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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밀공-40화 (40/125)

# 40

정옥성은 칠성(七成)의 진기로 연자해비(燕子海飛)를 펼쳐 마중 나갔다.

슈우욱!

다시 화전이 솟구쳤다.

“……?”

정옥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살의 방향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꾸준히 동남향을 가리켰는데, 이번 화살은 북서(北西) 쪽으로 쏘아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기껏 도주하다가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오던 길로 되돌아간다? 뒤에서 무인들이 잔뜩 쫓아오는데 마주쳐간다?

말도 안 되는 것은 수하들이다.

화살이 솟구친 곳과 정옥성이 있는 곳은 지척이라 싶을 정도로 가깝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수하들이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뒷덜미를 낚아챌 수 있는 거리다.

계집이 방향을 바꿨다면 만사 제쳐놓고 사로잡아야지 화전을 쏠 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옥성은 본능적으로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파철(破鐵)!”

명령과 함께 뒤따르던 수하들이 좌우로 쑥 나섰다.

두 명은 우측으로, 다른 두 명은 좌측으로…… 정옥성을 중심에 두고 반원 형태를 만들었다.

정면에서 들어오는 적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진형이다. 적이 좌우에서 협공해 온다면 좌우 날개가 합쳐서 곤(丨) 자(字) 형태를 만든다. 두 명씩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기에 마음 놓고 천수검법을 펼칠 수 있다.

인원은 다섯 명에 불과하지만

슈우욱!

바로 코앞에서 다시 화전이 쏘아졌다.

이번에도 역시 북서를 가리킨다. 헌데 화살을 쏜 위치가 조금 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계집은 북서쪽으로 도주하는데, 추격을 하지 않고 화살만 쏜단 말인가.

‘뭐가 잘못 되도 크게 잘못……’

정옥성은 파철진을 유지하며 달려 나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대나무가 울창한 숲에 대여섯 명이 둘러앉을 만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철없는 동네 꼬마 아이들이 불장난을 벌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쏠 거야.”

“안 돼. 아직 이백을 세지 못했어.”

“이백까지 세면 내가 쏜다!”

“나 한 번만 더 쏘고.”

“넌 두 번이나 쐈잖아. 이번에는 내가 쏠 거야!”

“너 죽을래!”

“이씨! 나 이거 안 해!”

화로(火爐)에 풀무질을 하던 아이가 손을 놓고 일어섰다.

“알았어. 해. 이번 한 번만이다.”

일어섰던 아이가 다시 풀무질을 시작했다.

꼬마아이들은 불장난을 하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낄낄거렸다.

‘이런! 이런……!’

정옥성은 힘이 쭉 빠져 아이들만 쳐다봤다.

아이들이 장난삼아 하늘로 쏘아올린 화전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어서 용검대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

용검대는 불화살을 쏘지만 화살에 불을 붙이지는 않는다. 화살 촉에 화분(火粉)이 묻어있어서 하늘로 쏘아 올리면 공기 마찰에 의해 자연적으로 불길이 일어난다.

생각해보라. 한 참 적을 추격하는 사람들이 무슨 정신이 있어서 불을 지펴 불화살을 쏘겠는가.

용검대의 화전은 푸른빛이 잠깐 생겼다가 노란빛으로 변한다. 그런 연후에야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아이들이 쏜 것은 처음부터 불길이 붙은 것이다.

불덩이의 모습이 완전히 틀리다.

그걸 왜 몰랐을까? 그걸 왜 진작 구분하지 못했을까. 추격할 때는 멀리 봐야지 눈앞에 것만 보면 안 된다고 자신의 입으로 가르쳐 놓고는 자신이 망각하고 말았다.

추격에 온 정신을 빼앗겨 가장 기본적인 화전을 간과했다.

‘이런! 이런!’

멍하니 아이들을 쳐다보던 정옥성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화전을 쏘아올린 시점부터 수하들의 화전은 침묵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추격! 빨리!”

정옥성은 말을 끝낼 새도 없이 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려 연자해비를 펼쳤다.

사아아아앗!

그의 신형이 물찬 재비처럼 날아올랐다.

정옥성은 멀지 않은 곳에서 수하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쓰러져 있었다. 길에서 잠이 든 것처럼 평화로운 얼굴로, 편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독(毒)……!”

신음처럼 새어나온 말이다.

얼굴은 편안한데 살갗은 그렇지 않다. 목 뒤며 손등이며 빨간 반점이 수북이 돋아 있다. 피부병에 걸린 사람처럼 좁쌀만 한 반점들이 오돌토돌 피어났다.

수하 다섯 명이 죽었다.

힘들게 가르친 수하들이 꽃도 피어보지 못하고 죽었다.

진한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흐른다.

그는 발길로 톡톡 차면 금방이라도 눈을 부스스 뜨고 일어날 것 같은 수하들을 안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내 생애 가장 치욕스런 날이구나.”

제12장 겨울은 깊어지고

1

“여기는……? 유화? 유화 맞지?”

환희교에 있을 때도 유화와는 절친했다.

형당 식솔들 중에 친하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유화와는 그야말로 몸에 점이 몇 개 있는지조차 말할 정도로 가까웠다.

잔화가 마혈이 제압된 서화를 데려간 곳에 유화가 있었다.

허나 십여 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이지만 지난 회포를 풀 형편이 안 되는 것 같다. 유화의 얼굴은 차게 굳어 있다.

“잠시 검사 좀 할게.”

그녀가 그동안의 안부도 미룬 채 완맥을 움켜잡았다.

“유화, 왜 그래?”

“너야말로! 너야 말로 왜 그래?”

“무슨 말이야? 내가 뭘……”

“잠자코 있어줄래?”

유화의 음성이 너무 냉랭해서 서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화는 완맥을 놓고 침통(針筒)에서 은침(銀針)을 꺼내 살짝 찔렀다.

빨간 핏물이 은침을 타고 올라온다.

은침은 안이 대롱처럼 비어 있어서 핏물을 빨아낼 수 있다. 분수처럼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만 빼내도록 고안되었다.

이 침은 서화도 잘 안다.

형당에 있을 때 피를 검사하여 중독(中毒) 여부를 알아낼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한 적이 있다. 몇 날 며칠동안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특별히 만든 침이 바로 이것이다.

은침은 서화와 유화의 공통작품이다.

“중독 됐을까봐?”

“아니, 뭘 복용했는지 알아보려고.”

“그게 중요해?”

“네 무공이 몰라보게 높아졌으니까. 그리고 이런 사단도 생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일은 변수가 적을수록 좋은 거잖아. 뜻밖에 것은 정확히 짚고 가야지.”

“풋! 계집애. 그럴 것 같으면 그냥 물어보지 그랬어. 팔엽선초라고 알아?”

“팔엽선초?”

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영물을 용케 구했네?”

“역시 아는 구나. 하긴 내가 아는데 네가 모르겠어?”

“약간 아는 정도야. 책에서 몇 줄 읽은 정도.”

“그 책에는 팔엽선초를 복용하면 소보보(小寶寶:갓난아기)가 된다는 말은 적혀있지 않았나 보지?”

“아까 말했잖아. 네 무공이 강해져서 이런 검사를 한 거라고. 잔수를 쓰지 않았다면 잔화도 네 상대가 되지 않았을 걸?”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구나. 소보보가 겨우 나 정도라고 생각해? 세상 무인들이 다 병신들이네? 겨우 이 정도가 되려고 무진 애를 쓰니 말이야.”

“왜 이렇게 삐딱해? 너…… 상당히 힘들었구나.”

“호호호! 팔엽선초를 복용한 년치고는 무공이 별 볼일 없다는 걸 말해주는 거야. 그건 이상하지 않나보지?”

유화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녀는 무공의 깊이를 모른다. 갓 태어난 갓난아기처럼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원정(元精)을 지닌다는 소보보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유화가 무공에 대해서 조금만 알았다면…… 소보보를 알았다면 서화의 무공이 너무도 형편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게다.

팔엽선초는 분명히 영물이다. 보통 사람이 복용하면 단숨에 소보보의 내력을 안겨준다는게 거짓만은 아니다. 허나 서화는 팔엽선초의 영능 대부분을 피골이 상접한 몰골에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데 썼다.

지금도 날이 지날수록 내력이 강해지기는 한다.

아직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영능이 경맥을 따라 휘돌다가 어느 순간에 확 녹아들곤 한다.

소보보에 비하면 티끌만큼 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예전의 서화에 비하면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 지금은 무인들과 당당히 겨룰 수는 있지 않은가.

유화는 팔엽선초가 완전히 녹지 않았다는 것만 안다. 지금도 조금씩 녹고 있다는 사실만 주목한다. 팔엽선초를 온전히 복용했을 때, 중원 무림에 당당히 이름을 내놓을 고수로 변모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모른다.

서화는 곧 그 사실을 깨닫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안되겠다. 아무래도 수두화님과 이야기해야겠어.”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우선 좀 자둬.”

유화가 턱 밑 수돌혈(水突穴)을 꾹 눌렀다.

수혈(睡穴)이 풀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 사방이 깜깜해진 후였다.

눈을 뜨니 유화의 얼굴이 보인다.

“조금 잤어?”

“너…… 앞으로는 이런 짓 하지 마.”

“수두화님이 오셨어. 가자.”

유화가 서화를 안고 일어섰다.

“내 발로 가게 해줄래?”

“미안해. 조금만 더 참아.”

그녀는 끝까지 마혈을 풀지 않았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모닥불이 피어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자신에게 일수를 날린 잔화가 보인다. 수두화도 보이고, 첨화? 첨화도 왔다.

모두 보인다.

얼마 만에 얼굴을 보는 건지…… 마치 수십 년 만에 만나는 사람처럼 반가움이 가슴 벅차게 밀려든다.

“수두화님! 첨화!”

“돌이 많아. 조심해서 뉘거라.”

수두화는 애써 서화의 얼굴을 외면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첨화도 잔화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유화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땅에 눕혀질 때, 서화는 또 다른 사람을 봤다.

‘검비!’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용검대와 함께 있어야 할 사람이 어찌 환희교 여인들과 함께 있는가.

‘안 돼! 이건 아냐. 이건 안 돼!’

서화의 얼굴빛이 금방 딱딱해졌다.

‘유화!’

이제야 모든 일의 윤곽이 잡힌다.

군웅들이 용검대 앞에 나타난 건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 그들을 들쑤셨다.

잔화 아니면 첨화가 했을 게다.

선노와 투석기는 전쟁병기다. 그런 게 촌마을에 있을 리 없다. 구하고자 하면 구할 수는 있겠지만 쉽게 구할 수는 없다. 군웅들이 아니라 용검대가 구하고자 해도 진땀을 흘렸을 게다.

수두화라면 쉽게 구한다. 아니, 쉽게 만든다.

환희교에는 많은 집이 있다. 정랑이 살기도 하고 화녀가 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집을 누가 지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수두화의 손을 거쳤다.

수두화의 부친이 중원에서도 이름난 장인(匠人)이라는 사실은 환희교에서도 몇몇 사람만 아는 개인사(個人史)다.

수두화는 부친의 피를 이어받아 이것저것 뚝딱뚝딱 잘 만든다.

그녀에게 이틀 정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용검대를 공격할 정도의 선노와 투석기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계획은 유화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용검대에 잡혀가는 루검비를 구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각기 일을 분담하여 진행했다.

그럼 루검비가 잡힌 사실은 언제 알았을까? 언제부터 용검대를 지켜본 걸까?

그녀가 급히 수두화를 쳐다봤을 때, 수두화가 예전에 봤던 포근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거라.”

서화는 일의 순서를 지켰다. 궁금증을 묻기 전에 자신의 일부터 고해야 한다.

“검비가 천법을 나선 건 지난해예요.”

그녀는 루검비가 세상 경험을 쌓겠다고 하산할 때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 중에서 네 무공이 가장 뛰어날지도 모르겠구나.”

수두화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뇨. 검비가 저보다 한 수 위에요. 결국 검비에게 잡히고 말았잖아요.”

“음기를 빨아들이지 못하니 잡으나 마나지.”

“그러니 이제는 죽이겠죠.”

“휴우!”

수두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화가 당한 일은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 누구도 감히 너를 이해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환희교를 위해서는 죽음까지 각오한 사람이 그까짓 음기 좀 빼앗긴 것 가지고 뭘 그러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루검비를 죽이려고 한다.

자신이 당했으니 다른 사람은 당하지 않게 하려고.

그러나 수두화를 비롯하여 다른 화녀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녀들은 어떻게든 루검비를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가 무슨 말을 하던 검비를 데리고 가실 거죠?”

“넌 죽일 거잖니.”

“그래야 하니까요.”

“차라리 환희교를 떠나는 건 어떠니?”

“네?”

“교를 떠나 세상에 나가는 거야. 검비도 잊고 우리도 잊고 환희교에 대한 건 모두 잊고 네 인생을 사는 건 어떠니?”

“검비는 구할 수 없어요.”

서화는 수두화의 얼굴에서 단호함을 읽었다.

루검비를 죽이려면 수두화를 비롯하여 유화, 첨화, 잔화부터 죽여야 한다. 이들은 무슨 수를 쓰든 루검비를 데려갈 심산이다.

“마혈은 두 시진이 지나면 풀리도록 해놓으마. 이후, 우리는 남남이다. 넌 네 갈 길로 가고, 우린 우리 갈 길로 가고. 알았지? 네 마음을 알기에 하는 말이다만, 우리 걱정은 하지 말거라. 잊었나본데 환희밀공을 수련한 자가 환희교를 배반하면 어떻게 되지? 누군가가 나설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검비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그리고 그 사람은 만들어져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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