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서화의 외침은 텅 빈 허공만 울렸다.
그녀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여 명이나 되는 절정 무인들,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무적의 전사들 앞에 제정신이 아닌 듯이 보이는 폐인 한 명쯤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 돼!’
루검비는 무인들의 뜻을 알아챘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원한다. 허나 당장은 아니다. 우선은 생포할 것이고, 고문을 가한 후에 천천히 죽음을 안길 것이다.
그런 죽음은 너무 고통스럽다.
끝없이 악의 유혹과 싸울 자신이 없다.
루검비는 벌떡 일어섰다.
“흐흐흐! 흐흐흐흐!”
그의 입에서 음침한 색마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발악하지 마라.”
무인이 말했다.
쒜엑!
루검비는 신형을 날림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이 자식이!”
루검비에게 선택된 자는 한 걸음 물러서며 검을 쳐들었다.
금령의 죽음은 굉장히 심각하다. 간단히 목숨 하나 빼앗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용검대주의 명령도 있다. 직접 처단하겠다고 했지만 금령의 죽음과 얽혀있는 자이니 대주에게도 처단 권한은 없다고 봐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생포해서 본가로 끌고 가야 한다. 위협만 줘서 스스로 물러서게 해야 한다.
파아앙!
검이 순식간에 열 개로 늘어나 허공을 휘저었다.
루검비가 나아가는 곳은 온통 검기(劍氣)로 그득하다. 상관세가의 독문 무공인 천수검법(千手劍法)이 펼쳐진 것이다.
그는 그것으로 루검비가 물러설 줄 알았다.
쒜엑!
루검비는 눈부시게 빨랐다. 어느 틈에 검막(劍幕)을 찢고 들어와 오른손 완맥을 움켜잡았다.
“뭐야! 헉! 컥!”
사내의 칠공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새카맣게 죽은 피다. 검은 피가 끝없이 흘러내린다.
사내의 눈이 뒤집혔다. 검은 눈동자가 위로 말려 올라가더니 두 눈 가득히 흰자위만 남았다.
“크크크!”
루검비의 승리의 웃음을 흘렸다.
허나 이 웃음은 그가 흘린 게 아니다. 사내의 양기와 접하는 순간, 더 많은 기운을 얻고자 하는 욕념이 꿈틀거렸다.
이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다. 이들 모두가 자신에게 기운을 넘겨줄 종자(種子)들이다.
그의 웃음은 한 사내를 죽인 승리의 웃음이 아니라 선을 무너트린 악마의 웃음이었다.
“저, 저놈!”
쒜에엑!
다른 자가 검을 쳐냈다.
이번에도 검이 열 개로 쭉 불어났다. 마치 얇은 면검(綿劍) 열 개를 한 테 묶었다가 일시에 풀어낸 것 같았다.
맞다. 천수검법은 면검 열 개를 묶어 부챗살처럼 활용한다. 진기를 돋워 검을 펼쳐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초식이 된다. 하물며 초식까지 전개하면 열 개의 검은 순식간에 백 개로 늘어난다.
쒜엑! 쒜에엑!
스무 개, 서른 개……
손오공이 분신술이라도 펼친 듯 면검이 수십 개로 불어났다.
탁! 타악!
루검비는 그 중 두 개만 건드렸다.
사내를 붙잡기 위해서는 방해물을 제거해야 한다. 수십 개의 검 중에 장애가 되는 건 두 개뿐, 나머지는 허공을 제멋대로 나도는 것에 불과하다.
루검비는 검막을 뚫고 들어가 사내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곧 겨드랑이 사이로 빙그르 돌아서 등을 점했다.
뒤에서 앉아있는 사람을 일으킬 때처럼 양 손은 겨드랑이 사이에 들어가있다.
완전히 제압된 것이다.
“헛! 컥!”
두 번째 사내도 첫 번째 사내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주루륵!
칠공에서 피가 쏟아진다. 인상을 찌부러질 대로 찌부러졌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사내의 얼굴이 핏기 한 점 없는 백면(白面)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루검비는 반공(胖功)을 쓰지 않았다. 채음보양의 정수인 간공(干功)을 사용했다. 양기를 들여보내 사내의 양기와 합류한 다음, 가차 없이 뽑아냈다.
승장혈로 들어가서 수분혈로 나오는 일상적인 경로도 거치지 않았다. 어디로 들어가 어디로 나왔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사내의 양기를 모두 뽑아버렸다.
그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아주 간단하게 채양보양을 펼쳐 보인 것이다.
가슴에 용 문양을 한 사내들은 한데 모여 있지 않았다. 루검비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수하를 이끌고 열 방위를 점한채 서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뜻이 모아졌다.
“죽여라!”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명이 떨어졌다.
쒜엑! 쒜에엑!
검이 몸을 훑고 지나간다.
등이 사선(斜線)으로 그어지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시원하다. 통쾌하다. 꽁꽁 묶인 채로 형당 도수들에게 칼을 맞을 때보다는 훨씬 낫다. 그래도 지금은 손발이나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은가.
쒜에엑!
검이 허벅지를 그었다.
당장 신법이 둔해진다.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지금보다 서너 배는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굼뜨기만 하다. 오죽하면 날아오는 검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겠나.
사각! 사아악!
가슴에서부터 복부까지 횡(橫)으로 사선(四線)이 그어졌다. 면검 네 자루가 일시에 훑고 지나간 것이다.
루검비는 손을 들어 배를 꾹 눌렀다. 틈이 길게 벌어지면 내장이 쏟아진다.
사내들의 합공은 무서웠다. 열 개의 검이 아니라 수천 개의 검이 일시에 날아왔다. 한 명을 상대할 때는 뚜렷이 보이던 허점이 수십 명과 대적하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로 날아갈 수 있다면 또 모른다. 땅으로 꺼질 수 있다면 어떻게든 빠져나가리라.
지금은 안 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악마는 참 치사하다. 기껏 싸우라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 온몸이 난자당하니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마음도 없어졌다. 오직 환희밀공의 비밀을 안고 깨끗이 죽게되니 다행이란 생각뿐이다.
루검비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한계가 왔다. 왼쪽 다리는 벌써 마비되었다. 피를 너무 쏟은 탓에 정신도 혼미해진다.
이런 경험…… 많다. 인법에서 숱하게 겪었다. 숨 몇 번 몰아쉴 순간이면 정신을 놓을 게다.
‘아버지.’
묘하다. 마지막 순간에는 어머니가 생각날 줄 알았다. 어머니에게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막연하게나마 어머니의 영상이 그려지지 않을까 싶었다.
아버지가 그려진다.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수염도 거칠게 기르셨다. 부릅뜬 눈은 적을 노려본다. 오뚝한 코를 타고 핏물이 흐른다. 입술은 아예 새빨간 선홍빛이다.
아버지의 복수도 끝이다. 모두, 모두 끝이다.
“후후후! 후…… 후!”
루검비는 웃으면서 고개를 꺾었다.
“천수강막(千手剛幕)이 원래 약한 거야, 이놈이 강한 거야.”
“이놈이 강한 거야. 일 대 일로는 우리들 중 누구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해.”
“그렇…… 겠지.”
무인들은 쓰러진 루검비를 내려다보면서 치를 떨었다.
루검비 주위에는 부러진 검날이 수북이 쌓였다.
상관세가의 검은 얇디얇은 면검이지만 잘 부러지지 않는다. 면검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철 중에서도 단단하기로는 단연 으뜸이라는 빙철(氷鐵)을 사용했고, 거기에 고무처럼 질긴 탄성을 지니라고 적사(赤沙)를 섞었다.
상관세가의 검을 자르거나 부러트릴 수 있는 검이 있다면 천하명검이라고 추켜세워도 무방하다.
루검비는 죽은 자가 지녔던 검을 사용하여 수십 자루나 잘라냈다.
같은 강도로 주조된 검이다. 면검과 면검이 만나면 강한 부딪침만 생길 뿐이지 잘라지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루검비는 무우 베듯 잘라냈다.
그가 지닌 검은 아직도 멀쩡하다. 검을 휘두르던 육신은 쓰러져 있지만 면검 한 자루만은 많은 피를 머금은 채 귀기(鬼氣)를 발산하고 있다.
귀신처럼 빨랐다. 그의 검에 걸리는 것은 모조리 잘렸다. 사람의 뼈마디는 물론이고 검이나 돌, 나무도 싹둑싹둑 베어져 나갔다.
가주도 깜짝 놀랄 만큼 대단한 내공이다.
무인들은 루검비의 내공이 어디서 나왔는지 안다.
동료 두 명을 죽였을 때만 해도 그는 강하기는 했지만 해볼 만한 상대였다. 그 뒤로 한 명이 더 죽었다.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패그르르 쓰러졌다.
그 후로 루검비는 더 강해졌다. 빠른 신법에 의존할 뿐 초식다운 초식을 구사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검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한 명이 더 죽었다. 그리고 루검비는 그만큼 더 강해졌다.
용검대로 하여금 절대 강자로 군림케 해준 천수강막을 펼치고도 고전을 거듭한 끝에야 쓰러트릴 수 있었다.
“처음부터 죽였어야 했어요.”
서화가 냉랭한 표정으로 루검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실 그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악마가 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죽이려 했지만 그녀의 임무는 엄연히 그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의 수족까지 되었다. 나이가 절반이나 어려도 존댓말을 썼다.
환희교의 희망은 사라졌다.
“소저, 미안한 말이지만 본가까지 가줘야겠소.”
“네?”
“소저 말이 사실이라면 팔 하나를 잘라서 사죄하리다.”
용 문양을 한 무인이 냉담하게 말했다.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말한 대로 무조건 따르는 수밖에 없다. 반항하더라도 억지로 끌고 갈 태세이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다.
팔 하나를 잘라서 사죄하겠다? 상당한 자신감이다. 서화의 말이 거짓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게다. 그렇다면 당연히 루검비와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이고, 그런 그녀를 잡아가지 않을 리 없다.
“그러죠. 팔까지 내놓을 것 없어요. 가는 길에 심심치 않게 술이나 받아주면 되요. 안주는 필요 없어요. 이놈을 생각하면 어지간해서는 취하지 않아요.”
서화는 루검비의 옆구리에 발길질을 했다. 발끝에 진기를 모으고 장문혈(章門穴)을 힘껏 걷어찼다.
루검비는 인법을 거친 몸이다.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
루검비가 입은 상처는 상당히 중했지만 서화가 보기에는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을 여지가 많았다.
온 몸이 걸레가 되었는데 어찌 살 수 있겠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의 옷을 벗겨보면 된다. 어느 게 살이고 어느 게 흉터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이 되면 지겨울 만큼 목숨이 질긴 괴물이 되는 게다.
허나 서화는 마지막 발길질마저도 하지 못했다.
면검 한 자루가 장문혈을 가로막았다. 발길질을 끝까지 하려면 면검을 차고 나가야 한다.
서화는 물러섰다.
“훗! 이것도 안 되나요? 죽은 놈한테 원한도 못 풀어요?”
“죽이지 않았으니까.”
“네? 그게 무슨……?”
“놈은 죽지 않을 것이오. 가주님 앞에 무릎을 꿇기 전까지는 숨이 붙어 있을 거요. 시작해!”
그가 말하기 전에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무인 몇 명이 나서서 루검비의 상처에 금창약(金瘡藥)을 덕지덕지 발랐다. 또 한편으로는 고래 힘줄 같이 생긴 끈으로 손발을 꽁꽁 묶었다.
‘저…… 런데도 살 수 있다고?’
서화도 의술을 안다. 환희교에서는 유화 다음으로 고명한 솜씨를 자랑한다.
의원의 눈으로 보건데, 루검비는 죽는다. 만에 하나, 기적이 일어나면 모를까 틀림없이 죽는다. 자신이 발길질을 하려던 것은 ‘만에 하나’조차도 없애기 위해서다.
헌데 무인들은 놈을 살려내고 있다.
이 자들은 참으로 무서운 자들이다.
염라대왕에게 끌려간 자를 다시 살려냈다고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설사 화타(華陀)가 환생한다 해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다.
이들은 동료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살수를 쓰지 않았다.
살을 깊게 베긴 했지만 장기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네 명이 죽었고, 몇 명이 더 죽을 지 모를 싸움판에서조차 치밀하게 짜여진 계획대로 움직였다.
그게 무서운 거다.
‘안 돼! 살아서는!’
서화는 눈가에 피어나는 독기를 감추기 위해 눈을 감아버렸다.
2
‘죽지…… 않았구나.’
의식이 없으면 죽은 것이요, 깨어있음을 느끼면 산 것이다.
전신에서 진한 통증이 일어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것 같다. 손발도 움직이지 않는다. 큰 동작은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 않는다.
“흠……”
루검비는 쓴 웃음을 지었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모두 막혔다.
하나의 흐름으로 단숨에 혈도를 제압한 것이 아니다. 각기 다른 열 가지 수법으로 각 경맥을 막았다.
눈동자는 돌아간다.
경맥 전체를 막은 게 아니라 일부분만 통제했다는 뜻이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았다. 돌려진다. 단지 목 아래로만 움직여지지 않는다.
잘못 생각한 것일까? 목뼈에 있는 신경만 죽인 것인가.
그렇다면…… 일부러 죽였을 수도 있지만 무인들과 싸우는 와중에 검을 잘못 맞은 후유증일 수도 있다.
혈도를 건드린 것이 아니라면 완치되기는 틀렸다. 평생 전신마비 상태로 살아야 한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이런 상태에서도 환희밀공은 돌아갈까? 여인이 살을 만져오면 욕구를 느낄까?
느낀다. 멀지 않은 곳에 여인이 있다. 여인의 살 냄새가 진하게 풍겨온다.
사내들도 많다. 족히 수십 명은 되는 것 같다.
쉬익! 쉬익! 쉬이익!
귓가로 바람이 흘러간다. 그럴 때마다 머리가 심하게 흔들린다.
그렇구나. 움직이고 있는 중이구나. 무인들이 들것에 실어 나르는 중이구나.
루검비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비로소 알았다.
그가 생각한 것들 중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생포되는 일만은 피하려고 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