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편 - 천지음양수투
공주는 장수를 칭찬했지만 장수는 공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엇을 주는 것도 아니고 말로만 하는 칭찬이었으니 사실 도움도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수는 계속해서 공주가 하는 말을 들었다. 목소리의 울림이 듣기 좋았기 때문이다. 공주에게는 장수의 몸을 아늑하게 해주고 근육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계속 공주의 말을 듣고 있으니 이상하게 공주가 예뻐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인형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마치 공주의 표정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공주가 새롭게 보이자 장수 역시 생각이 점점 바뀌었다.
‘공주랑 같이 합궁을 하면 어떻게 될까? 아서라, 침대에 가면 저 가냘픈 팔다리가 버티겠느냐?’
공주와 합궁을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범죄였다. 연약한 공주는 장수의 거센 힘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장수는 더 이상 그녀와 같이 잔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공주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시녀가 대신 말했다. 아까 보았던 제법 굴곡이 있는 시녀였다.
“공주님의 칭찬이 끝났습니다. 무사님, 영광으로 생각하십시오!”
장수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공주의 목소리가 아름답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었다.
그렇게 공주가 있던 별궁을 나와서 걷기 시작했을 때에야 공주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별궁을 나와 달리면서 장수는 공주에 대한 생각을 조금 바꾸었다.
“빼빼 마르긴 했지만 예쁜걸? 다음에 또 만나면 좋겠구나!”
장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의 심장이 지금도 쿵쾅거리며 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저렇게 어리고 마른 여자가 마음에 든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장수가 황궁을 나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양번이었다. 몇 달이라는 시간 동안 사업체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 많이 된 탓에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 꼭 들르고 싶었다.
장수는 양번으로 향하는 도중에 산적으로 위장한 혈교의 고수들을 발견했고, 두 번에 걸쳐서 그들을 처치하며 양번으로 움직였다.
양번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과거보다 활기찬 게 매우 좋아 보였다.
‘다행이구나.’
양번 전체가 활기찬 것은 장수 덕분이었다. 공주의 호위를 가기 전에 산적들을 세 번이나 토벌했고, 그것을 매매한 상단들이 큰 자금을 벌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번 자금은 양번을 풍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장수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석가장 사업체로 향했다.
석가장의 사업체들은 모두 잘되고 있었다. 초창기에 고생을 해서인지 이제는 알아서 잘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장수는 사업체들을 하나씩 살핀 후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서 경계를 서던 무사들이 장수를 보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 소장주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에 사정을 잘 모르는 무사들은 소장주가 어디에 갔었는지 알지 못했다.
“예, 그렇습니다. 소장주님,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단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단주가 꽤나 걱정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집무실에 들어가자 서류를 살피던 단주가 장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 소장주님!”
“단주님, 오랜만입니다!”
“뭔 상행을 그리 오래 다녀오십니까?”
단주로서는 장수가 왜 이렇게 늦었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단주에겐 토벌군을 따라간다고 말했기에 설마하니 감찰단의 호위가 되어 공주를 호위하고 왔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번 호위 때 태반이 죽었으니 장수 역시 고혼이 되었는지 알고 걱정을 했을 게 분명했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수로선 매우 난감했기에 어느 정도 말을 만들어야 했다.
“사실 이번에 황실과 어렵게 연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황실에서 석가장에 대폭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장수가 황실과 손을 잡았기에 받은 대가라 할 수 있으니 이번 일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정말입니까? 대단하십니다!”
황실과 연을 맺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더구나 상단의 입장에서는 크게 발전할 기회인 것이다.
단주는 크게 기뻐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황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요. 황실과의 관계는 실에 의지한 연과도 같습니다. 황실이 원하면 언제든 실이 끊어져 날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황실과의 관계가 악화된다면 오히려 관계를 맺은 것이 독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단주의 말에 장수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상인이란 모험을 해야 하는 직업 아닙니까? 그냥 무섭다고 움츠러들면 아무것도 못할 수밖에 없겠지요. 차라리 이번 기회에 공격적으로 사업체를 늘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공격적으로요?”
“그렇습니다. 황실을 믿고 사업체를 늘렸으면 합니다!”
장수의 말에 단주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중이 되면 알게 될 것입니다!”
“휴…… 어차피 앞으로는 이곳에 계실 테니 천천히 설명을 해주십시오. 다음 상행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전쟁의 기운이 돌아서인지 물품 요구량이 매우 많아져 그 양을 채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잘되었군요!”
“잘되다니요? 전쟁이 나서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단주의 말에 장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감당을 할 수 있습니까?”
장수의 말에 단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제 장주님도 오셨으니 좀 더 확장을 해야지요!”
단주의 말에 장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제가 이번에 일이 생겨서 멀리 가봐야 합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아까 황실과 연을 맺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문에 황실의 일을 해주어야 해서 잠시 어딘가로 가야 합니다!”
“어이쿠! 무슨 일입니까? 혹시 위험한 일입니까? 왜 하셨습니까? 지금이라도 취소하십시오!”
“아닙니다. 취소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요!”
장수의 말에 단주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황실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을 대행하는 것인데, 상당한 거리를 가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제법 걸릴 거 같습니다!”
“대행이라니요?”
“그런 게 있습니다. 제법 큰 거래라 이윤이 많이 남을 거 같습니다!”
장수의 말에 단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윤이 많이 남을수록 위험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소장주님께서는 생각을 고치셔야 합니다!”
‘이윤이 많을수록 위험이 커진다? 맞는 말이지.’
장수 역시 혈교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무리 혈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혈교는 매우 위험한 곳이고, 비밀 시설은 특히 엄중한 경계를 하는지라 자세한 것을 알지 못했기에 더 위험했다.
하지만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혈교의 음모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것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황실에서는 제 장사 솜씨만을 샀을 뿐이니 안전하게 장사를 할 수 있습니다!”
장수의 말에 단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소장주님은 어린이가 아니니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시는 게 맞겠지요. 하지만 소장주님은 항상 소장주님 어깨에 석가장 식구들의 운명이 걸렸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저는 식구들의 운명이 제 어깨에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떠나실 겁니까?”
단주의 말에 장수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당장입니다!”
“예?”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무슨 일이 그리 급합니까?”
“황실의 일이라 한시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그, 그럴 수가!”
장수는 미소를 지으며 단주에게 말했다.
“그럼 저 먼저 가겠습니다. 단주님, 뒷일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장수는 그 말을 끝으로 급하게 빠져나갔다.
단주가 그런 장수를 불렀다.
“소, 소장주님……. 소장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