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편 - 유운의 쌀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은 장수에게 내어줄 쌀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지금도 소식을 하시는데 그마저도 줄이지 못하는 것이 속상했던 것이다.
스승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을 할 줄 아는 분이였다. 그랬기에 장수는 스승에게 받은 쌀이 그 어느 고급 쌀보다 귀해보였다.
장수는 주머니에서 쌀 한 줌을 소중히 꺼냈다. 그리고 작은 그릇에 담았다.
고작 한 줌의 쌀이지만 그 가치는 실로 귀중하다 할 수 있었다.
장수로 하여금 이렇게 많은 쌀을 모아 빈민들에게 나누어줄 결심을 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스승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스승님의 명령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권위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장수에게는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명령과도 같았다.
그런 스승님의 명령을 이제야 따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늦어지긴 했지만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장수는 솥에 주머니에서 나누어 담았던 쌀을 한 알씩 넣었다. 그리고 죽에 밑간을 했다. 그러자 향긋한 죽 냄새가 사방으로 풍기기 시작했다.
쌀 고유의 냄새였다. 압력을 받은 쌀에 배인 향이 사방으로 퍼지자 사방에 모인 빈민들의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벌써 며칠을 굶었는지 모른다.
오랜 기간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기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침이 꼴깍 넘어간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학도사가 혼잣말을 했다.
“불경이나 도경을 아무리 읽어 줘봤자 배고픈 도우님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쌀 냄새뿐이로구나.”
도사들이 백성들을 위해 도경을 읊어 주어도 밥 한술 더 주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었다.
청학도사는 주변 도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이봐 도사들! 줄을 잘 세우도록 하게. 잘못하면 식사한번 하려다 깔려죽는 도우님이 생길 수 있으니까 말이야.”
“알았네. 자네나 조심해서 하게. 자네 줄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야!”
도사들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줄을 서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죽과 음식이 다 되었다. 음식이라고 해봐야 죽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간단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 양이 엄청났다.
장수는 손수 죽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다른 도사들이 함께 먹을 음식을 나누어 주자 빈민들이 차례로 음식을 받아가기 시작했다.
장수는 한 명, 한 명에게 죽을 정성껏 나누어 주었다. 그로서는 스승의 말씀을 따르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최선을 다해서 사람들을 대할 수밖에 없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은인은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빈민인 그로서는 아무런 은혜를 갚을 수 없었기에 이름만이라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빈민이 하는 말에 장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이 음식은 제 스승님인 유운도사님께서 베푸시는 것입니다.”
“유운도사님께 평생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빈민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지만 장수에게는 스승에게 감사한다는 말만이라도 정말 큰 감동이었던 것이다.
‘스승님. 스승님이 주신 쌀을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 받고 있습니다!’
유운 역시 지금 광경을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겨우 한줌 남직한 쌀로 몇백 명의 사람들이 먹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줌의 쌀로 이곳에 모인 많은 수의 빈민들을 먹이는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준비해둔 죽과 음식은 금방 바닥이 났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지 못해 기다리고 있었다.
장수는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물이 끓고 있는 여분의 솥에 쌀을 더 넣었다. 그리고 다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일처럼 물과 나무를 가져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또 죽이 다 익었다.
새로이 완성된 죽으로 아직 배급받지 못한 빈민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죽을 먹은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아직도 먹지 못한 자들이 더 많았다.
앞으로 몇 번이나 해도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지 못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여유를 가진 장수를 보니 무슨 생각이 있는 듯 해보였던 것이다.
그때 죽을 먹은 빈민 한명이 나섰다.
“저도 돕겠습니다.”
그는 죽을 먹어서 힘이 나는지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돕기 시작한 자들은 빈민들뿐만이 아니었다. 한쪽에서 구경을 하던 사람들 중에 몇 명이 과일이나 채소를 음식을 쌓아 둔 곳에 아무 말 없이 가져다 놓은 것이다.
비록 그 양이 얼마 되진 않았지만 정성이 기특했다. 그런데 그것이 시작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음식들을 가지고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쌀을 조금씩 보태거나 산에서 나는 약재 등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작은 기적이었다.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었는데 대규모로 모인 빈민들과 장수가 여유롭게 죽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베푸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자비심이 일은 것이다.
더구나 각박해진 인심이 미안했는지 아니면 정이 그리워서였는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여유가 되는 것들을 하나씩 가져왔다.
아녀자들은 음식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금 전보다 더욱 빠르게 음식들이 만들어졌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만 삽시간에 삼십 명을 넘어섰다.
그들은 모두 보수를 받지 않고 즉흥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모두들 웃으며 음식을 만들었고 한쪽에는 새로운 솥이 걸리고 거기서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음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렇게 되자 줄을 선 빈민들이 더욱 빠르게 음식을 배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미리 연습을 한 것처럼 손발이 척척 들어맞아 일이 더욱 빠르게 진행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가 흥이 났는지 팔려고 가져온 소를 잡았다. 그리고 그걸로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돼지를 잡는 사람도 생겨났고 배급소가 삽시간에 축제가 벌어진 것처럼 시끄러워 졌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누구나 측은지심이 생긴다.
지금까지 너무 어려웠고 빈민들이 숫자가 너무 많아서 도와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규모로 빈민들을 도우려고 하니 사람들도 전염이 된 듯 너도나도 나서기 시작했다.
흥이 나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자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끝없이 줄을 선 빈민들도 차츰 그 길이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마지막 사람이 죽을 받았다. 드디어 모든 배급이 끝난 것이다.
“끝이구나.”
장수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장수가 가장 많은 일거리를 해냈다. 하지만 조금도 힘들지가 않았다.
그저 스승님의 바람을 제대로 이루어 드렸는지 걱정이 되는 것뿐 다른 사심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떠주는 죽을 감사히 받는 사람들의 미소를 볼 때면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저 가슴이 후련했던 것이다.
장수가 미소를 짓자 사방에서 장수에게 격려를 해주었다.
“정말 훌륭하네!”
“젊은 사람이 정말 장해!”
비록 단 한 끼 뿐이었지만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먹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 일이라면 웬만한 상가가 전력을 다해야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걸 장수가 해낸 것이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스승님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장수의 말에 사람들은 참 겸손한 젊은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석가장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인식이 좋아진 것이다. 사실 상가가 인식이 좋아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였다.
왜냐면 상가라는 직업 자체가 은자를 모으는 직업이었고 서민 상대로 장사를 하여 이득을 취하기 때문에 장사가 잘 되든 못되든 일부 사람들에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직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수는 반대로 이익을 얻은 만큼 백성들에게 풀어 놓았기 때문에 인식이 매우 좋아진 것이다.
사방에서 박수소리가 났다. 그리고 석가장의 식솔들에게도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자 석가장의 식솔들과 관련된 자들의 안색도 밝아졌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뿌듯하고 기분이 상쾌했다. 그리고 석가장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것은 은자로는 얻을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다. 이번에 참가한 자들은 상단에 대한 소속감과 자부심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장수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끝내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또 여유가 있을 때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장수의 말이 끝나자 현장은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온통 뒤덮였다.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이런 일은 한 번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수의 생각은 틀렸다. 그의 가슴에는 아직도 스승이 준 쌀이 더 남아 있었다.
그로서는 스승이 준 쌀을 모두 사용할 때까지 이일을 계속하고 싶었던 것이다.
* * *
장수와 가문의 사람들은 환호성을 받으며 상가로 돌아왔다.
상가로 돌아온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부수적으로 사용했던 비용들은 서류라는 형식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장수는 원래의 업무에 추가로 올라선 서류를 보고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을 느꼈다.
“비용이 엄청나구나.”
이번 일을 성황리에 끝낸 것만 해도 하늘이 도와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곳곳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물자를 지원해 주었기에 별 탈 없이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쌀이 떨어져 급하게 쌀을 추가로 구입했기에 얼마의 은자가 더 나갔는지는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원래 쌀을 구입했던 비용이 많이 들긴 했지만 현장에서 부족하여 추가로 구입한 쌀들은 급하게 구하느라 비싼 값에 살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이 빈민을 위해 사용된 것을 알자 판매자가 뒤늦게 값을 깎아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담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장수는 머리가 아팠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승의 명령을 성대하게 치룰 수 있어서 기뻤다.
“힘내서 얼른 처리해 버려야겠다.”
장수는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