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편 - 식량을 나눠 주다
장수는 단주를 찾아갔다.
아무리 장수가 석가장의 소장주라 하더라도 단주와 상의 없이는 일을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주는 정신없이 일을 해치우고 있었다. 도사들이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장수가 벌려놓은 일이 하도 많았기에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장수가 무당파로 떠나기 전에 중요한 일은 미리 처리해둬야만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혼담이 오가고 있는 상가에 대한 상황도 파악해고 있어야 했기에 단주는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단주님”
“소장주님 오셨습니까?”
단주는 대답 하면서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 한 가지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장수의 말에도 단주는 여전히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저도 혼담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일단 소장주님 용건부터 먼저 말씀하시지요.”
단주가 혼담이라는 말을 꺼내자 장수는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기에 조용히 인상을 찌푸리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불만스런 표시였다.
“다름이 아니라 도시에 구제해 주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에게 상단에서 물자를 풀어 도움을 주었으면 합니다.”
“구제 말씀입니까? 그 정도는 소장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하실 수 있으십니다.”
원래 상단에서는 어느 정도는 민생 구제를 위해 예산을 배정해두고 있었다. 바로 그 자금을 소장주의 지위를 가진 장수는 어느 정도까진 마음대로 유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그 양이 좀 많습니다.”
장수의 말에 서류를 넘기던 단주의 손이 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목만 간신히 돌린 채 불안한 표정으로 장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주는 돈 문제엔 매우 민감한 자였다. 그래서 장수의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이번에 산적들이 발생하면서 물자가 막히지 않았습니까? 그 덕분에 굶주리는 자들이 많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지원을 해줄까 합니다만…….”
혹시나 부정적인 말을 들을까 싶어 장수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단주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굴려 맹렬한 속도로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많은 이득을 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지원을 해주셔도 됩니다만 소장주님도 알아 두셔야 하는 것이, 아무리 장수님이 석가장의 소장주님이라 하셔도 석가장의 주인은 아니십니다. 석가장은 많은 투자자들과 하청가문, 그리고 하위 상단과 상가가 서로 힘을 합쳐서 운영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득을 내게 되면 그들과도 함께 나누어야만 합니다. 그러니 소장주님께서도 그것을 생각하셔서 행동하셔야 합니다. 더더군다나 이번에 공방을 짓거나 기타 건물을 추가로 지으면서 그에 대한 인건비나 건축 자재비용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투자해야 할 액수가 점차 많아지고 있어 초반 지출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도록 많아진 상태에다 아직 미완성이니 그걸로 수입이 발생할 리 만무하지요. 그러니 무리해서 하층민들에게 지원을 해주셨다간 잘못하면 공방은 제대로 운영도 해보지 못하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소장주님께서는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금을 융통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 석가장은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엄연히 상가이고 은자를 벌어 이익을 내기 위해 운영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점도 반드시 잊지 않으셨으면 하는군요.”
장수는 숨이 넘어가는 줄만 알았다. 단주가 쉬지 않고 재빠르게 말을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무척이나 길었지만 요컨대 말하자면 단주의 말은 허락한다는 뜻이었다.그러나 한 마디 한 마디에 뼈가 있는 말이었다.
실제로 장수는 후계자로서 지금까지 석가장에 돈을 벌어다준 것보다 쓴 게 더 많았다. 무당파에 가서 수학하며 쓴 돈만 해도 엄청났을 것이다.
하지만 장수가 결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 액수도 석가장의 소장주인 장수에 대한 투자였다.
다른 가문이나 상가에서도 후계자 한명을 양성하기 위해서 천문학적인 액수의 거금을 들인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고도 실패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인데 장수는 투자한 액수가 적은 것에 비하면 꽤나 큰 거래도 곧잘 성사시켰기에 성공한 경우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장수는 단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지원을 하면 좋을까요?”
장수의 말에 단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숙제입니다. 어떻게 처음의 좋은 의도를 살린 채 지원을 할 것인가에 대한 것도 소장주님께서 직접 해보시면서 느끼셔야 알 수 있을 일입니다. 그러니 직접 해보시지요.”
단주의 말에 장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엔 혼담에 대해서 제가 말씀 드리지요. 지금 제 손에 들려있는 서류가 상대방 가문에 대한 자료인데 한 번 읽어봐 주십시오. 그리고 이것은 초상화입니다. 각 가문들의 매파가 보내온 것이니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고르시면 됩니다.”
장수는 혼담이라는 말에 다시금 사색이 되었지만 초상화라는 말에는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가 남자였기에 여자의 외모에 끌리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초상화속의 아가씨들은 대부분 무척 아름다웠다. 아무래도 화가가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그린 것이 아니라 조금씩은 미화하여 그린 탓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들 제법 예뻤던 것이다.
사진을 받아들어 유심히 보던 장수가 점차 넋을 잃고 초상화들을 훑기 시작하자 단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여자는 얼굴이 다가 아닙니다. 내면의 마음씨와 한 상가의 안주인으로서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소장주님 역시 여자를 고르실 때는 가문의 부를 늘려줄 여자를 구해야지 얼굴이나 몸매를 보셔서는 안 됩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하지만 장수로서는 가문에 대한 자료보다 초상화에 눈이 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계속해서 초상화만 바라보자 끝내 단주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너무 얼굴만 밝히시니 이거 큰일이구나. 부인 되실 분은 모름지기 그 외모보다는 내실을 보고 들이셔야 앞으로의 석가장의 미래가 밝을 텐데 그 점이 아쉽구먼.”
겉보기에는 완벽한 후계자로 보였지만 정작 여자 보는 안목이 부족한 것 같아서 안타까운 단주였다.
***
장수는 초상화를 보다 시간이 지체되자 다급히 석가장의 물품이 적힌 서류를 살펴보았다. 어떤 식으로 지원을 해야 할지 미리 알아보고 파악해 두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장수는 대충 품목이 정해지자 급히 청학도인을 찾아갔다.
청학도인은 교대 시간이 되어 창고를 지키고 있었기에 그를 만나려면 창고까지 찾아 가야만 했다.
창고에 도착하자 청학도인과 다른 도사들이 여유있게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철마표국의 표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장수는 청학도인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도사님 수고하십니다.”
“도우님 오셨습니까?”
“예. 단주님과 의논하고 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허락은 받았으니 이제 지원할 규모를 정확히 해두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장수의 말에 청학은 미소 지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원해 줄 양만 맞춰 주시면 제가 신도들과 도사들을 시켜 고루 나누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지원해 줄 양이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석가장 혼자서는 모든 지원에 다 맞춰 주실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적당한 양을 정해주시면 등급을 매겨서 가장 어려운 빈민들에게 먼저 지원을 해주고자 합니다.”
“대체 몇 분이나 지원해야 하는데 그 정도입니까?”
장수의 말에 청학은 미리 파악해 두었는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현재 어려운 분들이 만여 가구가 넘습니다. 그분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시는 분들인데 양현 전체의 시장 상황이 현재 모두 죽어 버렸기에 열심히 일해서 생활을 꾸려나가려 해도 그럴 일자리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요 몇 달 간은 일을 구하지 못한 분들이 대부분이구요.”
부자라면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해도 지금까지 벌어 놓은 것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영락없는 하루살이 인생인데다 일자리 자체도 없기 때문에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일자리가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일자리가 없어서 생계를 꾸려나가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군요. 그 부분에 대해선 미처 몰랐습니다.”
장수는 청학의 말을 듣고 나자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 그래서 얼마나 지원해 주실 수 있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아무리 석가장이 많은 돈을 벌었어도 만여 가구를 모두 지원해 주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