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편 - 충돌
수천 명의 군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행색이 너무나 남루했다. 더구나 어떤 무사들은 부러진 검을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들의 우두머리인 이길영장군은 황실에서 내린 산적토벌에 대한 명을 받고 그 임무를 쉽게 생각했다. 이곳에 엄청난 무력을 가진 녀석들이 수십 명이나 몰려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산 위에 있는 산채에 대한 정보를 듣고 토벌을 하러 갔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는 줄 알았지만 겨우 몇 십 명 때문에 자신들이 밀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휴."
이길영이 인상을 쓰자 참모가 물었다.
"기운을 내십시요. 장군님."
"아니야. 내가 너무 방심했어. 이렇게 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어."
"아닙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누구도 이렇게 밖에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장군님이니까 녀석들을 물리쳤지, 만약 장군님의 냉철한 판단력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참모의 말에도 이길영의 인상을 펴지지 않았다.
"대체 녀석들의 정체는 뭐지? 내가 듣기로는 저 정도 무위를 가진 자들을 강호에서는 절정고수라고 하는 거 같던데. 저런 자들이 뭐가 아쉬워서 산적질을 한다는 말인가?"
이길영은 절정고수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아니 절정고수라 이름 불린 자들은 몇 번 만나보았지만 실제로 무위를 확인한 것은 처음이었다.
실로 절정고수라 이름 붙인 자들의 무위는 놀라울 정도였다. 양떼 속에 들어온 늑대들처럼 마음껏 자신의 군대를 희롱했다. 그 때문에 병사들의 진형은 무너졌고 병장기는 부서져 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이렇게 구석까지 몰려 포위되어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공부한 병법이나 계책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기본적인 무력차이는 어떻게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수천 명의 군인들 사이를 장난하듯이 활보하는 절정고수들은 상대할 방법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저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더구나 어떻게 저렇게 많은 숫자를 모았지? 이정도 규모라면 누군가 뒷배가 있다는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이렇게나 몰아붙일 수 없어."
정식 군대 오천 명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 정도라면 반국가적인 조직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정도 규모의 일을 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절정고수라 이름 불리는 자들을 볼 때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이정도 규모라면 의심 가는 자들은 두 군데 밖에 없었다.
"마교나 혈교가 손을 쓴 것이겠군."
이길영의 눈에는 마교나 혈교나 같은 곳으로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마교나 혈교나 국가에 대항하는 반국가적 조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 그들의 정체를 지금 의심해봤자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항복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겠지요."
"우리는 어떻게 될까?"
마교나 혈교에 포로로 잡힌 자 치고 돌아온 자들은 없었다. 분명 죽음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혀 평생을 지내야 할 것이다. 이길영으로선 바라지 않는 미래였다.
"기운을 내십시오, 장군님. 우리는 아직 포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녀석들이 포위망을 설치하기 전에 소식을 전하러 탈출에 성공한 전령도 있을 겁니다. 그들이 소식을 전한다면 분명 희망이 있습니다."
참모의 말에 이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희망이 남았던 것이다.
"그래. 기운을 내야지. 우리가 진다면 호북은 산적들의 배후에 있는 자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무정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호북 전체에 혼란이 생길 것이다. 더구나 산적들의 뒷배도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길영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병사들에게 외쳤다.
"모두 힘을 내라. 조금만 기다리면 구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예!"
병사들은 기운차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정도 규모의 지원군이 오려면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전에 산적들에게 포로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 * *
삐익!
혈교의 절정고수는 피리를 불었다. 어떻게 들으면 새의 지저귐 소리였다. 하지만 저 신호는 지금 이상이 없다는 소리였다. 저 신호가 갔으니 앞으로 얼마 동안은 저자가 사라진다고 해도 눈치를 챌 리 없었다.
장수는 혈교의 절정고수가 저 소리를 낼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녀석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장수는 마치 유령 같았다. 숲을 소리 없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마치 다리가 없는 것 같았다.
장수가 펼치는 보법은 유령보였다. 혈교에서 만들어진 보법으로 마치 유령이 움직이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보법으로서의 효과는 거의 없었지만 움직일 때 주변의 소리를 최대한 차단 시켜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장수는 거대한 덩치와는 다르게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의식적으로 존재감을 줄이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장수는 주변에 있는 자들을 조심하면서 움직였다. 그렇게 움직이자 절정고수의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절정고수는 경지에 도달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만약 절정이 된지 오래된 완숙한 자라면 장수가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는 장수가 곁으로 다가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장수는 녀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왼손을 들었다. 칠선장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그때 절정고수가 갑자기 움직였다. 이상한 예감을 느낀 것이다.
휙.
절정고수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칼을 꺼내 들었다. 무공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장수가 먼저였다.
퍽.
장수의 손바닥은 절정고수의 배에 붙었다. 그와 함께 녀석의 몸에는 거대한 폭음소리가 울렸다.
쾅.
절정고수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였다.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은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휴. 위험했어.'
장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녀석이 눈치 챌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만약 녀석이 더 빨리 눈치 챘다면 장수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 지도 몰랐다.
'조심해야겠구나.'
장수는 환생하고 나서 유령보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용을 했고 부족한 점이 있어서 인지 마지막에 가서는 상대가 눈치를 챈 것이다.
장수는 천천히 절정고수를 땅에 눕혔다. 다행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절정고수의 은신술을 확인할 수 있는 자는 매우 드물었다. 그랬기에 이곳에 절정고수가 경비를 서고 있다는 것도 주변에 알지 못할 것이다.
장수는 천천히 절정고수의 맥을 짚었다. 그러자 맥이 뛰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죽은 것이다.
'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방심했다고 하지만 절정고수였다. 그런 자를 단숨에 죽인 것이다. 그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수는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눈치 챈 녀석이 있는지를 확인한 것이다. 다행히 누가 장수를 보지 못한 듯 했다. 만약 봤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었다.
'이제 움직이자.'
군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니 안쪽에 있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장수는 천천히 유령보를 밟으며 산의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자 경비를 서는 산적들이 눈에 보였다.
'이곳에도 있구나.'
중요한 길목마다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무위는 고수급에 달하는 무사이거나 고수였다. 그런 자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기에 웬만한 자들은 금세 발각될 것이 뻔했다.
장수 역시 과거의 경험과 여러 가지 은신술을 알고 있었기에 이곳가지 온 것이지 처음 왔다면 아무리 장수였을지라도 애를 먹었을 것이 분명했다.
걸음을 옮기자 나타난 길은 외길이었다. 이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저들을 제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길이 있는지 몰랐지만 지금으로서는 찾기 힘들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을 모두 제압해야 한다. 그리고 교대가 되기 전에 상황을 끝내야 했다.
장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누구를 먼저 제압할 것인지 우선순위를 정했다. 그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장수의 두 손은 앞으로 뻗어졌다. 그와 함께 경비를 서다 갑자기 나타난 자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고수 두 명을 단번에 제압했다.
"웬 놈이냐?"
'웬'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장수의 몸은 빠르게 산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함께 '냐'라는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두 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퍽.
동시에 울리는 소리였다. 두 명을 제압하는데 소리가 하나 밖에 나지 않은 것이다.
순식간에 두 명을 제압했다. 장수는 긴장을 해서인지 등줄기에 땀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휴. 긴장이 되는 구나."
전생에서는 이렇게 긴장한 적이 없었다. 그때에는 죽으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것이었고, 긴장을 하기 보다는 생각 없이 사는 편이었다.
그는 장법 이외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장법을 익히기 위해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은 장법을 익히기 위해 살고 싶었고, 그래서 살기 위해 다른 잡다한 것들을 익힌 것이다. 그랬기에 긴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등이 축축한 게 긴장을 많이 했다. 몸이 뚱뚱했기에 잘못하면 들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장수는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더구나 경비를 서던 산적들을 죽였다. 이제 자신이 발각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제부터는 정면 돌파다."
장수는 마음을 먹었다. 이제부터는 쉬지 않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올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수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주변을 살폈다. 다음 목표를 잡기 위해서였다.
장수는 급하게 달렸다. 그러자 기척이 느껴졌다.
'저기인가?'
경비는 교범에 써 있는 대로 경비를 선다. 그랬기에 대충 예측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곳에 산적들이 있었다.
'이제 거의 가깝게 온 거 같구나.'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쪽으로 경계가 강화 되었으니 분명 이쪽으로 가면 포위된 병사들이 나올 것이다.
장수는 천천히 경비를 서던 산적들에게 다가갔다.
삐이익!
그때 호각소리가 퍼졌다. 들킨 것이다.
'젠장.'
장수로서는 아까운 상황이었다. 상대가 알아차리기 전에 절정고수의 숫자를 더 줄여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