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연인의 손길…… 부드럽게 애무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경각심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환희밀공은 죽음을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도의 살법(殺法)이다.
‘아무 것도 필요 없다! 당신의 죽음뿐! 반공!’
지금까지는 앞면을 공략했다. 허나 반공은 등을 공격한다.
타타타타탁!
병풍(秉風), 천종(天宗), 소해(小海)……!
여인상은 말이 없다. 몇 번을 두들겨 맞아도 묵묵히 서있다. 허나 만약 목상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벌써 세 명이 목숨을 잃었다.
환희밀공에 ‘사정을 봐준다’라는 말은 없다.
손을 쓰면 반드시 폐인이 되거나 죽게 된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죽는 것을 원할 터이지만.
‘다음은 뭘 한다?’
다음에 수련할 여인상을 골랐다.
정사를 나눌 때 남녀간의 모습에 규칙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처럼 환희밀공의 수련에도 선후가 없다. 어느 것이든 익숙하게 수련하기만 하면 된다.
루검비는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있는 여인상에게 다가섰다.
이번에는 그도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한쪽 다리는 여인의 허벅지를 지나쳐 앞쪽으로 쭉 뻗고, 다른 쪽 다리는 무릎을 꿇는다. 두 손은 여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안는다.
타탁! 타타타탁!
생기를 빨아들이는 간공이 펼쳐졌다.
수련하기도 귀찮다.
요즘 들어서는 환상이 더욱 자주 보인다. 어떤 때는 사내가 나타나고, 어떤 때는 여인이 미소짓는다.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한 겨울이라 먹을 것이 없어서인지 새끼 노루 한 마리가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달려나갔다.
땀을 흘리며 찾아나서도 모자랄 판에 제 발로 찾아온 놈인데 놓칠 리 없다.
헌데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왜 이러지? 또 어디가 잘못……’
인법을 겪으며 주워들은 구결들을 낱낱이 점검했다. 지법에서 얻은 그림도 다시 수련했다. 천법의 음양조화도 몇 번이고 반복했다.
환희밀공에 잘못은 없다. 환희밀공은 원래 이런 것이다. 이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
루검비가 비중있게 생각한 것은 왜 환희밀공이 동자공이냐는 것이다. 욕정 때문에 반쯤 미치게 만들면서 정조를 지키라는 게 말이 되는가.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가. 잘 가지고 놀아라. 하지만 한 번만 실수하면 모든 걸 빼앗아간다. 이게 뭐냔 말이다!
잠자리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미동조차 않는 것이 최상책이다. 환희밀공이 음기를 취하라, 양기를 취하라고 꼬드기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루검비는 환희밀공이 광술(狂術)로 변하는 순간을 알아냈고, 나름대로 최선의 방책을 강구해냈다.
제13장 치솟는 분노
1
금령의 죽음은 한 여인의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상관세가의 자존심과 직결되는 큰 사건이다.
실일취십(失一取十), 하나를 잃으면 열을 취한다.
강호에 적을 둔 무인이라면 누구나 뼛속에 새겨놓고 있는 말이다.
하나를 잃고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둘, 셋을 빼앗길 것이고 조만간 문을 닫아야 할 게다.
하물며 금령은 백초원주다.
돈 없고 힘없는 민초들의 질병을 치료해주는 성녀(聖女)들의 으뜸이다.
금령을 죽음은 상관세가가 명운(命運)을 걸고 해결해야할 중대 사안이었다.
“흡정대법(吸精大法)이 분명합니다.”
바짝 말라죽은 시신들을 살펴보던 사람이 말했다.
용검대는 이번 일로 열다섯 명을 잃었다.
용검대란 이름이 탄생한 이래 최악의 참패였다.
그 중 루검비에게 죽은 사람이 네 명이다. 나머지 열한 명은 독에 당했다.
“이쪽은…… 거참 이상하네. 이럴 리가 없는데.”
독에 당한 무인들을 살피던 자가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다시 시신을 뒤적였다.
재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익은 말을 백 마디 내뱉는 것보다 쓸모 있는 말을 한 마디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시검(屍檢) 현장에서는 특히 그렇다.
말 한 마디에 따라서 복수의 향방이 정해진다. 자칫하면 애꿎은 사람을 죽이는 경우까지 발생한다.
“믿을 수 없습니다만 창생원 같습니다.”
“지금 뭐라 했소!”
상관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검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창생원이 어디인가. 중원 제일의 활의(活醫)가 있는 곳이다. 염라대왕에게 끌려간 자도 발목을 낚아채 올 수 있다는 천하제일신의가 거주하는 곳이다.
무류 왕신파는 의원이지 무인이 아니다.
그도 무림에 인연이 없는 건 아니다. 교분을 나누는 사람이 상당히 많고, 입김도 크게 작용한다. 허나 무공이라고는 기본공조차도 닦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무림사에 끼어들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 더군다나 상관세가를 적으로 돌렸다는 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틀림없나!”
“틀림없습니다.”
백초원에서 주검만 다뤄온 자들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들의 시검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다. 부패가 심해서 끈적끈적해진 시신조차도 정확히 사인을 찾아낸 사람들이다.
“무엇 때문에 창생원을 지목한 것인가?”
사숙(四叔) 상관교(上官喬)가 물었다.
“이 독은 합안사독(合眼死毒)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중독되는 즉시 졸음이 쏟아져 눈을 감게 되는데, 눈꺼풀이 맞붙는 순간 절명하게 되지요. 시신을 살펴보면 눈꺼풀을 아교(阿膠)로 붙인 것처럼 거품 같은 것이 붙어있습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합안사독에 당한 증세입니다.”
“합안사독……”
상관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검에서 나타난 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창생원이 상관세가 무인들을 독살시켰다면 당장이라도 창생원을 무너트려야 한다.
헌데 그게 쉽지 않다.
창생원은 백초원과 성격이 같다. 아니, 창생원을 본떠서 백초원을 지었으니 백초원이 창생원과 같은 성격이라고 말해야 한다.
불쌍한 민초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희귀한 질병을 연구하며, 많은 의원을 길러낸다.
무류 왕신파는 성불이나 다름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 곳을 무너트린다면 상관세가를 곱게 볼 사람은 없으리라.
“창생원은 두고 보고…… 흡정신공이 맞는가?”
“틀림없습니다.”
이번에도 확신에 찬 대답이 들렸다.
“조카. 이번 일은……”
“알겠습니다. 제 손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상관외가 포권을 취해보였다.
흡정신공, 타인의 진기를 빨아먹는 기생충 무공.
루검비를 공적 명단에 올리기에 충분한 명분이다. 허나 그러지 않는다. 그건 너무 편한 죽음이다. 놈은 검에 죽을 자격도 없다. 죽을 때까지 똥통 속에 처박아 둬야 한다.
상관외는 뇌옥으로 갔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꽁꽁 묶여 있었다.
전신은 온통 멍투성이고, 머리도 깨져서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새로운 건?”
“없습니다. 아주 지독한 계집입니다.”
“그래. 지독한 계집이라…… 당연하겠지. 종교에 미친 사람은 약도 없는 법이니까. 어디 내가 한 번 해볼까.”
상관외는 고문용 소검을 움켜쥐고 여인 앞으로 걸어갔다.
보통 소검과 같은 크기이지만 끝부분이 갈고리처럼 굽어져 있는 검이다.
“이걸 어디다 쓰는지 알아?”
상관외는 소검을 들어 여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훗! 후훗! 조…… 족근(足根)……”
여인은 말하기도 힘든지 개미 기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오오! 아는군. 형당 소속이었다고? 그래서 그런지 이런 기구를 잘 아네.”
상관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검을 휘둘러 여인의 왼쪽 족근을 확 낚아챘다.
“아악! 아아아아악!”
여인은 온 몸을 비틀며 비명을 내질렀다. 허나 그녀의 비명은 문밖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녀가 갇혀 있는 뇌옥은 사방이 석벽인데다가 유일한 출입구인 철문은 두께만 석 자에 이른다.
상관외는 한쪽 구석에 소검을 내던졌다.
“갔다 오마. 그 동안 놈이 있는 곳을 반드시 알아내야 할 것이다. 아니면 네 놈들이 죽는다.”
상관외의 눈가에 살기가 번뜩였다.
“많은 도움을 주는군.”
상관외의 말에 비웃음이 담겼다.
“천만에요. 저의 목적은 오직 하나, 루검비만 죽이면 되요. 놈만 죽으면 약속대로 제 목도 드리죠.”
여인이 냉랭하게 말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마주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지독한 추녀(醜女)였다.
“그거 적응이 될 만한데 영 안 되는군. 내 앞에서만이라도 벗으면 안 되나?”
“죄송합니다. 놈이 죽기 전까지는……”
“알았어. 알았어. 잔화는 잡았고…… 창생원에 유화가 있다고?”
“네.”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네 말을 들으면 유화란 여자는 꽤 똑똑한 것 같은데 왜 독인이라면 쉽게 판별해 내는 합안사독을 썼을까? 이건 마치 내가 창생원에 있으니 잡아가시오 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영 께름칙해.”
“저도 거기까지는.”
유화는 기묘한 수수께끼를 던졌다.
비밀리에 누구를 죽이면서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독을 쓴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타인에게 누명을 씌우는 거라면 가능하다. 모든 혐의를 창생원에 돌리는 것이라면…… 허나 그곳에 자신이 있다면 문제가 다르다. 자신이 있는 곳에 적을 불러들이는 행위가 됨으로 병법상 가장 피해야 할 행동이다.
누명을 씌울 생각이었다고 해도 다른 문파를 선택했어야 한다.
독궁(毒宮)이나 흑독문(黑毒門) 같은 곳의 독을 썼다면 지금쯤 그들을 멸문시키기 위해 상관세가 무인들이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독만 주의해서 썼다면 신분이 드러날 염려는 전혀 없다.
헌데 이것은 모두가 뻔히 아는 독을 썼으니 미숙하기 짝이 없다.
“좌우지간 너희 환…… 환 뭐라고 했지?”
“환희교입니다.”
“아! 환희교. 하하하! 이름치고는…… 환희교 여자들 말이야.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어. 아무리 사내가 좋아도 그렇지 이놈저놈 달라붙을 수 있나? 창기가 아니라니까 하는 말이야. 잔화 저 계집도 마찬가지. 밀마(密碼) 하나 달랑 보고 아무 의심 없이 달려온 건 또 뭐야? 너희들 원래 그렇게 단순한가?”
서화는 대답 대신 인피면구(人皮面具)를 고쳐 썼다.
루검비가 죽을 때까지 벗지 않을 각오다.
인피면구를 썼으니 온갖 모욕을 들어도 상관없다. 내가 듣는 게 아니니까. 금수 같은 행동을 해도 괜찮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 인피면구를 쓰고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사사사삿……!
달빛도 별빛도 없는 깊은 야밤에 은밀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들은 민첩했다. 온 산에 눈이 쌓여 무릎까지 푹푹 빠지건만 그들의 발길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탄탄대로를 걷듯 편안하게 움직였다.
“우…… 후후후! 우우후후!”
깊은 정적을 올빼미 소리가 일깨웠다.
그러자 일부는 움직임을 멈췄고, 일부만 이동을 시작했다.
“우우…… 후후후!”
다시 올빼미 소리가 울렸다.
“참으로 은밀한 곳에 숨어있구나. 이런 곳에 있으면 오도 가도 못하겠어.”
최종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무인이 산 아래를 굽어보며 말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계곡을 따라 집들이 지어져 있고, 깊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환희교 총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쪽이 사내놈들…… 아! 자꾸 잊어버린다니까. 정랑이란 놈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이쪽은……”
“화녀요.”
“교주는 어디 있지?”
서화는 손을 들어 교주의 침소를 가리켰다.
그곳에도 불이 밝혀져 있었다.
“너흰 교주를 잡아. 죽이거나 놓치면 안 돼. 반드시 산 채로 잡아.”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사람은 후광운(侯廣運)이다.
그는 수하 열 명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순간, 서화는 가슴이 콩쾅콩쾅 뛰었다.
교주를 죽여야 한다고 그토록 말했건만 기어이 생포하란다.
칠절신군, 면도, 혈우광도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교주 곁에 있는이유를 몰라서 그러는가. 그들이 원하는 게 정말 환희밀공뿐일까? 교주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나?
정랑 세 사람이 서로를 향해 검을 뽑을 때는 교주 때문일 것이라는 풍문이 있다.
그런 여자를 생포하란다. 생포하란다……
“너희 셋. 여기서 한 풀이 해. 선공(先攻)이다.”
상관외는 저번에 낭패를 당한 세 사람, 풍위와 정옥성, 그리고 사동승을 가리켰다.
풍위는 수하를 잃지는 않았지만 적이 천수강막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허용했다. 정옥성은 추적 중에 다섯을 잃었고, 사동승은 멀거니 서 있다가 여섯을 잃었다.
그때의 아픔을 이곳에서 여한 없이 풀어보라는 거다.
세 사람도 조용히 사라졌다.
쒜엑! 쉬익
“크윽……”
“헉!”
검풍은 미약했다. 신음은 나직했다.
선공으로 내려 보낸 이십여 명이 계곡을 휩쓸고 있어도 환희교에서는 누구 한 사람 나와 보지 않았다.
“적이…… 컥!”
드디어 고함이 터졌다.
누군가 소피보러 나왔다가 용검대를 목격한 모양이다.
쒜엑! 차앙! 차차차차창!
사내들이 부랴부랴 병기를 들고 나섰다.
열락에 들떴던 몸, 여체에 파묻혀 있던 몸……
원한에 이를 가는 사람들, 살기를 번뜩이는 눈동자……
정랑들은 상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또한 싸움에 대비하지도 않았다.
싸움은 순식간에 끝났다.
정통 무인들이 뒷골목에서 주먹이나 휘두르는 파락호들과 싸우는 격이었다. 더군다나 온전한 상대도 아니고 환락에 취한 상태였다면 눈 감고 검을 휘둘러도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