚱했기에 원래의 나이보다 더 들어보였다.
"그렇습니다."
"그, 그렇군요."
장수의 진지한 표정을 보자 표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돼지는 진짜 너무 뚱뚱하구나.'
장수는 표두의 얼굴만 보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휴. 지금 이 모습을 그가 본다면 뭐라고 말할지 한심하구나.'
"체격이 좋고 얼굴이 진중하셔서 나이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예.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표두는 장수와 단주의 표정이 냉랭해 보이자 안색을 굳혔다. 큰 거래처였기에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표두는 이어서 좋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단주가 말려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장수는 무당파의 일 때문에 정신을 빼앗겼고, 단주는 앞으로의 계획을 짜는데 집중했다. 그랬기에 표두 혼자서 뻘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표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활발한 무인이었다. 때문에 이 어색한 공기가 너무 싫었다. 마차에 탄 것도 소장주와 단주와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탄 것이었다.
"이제 표사들을 관리해야 할 시간이 된 거 같습니다."
표두는 말을 하고서 곧바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사방을 경계하는 표사들에게 으름장을 넣었다.
"똑바로 하란 말이야."
표사들은 표두의 반응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즉각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표두님."
장수는 마차 안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단주는 단주 나름대로 서류를 보며 물품에 문제가 없는지를 확인했다. 이번 거래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그가 해야 할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장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묘한 분위기를 눈치 챌 수 있었다.
보통의 상단에서는 표국의 표사들이 상단의 물건을 지킨다. 하지만 이번에는 석가장의 소장주가 있었기 때문에 석가장의 무사들이 대거 참여한 상황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무사들과 표사들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숫자도 비슷했고 장수가 봤을 때 그들의 무공수위도 비슷해 보였다.원래라면 서로 간에 양보를 해야만 했다.
한쪽은 석가장의 무사였고, 한쪽은 표국의 표사들이였다. 어떻게 보면 서로 협력자이자 도움을 줘야 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석가장의 무사들은 소장주를 모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열심이었고, 표국의 표사들은 그런 모습을 보니 쓸데없이 경쟁심이 일어 난 것이다.
장수는 그 모습을 재밌다고 생각해 미소를 지었다.
한참을 가다 마차가 멈추었다.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상행은 특별히 요리사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가져온 건조식품이나 건량을 물에 풀어먹는 것으로 식사를 때워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의 상행은 요리사가 있었다. 석가장의 소장주가 합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원의 요리사가 합류한 것이다.
사실 아무리 소장주가 있다고 해도, 요리사가 동행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것은 소장주를 생각하는 장주의 배려였다. 석장수의 아버지는 석장수의 살이 빠지는 것을 염려한 탓이다.
석장수로서는 그런 아버지의 배려가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으로 느껴졌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말에 토를 달기도 뭐해서 결국 요리사와 동행해 버렸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요리사가 동행했고, 그 요리사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곧바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요리사에게 집중되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잠시 후 요리사가 만든 음식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했다.
반나절을 힘들게 걸어온 무리였다. 냄새를 맡자마자 입에 물고 있던 건량을 먹기가 싫어졌다.
요리사는 음식이 완성되자 그것을 들고 마차로 가져갔다.
식재료, 도구가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동안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 그것을 보면 요리사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표두는 헛기침을 하더니 급하게 소장주가 있는 마차로 들어갔다. 음식을 같이 먹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남은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요리사가 만든 음식 중 남은 것을 서로 먹고 싶어서였다.원래 음식을 하고 남은 것은 골고루 나누어 준다. 하지만 지금은 인원이 너무 많았다. 나누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은 음식에 먼저 손을 덴 사람들은 석가장의 무사들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남은 음식은 당연히 자신들께 맞았다. 그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자 표사들이 나섰다.
"우리도 같이 먹었으면 합니다."
표사는 말을 하면서 남은 음식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무사들이 인상을 썼다.
"음식이 양이 부족합니다."
자신들끼리 한입씩 돌아가며 먹어도 부족한 양이었다. 거기에 표사들까지 합류하면 먹을 양이 많이 부족해진다.
말릴 사람은 단주와 표두였지만 둘 다 마차 안에 있어서 사태를 짐작하지 못했다. 보조요리사 만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러나 있을 뿐이었다.
"음식 가지고 치사하게 그러지 맙시다. 다 같이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닙니까?"
제법 덩치가 좋은 표사가 말을 하자 무사들도 인상을 썼다.
이미 음식 냄새 때문에 예민해 진 상태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건들기만 해도 주먹이 날아갈 상황이었다.
"이거, 먹는 거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맙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음식은 뒷전이었다. 이들은 단순하게 주먹을 쓰고 싶을 뿐이었다.
"내말이 그 말이요. 그거 좀 덜 먹는다고 죽는 건 아니지 않소?"
표사는 말을 하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둘은 어깨를 펴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무사들과 표사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그들을 응원했다. 장수 역시 그런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사실 싸우는 것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퍽!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표사의 주먹이 무사의 얼굴을 강타한 것이다. 그와 함께 무사의 주먹이 표사의 복부를 강하게 쳤다.
주먹이 본격적으로 오고 가자 응원하던 무사들과 표사들도 기세가 올랐다. 그러자 그들은 응원을 관두고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집단으로 난투극이 벌어진 것이다.
싸움은 계속 될 것 같았지만 이외로 빨리 끝났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표두와 단주가 나와 싸움을 말렸던 것이다.표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표사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너희들이 한량이냐? 표사냐? 표물을 운송하는 녀석들이 같이 일하는 무사들과 주먹 다툼을 해?"
표두의 말에 표사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표사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에 시퍼렇게 멍자국이 선명했다.
"더구나 맞기까지 해? 표국으로 돌아가면 보자. 내가 아주 정신 교육을 제대로 시켜 주마."
표두가 이를 갈며 말하자 표사들은 두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대편에서 단주가 호통을 치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물건을 지키라고 했지, 표사들과 싸움을 하라고 했나?"
"하지만 저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시끄럽다. 너희들 앞으로 6개월간 월급이 감봉될 줄 알아라."
말을 하면서 단주는 주판을 튕기고 있었다. 오늘 싸움으로 무사들의 봉급을 감봉시켜야 했기 때문이다.장수는 실로 오랜만에 싸우는 장면을 보았다. 그래서 인지 느끼는 감정이 특별했다.
'정말 피가 끊는구나.'
그는 지금은 석가장의 소장주였지만 어찌되었던 무인이었다. 때문에 방금 전 난투극 때 피가 끊어 올라 뛰어 들어 자신도 한바탕 싸움을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