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편 - 어의
장수의 머리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고, 머리가 좋으니 상승의 무공서를 읽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좋은 것과 학문적으로 머리가 발달한 것은 다르다. 학문이란 기본이 되는 뼈대가 있어야 고급 학문을 익힐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기본을 제대로 쌓지 않는다면 어려운 학문은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장수는 무공에 관한 지식이 뛰어난 데다 깨달음도 있었기에 무공에 관한 것은 빠르게 익힐 수 있었지만 도가 계열의 서적을 읽는 것은 난해했다. 당연히 책을 보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책 한 권을 겨우 읽은 뒤에야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당히 어렵구나!”
우선 과거와 지금은 시대상이 달랐다. 때문에 과거의 편하고 쉬운 문체가 지금은 매우 어렵고 난해한 문체가 된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읽었어야 했다. 신선 사상은 도가의 원류로, 지금의 도가 사상과는 다른 점이 있었기에 해석이 난해했다.
하지만 장수로서는 지금이 매우 중요했다.
심법이라는 것은 사실 몸속의 혈도를 도는 것이지만 구결은 학문적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해석에 따라 창작자의 생각이나 깨달음이 달랐기에 만약 구결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 운기를 한다면 심법의 성취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전진심법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사상이었다.
만약 이러한 학문에 매진하면 전진심법에 큰 성취가 있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선천기공도 지금보다 나은 성취를 보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법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면 한 번에 운기가 되는 양이나 기운의 통제가 더욱 자연스럽고, 깨달음 또한 더욱 깊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장수 역시 이번 기회에 어느 정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을 먹자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장수는 무작정 책을 보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해가 안 가도 우선 외워 두거나 어렵더라도 완독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실질적으로 무공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보는 책이 무의식에 남아 나중에 큰 성취를 얻을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장수의 경지로는 무공을 수련하는 것보다 학문적 토양을 쌓거나 생각의 확장에 더욱 주력해야 했다. 그리고 명상이나 실전을 통해 화경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의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누구도 장수에게 화경의 경지에 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화경의 고수가 되기 위한 토양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장수가 도가 계열의 서적을 보자 서기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 도가 계열의 서적을 보는 거지?’
지금 이곳에는 무인이라면 눈이 돌아 버릴 정도의 무공들이 가득 차 있었다. 모두 선대 황제의 명으로 천하 각지에서 수집한 무공서들이었던 것이다.
이것들을 종류별로 분류하는 데만도 많은 학자들이 동원된 덕분에 이 정도의 규모를 만들 수 있었다.
이곳에 방문한 무인들은 대부분 최고의 무공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무공을 발견하면 또 다른 무공을 탐냈다. 그랬기에 이곳 도가 계열의 서고는 이용하는 자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책들이 희귀 도서이거나 고서로서 가치가 높은 것이긴 하지만 무공 서적은 아닌 탓에 무인이 보기에는 시간 낭비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상당한 무공을 갖춘 것으로 알고 있던 장수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채 쉬지 않고 도가 계열의 서적을 읽는 것을 보니 서기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야 보고만 하면 되니까 상관없지.’
서기는 안내만 맡은 것이 아니었다. 장수가 보는 책을 확인해서 상부에 보고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아직 황실에서는 장수를 완전히 믿는 게 아니었다. 때문에 무슨 책을 보는지 확인하고 그에 대해 분석을 하기 위해 서기에게 확인하라고 한 것이다.
서기는 잠시도 쉬지 않고 장수를 관찰하며 무슨 책을 읽는지 살폈다. 그런데 도가 계열의 책만 보니 만약 그가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사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장수는 잠시도 쉬지 않고 도가 계열의 책만 볼 뿐이었다. 시장할 때면 서기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식사를 마쳤고, 단 한숨도 자지 않았다.
잠은 언제든지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엔 계속 있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장수로서는 지금의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야 했기에 희귀한 것으로 보이는 고서를 중심으로 도가 계열의 책들을 보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책을 보는 동안 의원들이 여러 번 다녀가며 장수를 위해 준비한 약을 건네주었다.
장수의 혈도와 몸을 건강하게 해주고 몸의 불균형을 잡아 주기 위한 약이었는데, 먹어 보니 미약하지만 어느 정도 차도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원 최고라 할 수 있는 의원들이 황실의 지원을 받고 만드는 것이었기에 그 효력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장수의 상태는 갈수록 좋아졌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장수는 그동안 도가 계열의 서적만 본 것이 아니었다. 불경에도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처음에는 잘 몰랐던 도가 계열의 서적도 계속해서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더구나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서인지 머리도 상당히 좋아져서 도가 사상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높아졌다.
그렇게 도가 사상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자 선천기공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으로 접근이 가능해졌다. 놀랍게도 선천기공은 도가 계열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신선 사상과 불경의 묘리가 섞여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장수는 불경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불경을 읽기보다는 고승들이 불경에 달아 놓은 주석을 위주로 보기 시작했다.
도가 사상과 불교 사상은 전혀 달랐지만 묘하게 비슷한 관점이 있었다. 그러한 점을 차분히 비교해 보면서 선천기공의 묘리를 해석하니 구결에 대한 깨달음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불경과 도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자 책을 읽는 속도 또한 빨라졌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만 팠기에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상당히 많은 책을 볼 수 있었다.
더구나 어의와 의원들이 만든 약은 장수의 몸속에 있는 탁기를 약간이나마 없애 주었고, 몸속 상태도 호전시켜 주었다.
장수로서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혈교의 음모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화경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장수가 화경의 경지라는 지고의 경지에 다다르면 앞으로의 일이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직접 혈마를 벌할 수 있고, 지금처럼 숨어서 혈교의 음모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나서서 정면 대결을 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화경의 고수는 무서운 존재였고 상대할 자가 없었다.
장수는 이 시간이 계속되어졌으면 했다. 분명히 크게 얻는 것이 있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확고해질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서기가 장수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서기는 매우 공경의 자세로 장수를 대했다. 처음에는 무사라 생각했지만 장수가 한 달 동안 불법과 도가 사상에 매진하는 것을 보고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장수는 도를 구하는 도사로 보였고, 상당한 성취를 얻은 것 같았다. 더구나 집중해서 서적을 보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게 만들 정도였다.
서기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장수에게 빠져들게 되었고, 최선을 다해 장수를 모시기로 했다.
상황이 그러하니 보고 역시 좋게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장수가 현자나 오랜 수련을 마친 도사인 것처럼 상부에 말을 했기에 황실에서도 장수에 대한 인식이 날로 좋아져 갔다.
“수장께서 부르십니다!”
동창의 수장이 부른다는 말에 장수는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사실 전생에 자객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고, 이번 생에서는 상인으로 살았지만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학문에 매진하면 할수록 전진심법이나 선천기공이 알몸을 드러내며 상승의 깨달음을 전해 주었기에 장수로서는 지금 같은 생활에 매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실에서 부르니 당분간 이와 같은 행운은 없을 듯했다.
황실이 부르는 것은 장수가 말한 것에 대해 결론이 났다는 것이고, 어떻게든 써먹겠다는 생각이 분명했다.
장수가 화경의 고수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 할 수 있는 지원은 다 하겠지만 지금은 황실의 존망이 걸린 마교와의 결전을 앞둔 상태였다. 당연히 마교와 혈교의 정보가 필요할 테고, 장수를 불러 그들을 염탐하라고 할 것이 뻔했다.
물론 장수가 말한 것이지만 어떤 내용이 추가되고 어떤 내용이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수 역시 어느 정도 예감했기에 가장 중요하고 꼭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내용 위주로 완독하려고 노력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장수의 대답에 서기는 오히려 자신이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왠지 모르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서기가 볼 때 장수는 학문에 매진하는 도사였기에 수련을 방해하는 듯한 기분이 든 탓이었다.
“뭐가 죄송합니까? 오히려 저는 고마운 마음만 듭니다. 제가 책을 보는 동안 저를 위해 여러 가지로 도와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덕분에 저는 마음 편하게 책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장수의 말에 서기는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도사님이 학문에 열중하시는 모습만 봐도 보통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나중에 훌륭한 분이 되십시오!”
장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나이가 많아 보이는 외모도 아니었지만 그의 행동은 서기가 존경을 품기에 충분했다.
장수로서는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살인자에 불과한데 이렇게 예우를 해주니 부끄러웠던 것이다.
장수는 발걸음을 서둘러 수장을 만나기 위해 걸어갔다.
수장의 방에 도착하자 수장이 의자에 앉아 장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는가?”
“예, 어르신.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그래, 그동안 자네가 수련에 열심히, 라는 말을 듣고 방해를 하지 않으려고 지금까지 부르지 않은 것이네. 자네도 정말 지독한 사람이네. 어떻게 거기서 한 달 동안이나 있을 수 있었는가?”
수장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장수는 서고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