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루검비는 허물어졌다.
그에게 선녀의 유혹을 밀쳐낼 만한 의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교주의 품은 일단 휘말리면 정신없이 빨려들고야 마는 수렁이었다.
“어서! 어서!”
어른이 되기를 재촉하는 교주의 음성이 귓전을 간질였다.
“헉!”
루검비는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꿈이었나. 교주와 정사를 나눈 건 불경스럽지만 그렇다고 잊고 싶지도 않은데. 아니, 꿈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꿈으로밖에 이룰 수 없는 것이었나.
교주와의 관계가 사랑 운운할 만큼 깊은 건 아니다. 솔직히 교주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주 자상한 분이었다는 막연한 생각만 맴돈다.
그럼에도 지난밤의 일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것은…… 꿈속의 정사가 너무도 황홀했기 때문이다.
서화의 음기를 빨아들이면서 극에 이른 쾌감을 맛봤다.
세상을 살면서 그만한 쾌락은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할 줄 알았다.
느꼈다. 그보다 훨씬 큰 쾌락이다. 벼락이 전신을 관통하는 듯한 충격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서 오직 즐거움밖에 떠오르지 않을 만큼 황홀했다.
일장춘몽(一場春夢), 모든 게 꿈이다.
환상…… 일면 다행스럽고 일면으로는 아쉽다.
“그래도 다행이지. 교주님과 그런 일을……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쳐 가는…… 헛!”
루검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말고 경악성을 내질렀다.
꿈이 아니었다. 간밤의 정사는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알몸의 여자가 누워있다. 축 늘어진 모습으로.
“이게……?”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저 여자는 누구며, 왜 이런 곳에서 죽어있는가. 왜 알몸인가.
생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루검비는 황급히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멈칫거렸다.
자신 역시 알몸이다. 옷은? 있다. 사방에 흩어져 있다. 상의는 찢겨있기까지 하다.
“이게…… 이게……”
무슨 말인가 나오려다 만다. 머릿속에는 수만 마디의 말이 떠오르는데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갑자기 백치라도 된 냥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여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느낌처럼 여인은 이미 죽어있었다.
“내가…… 내가 죽였어.”
힘없는 말이 탄식처럼 새어나왔다.
막연히 말하는 게 아니다. 승장혈과 수분혈에 푸른 반점이 보인다. 바로 환희밀공의 흔적이다.
그 외에 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초(下焦)를 살펴보기가 민망하여 흘깃 훔쳐봤지만 능욕 당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제 여인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명확해졌다.
강제로 옷이 찢기고 능욕을 당하려는 찰나, 환희밀공이 일어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음기를 빼앗긴 끝에 절명했다.
더 이상 무슨 변명거리를 찾는단 말인가.
처음 보는 여인…… 생면부지의 여인이 깊은 산골에는 웬일이란 말인가. 자신과는 어떻게 만난 것인가.
관계를 갖고 싶지 않았으리라.
죽고 싶지 않았으리라.
여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놈에게 걸렸으니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게다.
루검비는 착잡한 심정으로 앉아있었다. 일다경, 이다경…… 반각이란 시간이 무심히 흐르는 동안 애꿎게 죽어간 여인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언젠가는 꼭…… 이 죗값을 받을 게요.”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이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여인을 묻었다.
땅을 깊게 파고 여인을 눕혔다.
찢어진 여인의 옷도 일일이 찾아서 같이 묻어주었다.
여인은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던 것 같다. 옷이 참으로 매끄럽다. 손에 기름칠을 한 듯 슬슬 미끄러진다. 이게 비단인가?
여인은 무인이었다.
여인의 장검을 찾았다. 검신(劍身)에 봉황(鳳凰)이 음각(陰刻)되어 있고, 검격(劍格)에는 백옥(白玉)이 여섯 개나 박혀 있다. 붉은 빛이 감도는 검집도 화려하다.
루검비는 검을 유심히 살폈다.
검 끝에 달려있는 기다란 수술부터 검선(劍先)까지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도록 보고 또 봤다.
봉황의 문양이나 검집의 독특함도 뇌리에 새겼다.
죽은 여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지 않은가.
키는 오 척이 조금 넘고, 몸무게는 열두 관 정도 된다.
여인의 모든 것을 기억에 남겼다.
“이런 말…… 휴우! 들리지도 않겠지만…… 정말 언젠가는 꼭 이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꼭!”
루검비는 흙을 덮은 후에도 해가 중천을 넘어설 때까지 일어서지 못했다.
서화는 여전했다. 석관에 누워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
좋은 현상이다. 물속에서 잠을 청한다는 것은 그만큼 기력이 돌아왔다는 뜻이다.
기력이 더 쇠해졌을 경우도 있지만 그때는 얼굴빛이 푸르게 변하니 금방 알아본다.
서화는 좋아지고 있다.
“휴우!”
루검비는 가는 한숨을 내쉰 후, 석실에서 물러났다.
오늘, 이름 모를 한 여인이 죽었다. 그가 상처를 입힌 또 한 여인은 죽음 직전에서 간신히 목숨만 구명한 상태다.
‘후후! 나란 놈…… 여인에겐 재앙이군.’
여인과 살을 맞대지 말라는 말을 절대 규칙으로 삼은 적이 있다. 이제 그 말을 변경한다. 절대 여인과 만나지 말라로.
헌데…… 헌데? 느낌이 다르다.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루검비는 섬광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어서 황급히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서화를 봤다. 그녀가 잠들어 있다.
그것뿐이다. 그녀에게서 욕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
루검비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물에 젖은 그녀의 몸이 보인다. 가슴의 굴곡이며, 작은 포도송이며…… 그녀의 몸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전 같으면 껴안고 싶어서 미쳤을 게다.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 느낌도 안 든다. 아니, 너무 불쌍해서 잘 돌봐주어야겠다는 생각만 든다.
그러고보니 죽은 여인을 묻어줄 때도 담담했다.
죽은 여인이라지만 발가벗고 있지 않았나. 어느 때 같았으면 시간(屍姦)이라도 하고 싶어서 미쳤을 텐데, 티끌만한 욕념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렇지도……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환희밀공의 업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찾아올 지 알 수 없다.
서화를 보고도, 발가벗은 여인의 몸을 보고도 욕정을 느끼지 않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한다.
루검비를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았다.
3
음과 양의 조화는 반고(盤固)가 하늘과 땅을 구만 리나 떼어놓을 때부터 존재했다.
삼오력기(三五歷記)는 말한다.
천지가 개벽하여 양(陽)은 맑아서 하늘이 되고, 음(陰)은 탁해서 땅이 되었다. 반고는 날마다 한길씩 길어졌다. 하늘은 날마다 한길씩 높아졌고, 땅은 한길씩 두꺼워졌다. 반고가 일만 팔천 살이 되었을 때, 하늘과 땅의 거리는 구만 리가 되었다.
음양의 조화는 세상이 탄생하면서부터 존재했다. 하여 하늘 아래 모든 동식물이 음양의 지배를 받는다.
그중에서 가장 핵심은 단연 번식이다.
식물은 씨를 만들고 퍼트린다. 동물은 상대를 찾아 짝짓기를 한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긴다. 골목에서 개가 교접하고 있어도 당연하게 여기며 지나친다.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은 돈을 들이면서까지 짝을 지어준다.
교접 장면 같은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식물에게는 번식만 존재한다.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동식물처럼 번식 때문에 정사를 나누기도 하지만 즐거움 때문에 나누는 경우도 훨씬 많다.
그렇다! 인간의 음양조화에는 즐거움이 있다.
환희교는 자연이 준 섭리를 순수하게 따른다. 변질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음양조화를 이끌어낸다. 어느 한쪽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정사를 나누는 꽃과 나비 모두가 최상의 쾌락을 얻도록 노력한다.
환희교는 정사만 밝히는 음탕한 집단이 아니다. 자연의 섭리를 충실히 따르고자 할 뿐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나 여성상위(女性上位)가 아닌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아껴주려고 한다.
운우지락? 성교?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물을 단편적으로 보는 사람이 환희교를 보면 음탕함 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성교의 비중을 아주 낮게 잡고 아껴주는 마음을 중시하면 사랑이 보일 것이다.
환희밀공을 이해하려면 환희교부터 봐야 한다.
환희교의 밑바탕에 깔린 것이 사랑이라면 환희밀공 역시 사랑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지금까지 인법, 지법, 천법을 거치며 수련한 환희밀공에는 사랑이 없다.
수련을 잘못했다.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
환희밀공은 음양의 순환이어야 한다. 음기든 양기든 빼앗아오기만 하는 건 환희밀공의 틀에서 벗어나는 행동이다.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없다.
음양의 순환이라……
인법에서 미지의 여인에게 들은 구결을 다시 되짚어 봤다. 지법에 그려진 그림들을 자세히 떠올렸다. 천법에서 겪은 경험도 세세하게 되살렸다.
환희밀공을 뿌리부터 다시 연구했다.
헌데 없다. 주고받는 과정이 없다. 빨아들여 내 것으로 만들던지 완전히 내주어 폐인이 되거나 죽는 경우밖에 없다.
여자와 정사를 벌이면 둘 중에 한 명은 죽는다.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환희교의 교리에 충실한 환희밀공이라면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정사를 벌이는 남녀 모두가 기력을 보강해야 마땅하다.
오랜 참오 끝에 여자를 보고도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만 간신히 찾아냈다.
음기가 충실해졌기 때문이다.
서화의 음기를 흡취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음기보다는 양기가 많았다. 양기는 음기 맛을 봤기 때문에 더욱 미쳐서 날뛰었다. 그러다가 이름조차 모르는 여인의 음기를 빼앗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이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쥐어 짜내서 목숨까지 잃게 만들었다.
그러자 비로소 음양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보통 사람들은 육신 자체가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기능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어느 한 쪽 기운이 지나치게 모자라거나 왕성하면 병증(病症)을 나타내는데, 자신은 공격성향으로 돌변한다.
지금이 딱 알맞다. 음기와 양기 중 어느 한쪽도 지나치지 않는다. 여기서 음기를 더 취한다면 이번에는 양기를 취하기 위해 발버둥 칠 게다.
양기를 얻기 위해 사내들을 죽이려 들 것이라는 이야기다.
양기가 지나치면 간살(姦殺)을 생각하게 되고, 음기가 지나치면 살인마가 된다.
환희밀공을 수련했지만 사용할 수 없다. 그래도 굳이 사용하겠다면 남자와 여자를 고루 죽여야 한다.
‘헛수고 한 거야. 아무 것도 한 게 없어.’
허탈했다. 힘을 길러 아버지의 복수도 하고, 교주를 위해 수문장도 하려고 했건만 무공을 쓸 수가 없다. 꿈같은 어린 시절을 혹독한 고문과 고독 속에서 지냈건만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렸다.
루검비는 실의에 빠져 사흘 밤낮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화!’
잊어버리고 있었다. 기력이 쇠잔한 그녀는 누가 보살펴주지 않으면 밥조차 먹지 못한다. 밥을 해먹는 것은 고사하고 차려놓은 밥을 떠먹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그녀를 깜빡 잊었다.
루검비는 힘없이 걸어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서화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일어나고 싶어도 기력이 없으니 쉽게 청할 수 있는 잠에 빠져든 것이다. 더군다나 삼 일 동안이나 물속에 방치해놨으니 자칫 체온저하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루검비는 급히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으음!”
서화가 잠꼬대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무방비 상태의 여인.
불쑥 욕망이 치솟는다. 음양의 균형이 맞춰져 욕정이 생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또 다시 치민다. 무슨 짓을 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여인을 손에 넣었다는 자극이 욕정을 다시 일깨웠다.
“이런 제길! 지금 뭐하는 거야! 원하는 게 뭐야!”
루검비는 하늘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원하는 게 색마(色魔)인가? 그럼 색마가 되어줘? 색마가 되어 세상 여자들은 겁간하고 다니면 그제야 원이 풀리려나.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며 욕정을 참았다.
정말 참기 힘들다. 육봉(肉峰)이 딱딱하게 곤두서며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성은 욕정을 떨쳐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생각을 하자는 말도 한다. 허나 눈길은 자꾸 서화의 가슴을 헤집고 있다. 옷이 물에 젖어 살에 착 달라붙었으니 오죽 잘 보이랴.
“미치겠네. 정말 미치겠어.”
간신히 석실 밖으로 나와 뜨거운 햇볕 아래 서화를 뉘였다.
한 숨 돌렸나?
루검비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먹을 걸 가져올 게요.”
토끼라도 잡아갈 심산이었다. 잡새라도 잡아서 고기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서화의 모습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채 떠나지 않는다.
측은하다는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사람이라는 느낌도 없고, 오로지 쾌감을 줄 수 있는 도구로만 보인다.
조급한 마음도 치민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꼭 누군가 낚아채 갈 것만 같다. 반송장에 가까운 몸이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이니 나무처럼 땅에 박아놓을 수도 없고……
‘안 되겠어!’
루검비는 석실을 향해 달음박질했다.
서화는 자고 있지 않았다. 기력이 떨어져서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던 차였다.
그녀는 자신의 등을 받치고 있는 손에서 욕망을 읽었다.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모습에서 악마의 저주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