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편 - 방현의 사정
혈교에 지급으로 암호문이 도착했다. 암호문은 곧바로 혈교의 장로 철갑마(鐵甲魔)에게 전달되어졌다.
철갑마는 혈교에서 자랑하는 초절정고수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혈교가 자랑하는 무력 단체인 철갑마랑대의 대주이기도 했는데, 키가 크고 몸이 날렵했다. 경공으로는 혈교 제일이었고, 천하에서도 열 번째 안에 드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혈교가 대업을 이루기 위한 계획들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암호문은 그 중에서 비중 있는 임무 중에 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는 암호문을 읽더니 안색이 굳어졌다.
"젠장! 일이 이렇게 되다니……."
암호문에는 장수의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일악이 맡고 있던 임무는 무당파를 고사지내는 임무였다. 비록 십여 명의 절정고수 중 한 명이었지만 계획이 어긋난 것은 큰일이었다. 혹시라도 다른 절정고수들의 임무가 실패하기 전에 보강을 해야 했던 것이다.
무당파에서의 일은 혈교의 교주인 혈마도 매우 관심 있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이 일은 혈마에게 보고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철갑마는 급하게 혈마를 찾아갔다.
* * *
매우 어려보이며 미남자인 자가 핏빛으로 물들인 듯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피부색이 선혈처럼 짙었는데 보기에도 요사한 빛을 뿜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일성이마 중 일마인 혈마였다.
그는 철갑마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라고?"
그의 몸에서 가공할만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 기세에 초절정고수인 철갑마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 일은 신중히 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는가!"
"더 나은 녀석들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현재 그곳에서 임무를 수행중인 녀석들은 모두 몇 명인가?"
호북은 매우 넓은 곳이었고, 길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 수레를 끌고 상품을 운반하는 자들의 무리는 하루에 못해도 수백 개가 넘었다. 그들을 보이는 대로 약탈하려면 필요한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현재 투입된 고수들만 육십 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절정급 고수로는 열두 명이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혈교에서 육십 명이 고수라면 그리 큰 숫자는 아니었다.
철갑마의 말에 혈마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했다.
“절정이 열두 명이라고?”
혈마의 입장에서는 고수 수준은 전력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철갑마의 말에 혈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적어."
"예?"
혈교에 고수가 넘쳐난다고 하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자들은 무당파만이 아니었다. 천하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문파들을 상대해야 했으며, 마교를 견제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고수를 무당파 쪽으로 투입시킬 수는 없었다.
"절정고수를 삽십 명으로 증가시켜라."
혈마의 말이었다. 그것은 법이었다.
"알겠습니다."
철갑마는 대답부터 했다. 이미 혈마의 입에서 말이 나왔기 때문에 그것은 무조건 지켜져야 하는 사실이 되었던 것이다.
"천 년의 역사를 지닌 무당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런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절정고수 삼십 명이라면 웬만한 문파를 멸문시킬 정도의 전력이었다.
하지만 그 전력으로도 무당파를 전멸시킬 수는 없었다. 단지 근처에 돌아다니는 행상들이나 표물을 운반하는 자들을 상대하기에 그쳤다.
철갑마의 머릿속에는 어디서 전력을 빼올지 급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녀석들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도 알아내라. 왠지 예감이 좋지 않다."
"존명."
"그리고 암호문에 나오는 장수라는 녀석을 내 앞으로 데려와. 분명 녀석의 뒤에는 배경이 있을 것이다."
배경이라고 말을 했지만 혈교에서 신경을 쓸 정도의 세력은 천하에 두 개 밖에 없었다.
바로 무림맹과 마교였다. 그리고 절혼도법을 알고 있는 세력은 마교가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혈마는 마교라고 짐작하면서도 장수를 데려오라 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혈마님."
"내분으로 잠잠한 줄 알았는데…. 그만한 내분이 벌써 치유가 되었을 리도 없고……. 힘만 세고, 머리가 없는 놈들이 우리의 계획을 알리도 없는데……. 어떻게 된 건지 정말 궁금하구나."
혈마의 얼굴에는 진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천하를 아우를 힘을 가지고도 세력다툼으로 스스로의 힘을 버리는 마교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혈마는 장수를 잡으면 마교의 사정에 대해 친히 물어볼 생각이었다.
* * *
장수는 방현으로 가는 내내 태극권을 수련하면서 걸었다.
보행 중에 수련을 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태극권은 극히 느린 동작이 많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이 움직여야 해서 장수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언제 또 다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것을 알기에 아무도 장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수련을 방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단주 역시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방현으로 가시기 전에 아셔야 하는 게 많은데….'
교육해야 하는 게 많았다. 그리고 사업체와 운영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을 드려야 했다.
하지만 무사들로는 상대할 수 없는 강한 산적을 만난 뒤였다. 그런 적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장수에게 상인의 수업을 강요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마차는 한참을 가다가 멈추었다. 식사 시간이 된 것이다. 식사시간에는 간단한 건량과 솥에 끊인 국이 전부였다.
장수는 음식을 보자 순식간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수련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허허."
단주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식사를 하는 중에라도 수업을 하려고 했는데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소장주님. 좀 천천히 드시지요. 체하시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장수는 미소를 띠며 말을 했다. 인상이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미소였다. 그리고 그는 식사를 다 마치자 무사들이 쉬고 있는 상황인데도 혼자서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장수의 행동에 단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방현에 도착만 해 봐라.'
다행히 마차는 방현에 도착할 때까지 위험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방현에 도착하자 단주의 표정이 바뀌었다.
"소장주님.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예. "
장수는 단주의 말에도 불구하고 태극권 수련을 계속하며 걷고 있었다.
시내가 보이자 많은 사람들이 보였고, 그들은 수련을 하는 장수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덩치가 보통사람보다 두 배는 큰 거한이 떠돌이 약장수도 할 줄 아는 태극권을 펼치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이다.
'이런.'
장수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전생에서 무사들의 시선이 집중된 적은 있지만, 그때 그들의 눈에는 존경과 두려움이 함께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지금 장수를 바라보는 눈길은 비웃음과 동정의 눈빛이었다.
더구나 몇 명의 아이들은 장수가 떠돌이 약장사인줄 알고 미리 앞으로 가서 자리를 맡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장수로서도 더 이상 수련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눈에 띠는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번 집중된 시선은 좀처럼 거두어 지지 않았다. 그러자 단주가 마차 안에서 장수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로 들어오십시오."
난처한 장수는 급하게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게 진작 수련을 그만두시지 그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중요한 부분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절정고수인 하일악과의 대결 후였다. 그랬기 때문에 얻은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극권에서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수련을 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주변을 의식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시내에 들어왔으니 산적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렇군요."
장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시내에는 관이 있었고 관에는 훈련된 병사들이 있었다. 물론 훈련된 병사들이라고 해도 무공을 익힌 무사들을 이길 수 있을 리는 없었지만 관 앞에서 난리를 친 무림인은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처리했던 것이다.
관과 무림은 원래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 때문에 관이 있는 시내에 산적들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때문에 단주는 안도의 표정을 지은 것이다.
"시내에는 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근방에는 군대도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관이라는 말에 장수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혈교가 관을 두려워하지는 않을 텐데.'
정파와 사파는 그래도 황궁이나 관에 관여되는 것을 꺼려한다. 왜냐면 잘못하면 근거지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혈교와 마교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이 위치한 곳 자체가 그들에게는 하나의 왕국과도 같았다. 때문에 황궁의 어림군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근거지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혈교의 고수들은 고난이 있다고 해도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상대방을 죽였다. 그래서 비공식적으로 혈교의 고수에 죽은 관의 인물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혈교가 마음만 먹는다면 황제라 해도 그들의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죽은 뒤의 혼란은 혈교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놔두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참 황량하군요.”
거리에 모여든 자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 백성이었고, 응당 보여야할 장사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시장도 제대로 열리지 않았고, 물건을 파는 곳도 몇 군데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