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편 - 발전하는 장수
“예.”
청학은 장수의 모습을 보며 인자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소장주님을 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청학의 말에 장수는 당황했다. 그 말의 진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소장주님의 은자를 좋은데 써도 되겠냐고 물은 것입니다.”
“아. 봉급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까?”
장수의 말에 청학은 도사들을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봉급 얘기도 해야겠지요. 도사들에게도 최소한의 돈은 필요하고 속가 제자들 역시 생활을 유지 하려면 은자가 필요한 법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많은 은자를 필요로 합니다. 요즘 양현에 은자의 유통이 꽉 막혔습니다. 산적들 때문에 물자가 돌지 않아서 가난한 자들은 끼니조차 잇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은자는 이번에 속출하고 있는 아사자들을 지원해 줄 은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청학의 말에 장수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석가장측에서 먼저 나서서 그들을 도우면 후에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장수로서는 돕는다는 말에 괜한 거부감이 생겼다.
그는 혈교에 있으면서 단 한번도 사람을 도운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악인은 아니었지만 오랜 기간 몸에 배인 습관이 있었기에 선뜻 나서서 다른 자들을 돕는다는 것은 미처 생각도 못했던 일이였다.
이번에 돈을 벌려는 이유도 스승인 유운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스승만 아니라면 천생 무인인 그는 이런 재물 따윈 몽땅 팔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무공에만 전념할 것이다.
장수가 망설이는 표정을 짓자 청학의 웃으며 말했다.
“석가장에서 이번에 벌어들인 수입 중 아주 일부만 써도 굶주린 많은 자들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소장주님 역시 본파의 속가 제자라고 들었는데, 이것은 타인을 구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수양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 큰마음 먹고 힘을 보태주셨으면 써주셨으면 합니다.”
장수는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사람들에게 은자를 쓰면 스승님에게 드릴 은자가 그만큼 줄어들 텐데…….’
장수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그래 스승님이라면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앞장서서 도울 분이야.’
유운은 없는 살림에도 항상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노력을 많이 했다.
더군다나 이번에 장수가 은자를 벌려고 하는 것도 황하강이 범람해서 그 주변의 주민들의 피해를 유운이 걱정하기에 그곳에 지원해줄 은자를 마련하려던 게 아니었던가?
장수는 스승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만약 유운이 이곳에 있었다면 분명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자고 대답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장수의 말에 청학을 비롯한 도사들의 표정이 일순간에 밝아졌다.
개인의 힘으로는 빈민들을 구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많은 은자를 벌어들이는 석가장이라면 큰 재력을 발휘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번에 도사들이 석가장의 일에 참여한 것도 그 때문이 컸다.
“감사합니다. 도우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장수의 말에 도사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장수를 바라보았다. 혹시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에게 무리한 부탁을 할까봐 괜시리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조건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지원처에 반드시 제 스승님의 이름으로 기부했으면 합니다.”
장수의 말에 도사들의 얼굴에는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 정도 부탁이라면 어려울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시기에 스승님의 이름으로 기부하신다고 하시는 겁니까?”
청학의 말에 장수는 스승님의 성함을 최대한 공을 들여 정중하게 말했다.
“제 스승님은 유자, 운자를 쓰십니다.”
“유운이라 하셨습니까? 알겠습니다. 꼭 기억해 두지요.”
유운이라 이름 불리는 도사들은 많았다. 더구나 무당파에 소속된 도사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랬기에 현재 장문인이거나 뚜렷한 종적을 남기지 못한 자라면 같은 무당파 도사라 해도 이름만 들어서는 알 수 없었다.
또한 번천장협 유운이라는 이름도 이십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버린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스승의 이름을 말했을 때 청학을 비롯한 다른 도사들 역시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리라.
“예.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장수로서는 유운의 위명이 조금이라도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아휴 저희가 더 부탁드려야지요. 이번에 석가장의 활약을 한 번 기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수는 청학의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표길랑 장로는 인상을 구긴 채 장한의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그게 정말이냐?”
표길랑의 말에 중년의 장한은 겁먹은 목소리로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예……, 그, 그렇습니다.”
표길랑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수하의 보고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는가?”
표길랑의 질문에 장한은 더욱 더듬거렸다.
“모…… 목을 놔 주십시오. 제, 제발 부탁입니다.”
장한의 말에 표길랑 장로는 장한의 목을 놔주었다.
“최대한 자세하게 말해 보거라!”
“예. 흑룡혈장 대협께서는 무당파로 가서 번천장협 암살을 시도하셨습니다. 일이 성공했는지 그 이후 번천장협과 흑룡혈장 두 사람 모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번천장협 암살에 성공한 것을 혈교에서 크게 자랑했었습니다. 아무래도 번천장협 하면 초절정고수 중에서도 화경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유력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도모했던 암살이 성공했기에 보란 듯이 선전을 한 것이겠지요. 그 덕분에 어지간한 흑도 문파에 소속된 중년인들이라면 십오 년 전에 흑룡혈장이 목숨을 걸고 번천장협을 암살한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표길랑 장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십오 년 전이라면 마교에선 한창 내분 때문에 정신없었을 때일 것이다.
그랬기에 흑도문파들로서도 대부분 알고 있던 사실을 지금 까지 몰랐던 것이다.
더군다나 번천장협이라면 강호의 정세에 어두운 자신도 제법 알고 있는 자였다.
장법에 능통하며 차세대 화경의 고수에 가장 가까운 자로 이름 높은 고수였다.
그런데 그런 고수와 자신의 친우인 흑룡혈장 장삼이 동귀어진 할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표길랑은 자신도 모르게 초절정에 달하는 기세를 밖으로 내 뿜었다. 그러자 장한은 숨이 막히는지 켁켁 거리기 시작했다.
“제……, 제발……. 사, 살려 주십시오!”
장한 역시 고수의 경지에 있었지만 초절정고수인 표길랑의 기세를 버틸 수는 없었다. 아니 초절정의 경지에서도 가장 원숙한 지경에 이른 표길랑이었기에 무림에서도 그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낼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았다.
표길랑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장한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군…….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어.”
표길랑 장로는 장삼과의 추억이 생각났다.
장삼과 처음 만나 장법을 겨루고 생사를 다투다 친구가 되었던 기억들이 떠오르자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죽었느냐?”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번천장협은 확실히 죽은 것이냐고 물었다.”
“그것은 정확히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번천장협이 그 후,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을 보면 죽은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
표길랑 장로는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세월의 야속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친우가 죽은 지 십오 년이 지났는데 그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기가 차다 못해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왜 장삼이 번천장협과 싸웠지?”
“예? 왜 싸웠다니요? 혈교에서 위명이 자자한 번천장협을 제거할 필요를 느껴서 암살하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 어디를 가도 초절정고수를 이렇게 함부로 대우하는 법은 없었다. 아무리 혈교라 해도 초절정고수를 버리는 패로 쓰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었던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다름 아닌 번천장협이었다. 친우인 장삼보다도 그 위명이 높았고 무공수위 역시 몇 수 더 위로 평가 받는 자였다.
그런 자를 상대로 장삼을 보냈다는 것이 표길랑 장로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이것은 죽을 것이 분명한 자리에 초절정고수를 내몬 것이다.
아무리 혈교 내부에서 다 생각이 있어 그를 보냈다고 해도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다.”
표길랑 장로는 생각을 멈추고 그랬어야만 했을 연유에 대한 상황을 가정하기 시작했다.
마교는 이십여 년 동안 내분에 휩싸였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재를 해야 하는 천마 역시 중재를 하러 나서기는커녕 오히려 거기다 대고 기름을 붓는 행동을 해댔기에 싸움은 쉬이 사그라들지 못하고 오랜 시간 동안 서로 다퉈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마교는 강호 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고 외부 세력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이십여 년이라는 긴 동안 침묵을 지킨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집단에게 가장 중요한 수단인 정보망 역시 최소한의 가장 중요한 줄기 밖에는 남지 않았고, 천하에 널려있던 지부들 역시 본교의 지원을 받지 못하자 그 수가 점차 사라지거나 세력이 축소된 채 자력으로 생활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표길랑 장로 역시 처음에는 정보도 받지 못한 채 무작정 신강을 떠나 중원으로 향했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흑도문파를 방문해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흑도문파의 문지기는 처음엔 표길랑 장로를 몹시 무시했다.
장로 혼자였고 차림새 역시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태도에 기분이 상한 표길랑 장로는 씨익 웃으면서 흑룡장법을 펼쳐 문파를 단숨에 아작을 내고서 문주를 잡아 협박해서 원하던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얻어낸 정보는 장로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장삼의 행방이었지 장삼의 생사가 아니었다. 같은 초절정고수였고 자신과 장법을 겨루었던 친우 장삼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문파는 달랐지만 친우라 생각했던 장삼의 죽음은 표길랑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충격이었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끔 해주었다.
“어찌되었던 장삼의 흔적이라도 찾으러 가야겠다.”
“예?”
표길랑은 중소 흑도문파의 문주였던 장한을 보며 말했다.
“별 거 아니다. 어찌 됐건 정보는 고맙군.”
표길랑 장로는 말과 함께 등을 돌려 천천히 밖을 향해 나가기 시작했다.
표길랑 장로가 떠나려 하자 장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인근 도시에서는 위명이 쟁쟁하던 문파였지만 지금은 그 터만 간신히 남은 상태였다.
표길랑 장로의 장법에 휘말려 건물이 그대로 몽땅 부서졌던 것이다. 사방에는 병장기와 무사들이 쓰러진 채 누워 있었다.
오늘로 문파는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왔던 것이다.
“이……, 이게 끝인 겁니까? 우리를 수하로 거두거나 아니면 죽여서 문파 사냥을 하려던 것이 아닙니까?”
장한은 너무나도 허무했다. 단지 말 몇 마디를 듣고자 이 난리를 피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장한의 말에 표길랑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너희들처럼 약한 것들을 어디다 쓰겠느냐? 그리고 정보만 얻으면 되었지 죽일 것 까지도 없다. 처음부터 순순히 말을 했으면 이렇게 까지 하지도 않았을 텐데 나도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드는 구먼.”
장한은 더욱 얼이 빠졌다.
그 얼굴을 보고 표길랑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경신술을 펼쳤다. 그러자 이내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장한은 표길랑 장로가 떠나자 넋이 나간 모습이 되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수가……. 내가 평생을 다 바쳐 쌓아온 것이 이렇게 한순간에 허무하게 날아가다니…….”
장한이 주저앉자. 주변을 맴돌며 눈치를 보던 수하가 급하게 달려와 물었다.
“문주님 대체 저 녀석은 누구입니까?”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 정도 무위를 가진 자를 키워낼 곳은 천하에 단 두 곳 뿐이다. 아마도 마교 아니면 혈교겠지. 하지만 하는 양을 보니 마교가 분명해 보이는 구나. 아무 이유도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기분파에 무식한 자들이라고 들었는데 그 말이 정말이었어.”
장한의 말에 수하는 기겁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그 마교의 고수를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자 공포감이 엄습해왔던 것이다.
“마……, 마교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곳의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함부로 일을 벌이겠느냐? 여하튼 마교의 사람이 중원에 다시 나타났으니 천하가 또 시끄러워 지겠구나.”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