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편 - 상단을 돕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아무리 장수가 있다고 해도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한 번 크게 당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면서 여기까지도 겨우 온 것이었다.
더구나 가는 도중에 부상자들 중에서 죽은 사람도 나왔기에 걱정이 더 컸다. 하지만 밝아진 사람들과는 다르게 단주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 졌다.
“휴…….”
장수로서는 단주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장수의 말에 단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단주가 고민이 있는 듯하자 장수는 의아해 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번 상행에서 화물을 모두 잃은 것은 큰 손실이었다.
더구나 상단의 식구들도 많이 죽었을 테니 그에 대한 위로금을 지불하려면 막막해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수는 인간적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하지만 장수가 딱히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를 도와주려면 장수의 은자를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장수가 말을 고르느라 입을 다문 사이에 단주는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부상당한 사람들을 근처 의원으로 옮기도록 해라.”
단주의 말에 하인들은 빠르게 사람들을 의원으로 옮겼다.
단주는 마차위에 있던 부상당한 사람들이 땅으로 내려오자 남은 상품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은 양이였지만 매우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 어떻게든 제값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듯 했다.
장수는 단주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안타깝구나.’
훼손된 상품 가치가 얼마나 가겠는가? 하지만 그런 물건이라도 처분을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은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하인들이 돌아오자 단주는 인상을 쓰며 말을 했다.
“물건을 처분해야 하니 다른 마차를 끌고 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장수는 단주 행동을 보자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상단을 가까운 도시까지 데려다준 이상, 자신은 망설임 없이 양현으로 떠나야 했다.
지금 장수에게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고 잠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차마 떠날 수 없었다. 단주가 어느 정도 상행과 물건을 수습하는 것을 봐야만 안심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단주는 가지고 있는 물건을 빠르게 처분했다.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물건을 인수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단주에게 물었다.
“물건이 이것 밖에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오다 산적을 만나 대부분의 물건을 잃었습니다. 모자라는 위약금은 어떻게든 마련하겠습니다.”
단주의 말에 인수자는 잠시 단주의 몰골을 살폈다.
“산적을 만났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군요. 알겠습니다.”
그 마지못해 물건을 가지고 사라졌다.
단주는 인수자가 사라지자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문제는 해결한 것이다. 그는 하인들을 불러 모은 후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네.”
단주의 말에 하인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주님!”
그들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이번 일로 더 이상 상단을 운영할 여유자금이 없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막대한 적자를 메울 방법이 없어. 그래서 미안한 말이지만 부득이 상단을 해체할 수밖에 없겠네.”
단주는 말을 하면서도 하인들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슬픈 눈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표국에 줄 돈과 이번일로 발생한 손실, 거기다 상행이 실패함으로서 내야할 위약금에 죽은 상단 식구들의 보상금까지 내면 오히려 빚더미에 앉게 되네. 그래서 부득이하게 해체를 할 수밖에 없으니 이해들 좀 해주게.”
단주는 상황을 차분히 하인들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하인들도 지금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랑 몸으로 이해하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그들은 지금 상황을 냉정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단주님!”
“정말 미안하네. 내가 그간의 자네들의 노고를 보상해줘야 하는데 그럴 수도 없을 것 같네. 그러니 이대로 떠나줬으면 좋겠네.”
“아닙니다. 저희들은 단주님을 계속 따르겠습니다!”
하인들은 의외로 단주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단주는 계속해서 제 갈 길을 가라고 권했지만 하인들이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장수 역시 그런 모습을 보자 매우 안타까웠다.
단주의 인망도 괜찮은 듯 했지만 실력도 있어 보였는데 혈교때문에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주저앉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실랑이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결국 단주는 하인들의 뜻을 꺾지 못했다. 그래서 무임금으로 단주의 일을 도와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단주는 하인들과의 일이 끝나자 장수에게 다가왔다.
“은공 지금까지 정말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숙인 단주에 장수 역시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제가 오히려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은공이 아니셨다면 살아서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장수가 없었더라면 단주를 비롯한 백호상단의 식구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단주는 이어서 말했다.
“은공의 큰 은혜는 무엇으로 갚아도 부족하겠지만 제가 당장 능력이 부족해서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은공의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장수는 단주의 말에 진실성을 느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말을 하고 있다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수로서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순간,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에 손을 넣어 보니 스승에게 받은 한줌의 쌀에서 뜨거운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한줌의 쌀에서 온기가 느껴져 봐야 얼마나 느껴지겠는가? 지금 상황을 겪으면 스승이 강하게 떠오르다 보니 착각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만약 자신의 스승이 여기 있었다면 어떻게든 단주를 도와주었을 것이다.
‘제자야 도와주거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환청처럼 유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수는 마치 스승님이 앞에 계신 것처럼 마음으로 예를 다해 대답했다. 그리고 품 한구석에 있던 전표를 꺼냈다.
“단주님 제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
단주는 장수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무인인 장수가 몰락한 자신을 도와준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에 필요한 것은 은자였는데 무사가 많은 은자를 가졌을 리도 없고 그에겐 자신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줄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단주는 얼떨결에 전표를 받고서는 액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시지요.”
장수의 말에 단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목숨을 구해주신 것만 해도 다 갚지 못할 정도인데 이렇게 금전적인 도움까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
단주의 말에 장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은 도움이 아닙니다. 투자입니다. 제가 보니 단주님께서는 상인의 자질을 타고 나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뭘 해도 성공하실 것 같으니 제가 투자를 하는 셈입니다.”
장수의 말에 단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장수가 계속해서 권하자 어쩔 수 없이 돈을 받아들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은공.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단주는 장수에게 목숨 빚을 졌다. 더구나 사업자금까지 얻었으니 이 은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라.
“성공하십시오.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알겠습니다. 꼭 성공해서 이 은혜, 배로 이자 쳐서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단주의 말에 장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한 액수를 준 것이었지만 단주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마음도 흡족했던 것이다.
“그런데 은공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저 말씀이십니까?”
장수는 단주의 말에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계속 움직이다 보니 어디 한군데 정착하고 있다 얘기하기가 애매했다.
“저는 자주 움직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다고 딱히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그럼 은공의 신분을 알려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나중에 수소문이라도 해서 찾아갈 게 아닙니까?”
단주의 말에 장수는 미소를 지었다.
“인연이라면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날 겁니다. 제 이름은 장수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잠시라도 함께한 인연을 보아하니 언젠가 반드시 또 만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수의 말은 애매했다. 하지만 장수로서는 딱히 그에게 보답을 받기 위해 도와준 것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위치를 말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단주는 계속해서 장수의 소속이나 사는 곳을 알아내려 했지만 장수가 끝끝내 말을 해주지 않자 할 수 없이 포기했다.
“알겠습니다. 인연이 다한다면 꼭 만날 것입니다. 그때 꼭 은공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단주의 말에 장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는 갈 길이 바빠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건강하십시오.”
장수는 말과 함께 양현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단주와 하인들은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장수는 양현으로 달려가면서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문제가 심각하구나.”
혈교가 고수들을 이용해 호북을 공격하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였다.
그동안은 혈교의 일은 무조건 방해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오늘 직접 겪으니 그 정도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많은 상인들이 큰 피해를 입고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 앞으로 더 많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더구나 물건을 빼앗긴 상단은 꼼짝없이 상단을 해체해야 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나마 백호상단은 장수가 도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지만 다른 상단들은 피해를 입고도 수복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까?”
장수 역시 그들과 관련이 있었다. 상인들에게 습격을 해 모은 산적들의 재물을 장수가 처분해 주었다. 그랬기에 관련이 없다 발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수는 그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랬기에 어떻게든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안 되겠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살펴보고 도움을 줘야겠다.”
큰 힘은 안 되더라도 작은 도움 정도는 보태줄 수 있으리라. 정 안되면 자신의 사업체에 합류시킬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남을 돕는데 이리저리 핑계만 대고 피하려 하지만 막상 남을 돕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길은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래. 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자.”
장수는 눈을 감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이어서 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일단 사람들을 돕는 것은 조금 뒤로 미루고 지금은 양현으로 가야한다.
양현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하지만 장수로서는 시간이 없었기에 서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