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밀공-16화 (16/125)

# 16

서화는 자신이 지켜야 할 바를 충실히 지켰다.

“큭!”

석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분명히 루검비의 비명이다. 일 년 가까이 들어온 소리이니 잘못 들었을 리 없고, 비명의 강도로 보아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게 틀림없어 보인다.

서화는 잠시 망설였다.

‘가봐야 되는 것 아냐?’

그녀의 갈등은 찰나 만에 끝났다.

본분을 지키자. 석실은 루검비의 영역이다. 루검비가 석실에서 난장을 피운다 해도 간여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두들겨 패는 게 낫지, 이거야 원.’

연어반회(輭語返回), 추소수로(追溯水路). 체중십배(體重十倍), 점증압력(漸增壓力).

앙칼진 여인이 가르쳐 준 첫 번째 무공 구결이다.

연어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체중의 십 배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이 말이 무공구결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연어반회 추소수로라는 말을 생각하는 순간에 생전 처음으로 무엇이든 때려 부실 것 같은 무지막지한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공구결이 맞다.

벽화 중에 연어가 폭포를 거슬러 오를 때처럼 바닥에 누워 있다가 툭 튀어 오르는 그림이 있다.

여인은 찰싹 달라붙어 있다. 두 팔은 목을, 두 다리는 허리를 감았다. 사내는 두 손을 한데 모아 위로 쳐들었다. 높은 곳에서 물로 뛰어들 때처럼 날렵한 모습이다.

밑에서 위로 솟구치는 형태만 아니라면 상당히 멋있었을 텐데.

연어반회, 추소수로에 맞는 그림이다.

이 그림도 극심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밑에서 위로 올라서는데 무엇인가 빠졌다는 걸 감지했다. 바로 무게다. 여인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여인의 무게가 없는 만큼 솟구치는 동작이 빨라졌다.

무릎이 부러졌다 싶을 만큼 아팠다.

상식과 어긋나는 고통이다. 대체로 많은 짐을 지고 일어났을 때 무릎 통증이 생긴다. 짐이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무릎이 견뎌내야 하는 압력을 줄어든다.

헌데 연어반회는 정반대다. 실제로 큼지막한 바위를 안고 일어섰을 때는 통증이 없었다. 허나 바위를 버리고 맨몸으로 일어서자 무릎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회의(懷疑)도 든다.

무공인 것 같아서 따라하고는 있지만 이런 것들을 어디 써먹을까 싶다. 주먹을 내지르거나 발을 쓰는 법은 전혀 없고, 모두 이상한 움직임들뿐이니.

그렇다고 그만둘 생각을 한 건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석실을 탈출하면서 환희밀공의 효험을 단단히 맛 봤는데.

그것도 그렇다. 요즘 들어서 생각나는 것이지만 원래 ‘육반 루가’하면 장사로 소문난 가문이 아니던가.

근력이 붙기에는 어린 나이지만 숨겨진 힘이 있었던 건 아닐까?

여자가 엎드려 있다. 남자는 쟁기 들듯이 여자의 두 다리를 들어 올린다.

그림은 그것으로 끝이다.

루검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림에 해당되는 글귀를 찾을 수 없다. 다른 그림들은 쳐다보는 순간 딱 맞는 글귀가 떠올랐는데, 다른 그림에 비해 훨씬 단순해 보이는 그림에는 맞는 짝이 없다.

삼백육십오 자를 처음부터 다시 읊어봤다.

역시 없다.

“하기는!”

루검비는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그림은 모두 백팔십 개다. 환희밀공의 글자는 삼백육십오 자다.

모든 그림에 맞는 글자가 있으려면 그림 하나당 글자 두 자가 배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니었잖은가. 여덟 자, 혹은 열두 자. 어떤 것은 열여섯 자까지 늘어진 것도 있었다.

그림들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쩝! 교주님도 모르는 것이 있었네. 뭐야? 그럼 환희밀공을 일부분만 익히고 있다는 거야? 어쩐지 힘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더니.”

약간은 아쉬웠다. 헌데!

“어! 진입애호(進入愛好)!”

자신도 모르게 환희밀공 속에 없는 전혀 엉뚱한 글자가 튀어나왔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번쩍하더니 ‘진입애호’란 말이 떠올랐고, 입 밖으로 쏟아냈다.

환희밀공 속에 진입애호란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심해진입(深海進入)이란 말이 있다. 깊은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 같다. 애호(愛好)는 이봉애호(二峰愛好), 두 봉우리를 아낀다? 사랑한다? 그런 뜻 같은데 이해할 수 없고……

심해진입과 이봉애호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두 글귀 사이에는 무려 백여 자에 이르는 글자가 존재한다.

도저히 이어붙일 수 없는 글자들이 연결되어 진입애호라는 말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루검비는 ‘진입해호’를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그림에서처럼 여인의 두 다리를 잡아서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어떤 고통이 다가올까 긴장했지만 허공을 움켜쥘 때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헤! 이럴 때도 있네.”

고통이 없어도 배우는 것이 있는가? 고통이 없으면 좋지 않은가. 진입애호를 알았고, 그림을 이해했으니 된 것 아닌가.

루검비는 다음 그림을 향해 돌아섰다. 순간,

“크윽!”

느닷없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왔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데, 구결도 외우지 않았고, 단지 몸만 돌렸을 뿐인데.

‘하중집력(下中集力)! 하중집력 진입애호!’

허리 통증은 하물의 불기둥이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기둥이 하물로 모이려는 순간에 몸을 움직인 탓이다.

진입애호는 아무런 통증도 수반하지 않는다. 허나 그 전에 있어야 할 하중집력을 무시하면 허리가 두 동강 난다.

불기둥을 하물에 집중시킨 후, 그림에서처럼 여인의 두 다리를 들어올렸다.

그제야 허리 통증이 가셨다. 허나 모든 그림을 수련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당해야 하는 고통, 최종적으로 불기둥이 산산이 흩어지며 육신이 찢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만은 피하지 못했다.

“끄으윽……!”

인법에서는 비명을 삼킬 수 있었지만 지법에서는 고통의 종류를 알고 있으면서도 참지 못했다.

2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순환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눈 깜짝할 사이에 세 해가 지났다.

루검비의 나이도 한 자리에서 두 자리로 올라섰다.

열 살.

치기(稚氣) 어린 나이임은 분명하지만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나이도 아니다.

루검비는 성장했다.

육체적 성장은 놀라울 정도다. 누가 육반 루가의 자손이 아니랄까봐 키는 웬만한 어른과 버금갔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그림을 흉내 내거나 산을 뛰어다니는 것뿐이다. 헌데 이런 행동이 무가(武家)의 기본공(基本功)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몸집이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팔다리에 근육이 붙었다. 군더더기 살은 자리 잡지 못했다. 산토끼처럼 날렵해서 하루 종일 산을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았다.

반면에 성격은 많이 가라앉았다.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이 산 속에서 삼 년을 보낸다는 것은 이상 성격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루검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바위를 보고, 나무를 보고, 하늘에 대고, 땅에 대고…… 친구를 대하듯 히죽 웃으며 말하곤 했다.

말의 내용은 의미가 없다. 잘 잤어? 잘 있었어? 오늘은 기분이 어때? 같이 산보나 할까? 등등 남이 들으면 정신병자로 오인받기 딱 알맞을 소리들이었다.

특이한 변화 중에 하나는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는 거다.

그는 더 이상 치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징그러울 정도로 낙관적인 성격이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변했다.

당연한 현상이다.

어린 나이에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 온 몸에 가득 새겨져 있는 고문의 흉터, 그리고 산속에서의 고독한 생활은 성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루검비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침울해지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푸득! 푸득! 푸드득! 푸득!

황소만한 멧돼지가 콧김을 불어대며 씩씩거린다.

올무에 걸린 게 없나 돌아보던 중,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멧돼지와 마주치고 말았다.

“넌 뭐니?”

루검비는 멧돼지를 알지 못했다.

난생 처음 보는 동물이다. 지난 삼 년간 상당히 먼 곳까지 돌아다녔지만 이런 동물은 본 적이 없다.

덩치가 집채만 한 놈이니 힘은 있을 것이고, 송곳니가 창처럼 삐죽 솟구쳐 나와 있으니 공격 형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돌진(突進)이다.

“그러지 마. 너와 내가 싸우면 둘 중에 하나는 죽어. 난 죽고 싶지 않으니 네가 죽어야 하는데, 나 오늘 기분 좋거든? 그냥 가라.”

루검비는 멧돼지의 행동에서 돌진을 예감했다.

짐승들의 행동은 무척 단순하다. 낯선 것을 우연히 만났을 때 나타내는 반응은 더 단순하다. 자신보다 약한 것이면 달려들고, 강하다 싶으면 꽁지가 빠지게 달아난다.

멧돼지는 달려든다. 루검비가 약자라고 판단한 게다.

푸득! 파파팟!

산비탈을 구르듯 치달리며 달려든다.

무척 빠르다. 뚱뚱한 몸, 짧은 다리로 봤을 때는 움직임이 둔할 것 같았는데,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비호가 따로 없다.

루검비는 방심하고 있다가 코앞에서 멧돼지를 맞이했다.

“엇!”

엉겁결에 고함을 내질렀다.

정녕코 멧돼지가 이토록 빠를 줄은 상상치 못했다. 둔중한 물체가 굴러 떨어지는 것을 피하면 되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허나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았다.

조천공비(鳥天空飛)!

박쥐가 하늘을 날 때처럼 사지를 활짝 펼치고 뛰어오른다.

물론 석벽에는 여자가 있었다.

조천공비 밑에 등을 보이고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는 모습이 단잠을 즐기는 듯 보였다.

“큭!”

지독한 통증이 삼 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푸드득! 퍼득!

멧돼지는 배 아래로 광풍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 자식 꽤 사납……”

싸움이 끝난 줄 알았다. 장애물을 제거한 멧돼지가 제 갈 길로 갈 줄 알았다. 헌데 놈이 돌아선다. 끝장을 보겠다는 심산인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사람을 찾아냈다.

“이 자식, 이제 보니 날 먹이로 아는군. 너 실수한 거야.”

멧돼지는 루검비의 말을 비웃는 듯 머리를 휘저으며 콧김을 내뱉더니 냅다 달려들었다.

조천공비가 다시 한 번 펼쳐졌다.

멧돼지를 몸 아래로 흘려보내는 데는 많은 수법이 있지만 다른 수법을 쓸 생각은 없다. 당장 증명된 것부터 쓴다. 안전하다고 판단된 것부터 사용한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루검비는 배 아래로 지나가는 멧돼지를 봤다.

“안월과산(雁越過山)!‘

기러기가 산을 넘어간다. 다음은 영접태양이다. 태양을 맞이하려고 힘차게 날아오른다.

두 팔에 힘이 가득 찼다.

이대로라면 날개가 없어도 훨훨 날아갈 것 같다.

루검비는 기러기가 날갯짓을 하듯이 힘차게 팔을 휘둘러 멧돼지의 등을 타격했다.

퍼억! 꽤왝!

멧돼지는 단발마의 비명을 토해내더니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하고 푹 꼬꾸라졌다.

“거봐, 자식아. 너 실수하는 거라고 했잖아.”

멧돼지는 아직 살아있었다.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친다. 꽤액! 꽤액! 온 산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지르며 사지를 꿈틀거린다.

루검비의 일격은 정확하게 등뼈를 부러트렸다.

결코 일어설 수 없다. 사람이라면 사지가 마비된 상태에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가며 살겠지만, 짐승의 세계에서 부상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안월과산!“

루검비는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러 머리 정중앙을 강타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 아니다. 극통이다. 환희밀공은 확실히 미완성이다. 석실에 있는 것이 무공이 아니라 고통만 주는 것이라서 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석실에 있는 자세를 취하면 말 못할 극통 때문에 쩔쩔 매곤 한다.

처음에는 신음을 토해냈다.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일 년이 지날 무렵에는 식은땀만 흘렸다. 신음은 토해내지 않았다. 허나 등이 꺾인 사람처럼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한 동안 쩔쩔 매야만 했다.

이제는 고통에서 벗어나는데 일다경(一茶頃) 가량이 소요된다. 많이 나아진 것이다.

루검비는 그 시간동안 눈을 감고 아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통을 견뎌냈다. 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올랐지만 교주도 생각나고 수두화와 원수처럼 미운 형당 십 화녀도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육화녀와 두 아이의 얼굴을 떠오르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 여덟 명 중에 얼굴을 본 사람은 세 사람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만남의 시간이 너무 짧았던 탓에 얼굴 윤곽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휴우!”

고통이 가시자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멧돼지는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있었다.

오랜만에 고기로 포식하게 생겼다.

멧돼지는 앞으로 며칠간, 보관하기에 따라서는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맛좋은 고기를 제공할 것이다.

그것보다 더 반가운 것도 있다.

새로운 흥밋거리가 생겼다. 석벽의 그림들을 잘 조합하면 멧돼지 같은 맹수도 단숨에 때려잡는다. 어떤 그림은 신법(身法)으로 활용할 수 있고, 어떤 것은 공수(攻守)에 응용된다.

벽화를 따라하면서 제발 무공이기를 간절히 바랬는데, 멧돼지를 때려잡고 보니 지금까지 쓸모없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환희밀공 구결도 다시 한 번 점검해 봐야 한다.

억지로 고통을 이겨내는 건 한계가 있다. 고통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루검비는 멧돼지를 질질 끌고 갔다.

‘깨끗해!’

서화는 솔직히 감탄했다.

방금 전, 멧돼지와 한판 승부를 벌인 사람은 열 살 배기 꼬마가 아니다. 무림문파에서 정식으로 수련을 받은 무인이다. 그것도 상당한 기간 동안 온정신으로 수련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산뜻한 동작은 나오지 않았을 게다.

멧돼지를 때려잡을 사람은 많다. 단지 때려잡는데도 박수를 보낼 사람이 있고,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데 루검비의 몸동작은 벌떡 일어서서 박수를 쳐줄 만큼 깨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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