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밀공-83화 (83/125)

# 83

살아있다. 멀쩡히 살아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왜화창부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루검비가…… 나를 찾아서…… 살려 달라 애원하랬다고?”

“네.”

“너와 그놈이 발가벗고 뒹군 걸 알아. 그러기 전에 놈에게 경고를 했지. 소월신투를 언급했어. 헌데 보란 듯이 너랑 뒹굴더군. 보름동안이나.”

“저희는 연공(練功)한 거예요.”

그녀가 급히 말했다.

인정할 수 없는 말이다. 루검비가 선화신공을 알려주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있는 지도 몰랐다. 오로지 정사에 몰입했고, 끝없는 환희 속에 온 몸을 떨었다.

루검비도 연공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깨달았다’는 말은 종종 들어봤어도 연공이나 운공 운운하는 소리는 일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루검비가 말하라 하니 말한다. 이어지는 말이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말이기에 자신 있게 했다.

“연공? 그럼 환희밀공을 수련했단 말이야!”

“네. 무천에 들어가면 위험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 몸 하나는 지켜야 되잖아요.”

“무공을 수련할 테니 몸뚱이를 빌려달라고 했고?”

환희밀공은 흡정대법이다. 환희밀공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정혈을 빨아먹어야 한다.

박빙이 이해하는 환희밀공은 그랬다.

“네. 그랬어요.”

“환희밀공을 쓰면 목내이로 변하는 것 아닌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아요. 운우지락을 나누면서 키우는 방법도 있어요.”

“어떻게 환희밀공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아?”

드디어 가슴 뿌듯한 말을 할 차례다. 그녀는 가슴을 활짝 펴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는 환희교도가 됐어요. 수문장을 모시는 수문(守門) 제이위(第二尉)요. 영원히 그 사람 곁에서 그 사람을 지켜보며 살아야 하는 수문위에요. 환희밀공에 대해서 들은 건 당연하고요, 그 분이 원하신다면 몸을 주는 건 제 의무이자 도리예요. 쉽게 첩(妾)이 됐다고 생각해 주세요.”

“처…… 업?”

박빙이 기막혀했다.

그 와중에 첩을 만드는 놈이나, 첩이 됐다고 좋아하는 계집이나.

이러니 끼리끼리 모여서 환희교인가 뭔가를 만드는 것 아닌가. 하고 많은 이름 다 놔두고 환희교가 뭔가 환희교가.

그녀는 소월신투를 떠올리자 마음이 답답했다.

환희교는 왜화창부 같은 걸레나 루검비 같은 난봉꾼에게 알맞다. 소월신투 같은 여자가 끼어들 곳이 아니다.

그녀는 왜화창부를 루검비가 보냈다는 말에 주목했다.

‘괜히 보냈을 리는 없고…… 내가 무천 칠통령 중에 한 명인 것을 아는 놈이 무천의 명예를 짓밟고 이 여자를 살려줄 것으로 확신했단 말이지?’

왜화창부는 천하의 요물이다. 그녀의 배를 거쳐 간 사내가 수백은 될 거라는 소문이다.

놈이 이런 여자와 몸을 섞었다.

왜화창부는 놈과 살을 섞은 걸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 여자를 소월신투에게 데려가야 한다. 허면 그녀의 들뜬 마음도 착 가라앉으리라.

‘새끼가 그래도 한 가닥 양심은 있었네. 소월신투가 넘보지 못할 나무란 건 알았나 보지.’

그녀는 왜화창부를 보면서 탈출 방법을 모색했다.

***

“이게 신법이란 말인가?”

“확인해 봤습니다. 상관세가 가주가 은밀히 소장하고 있는 지법 석화와 동일합니다.”

“인법은 고문이고, 지법은 이것이고, 천법은 석관이라…… 허면 석관을 찾아야겠지?”

“신군. 신군께서는 환희밀공을 원하시는 겁니까?”

“원한다는 말은 좀 그렇군. 호기심이 생긴 것뿐인데 원한다고 말할 것까지는 없지 않나.”

“죄송합니다.”

“내가 믿는 사람이 자네 밖에 더 있어? 쯧! 헌데 그깟 계집일 하나 변변히 처리 못하고…… 이 무슨 망신인가. 허허!”

“……”

“괜찮네.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는 거지. 내가 언제 자네 뒷감당을 미뤄본 적이 있던가? 쇄심옥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말고. 이미 다 말해놨네.”

“감사합니다.”

“이 사람, 감사하기는…… 정 마음이 그렇다면 뭔가 보답을 해도 괜찮고.”

“석관을 찾아보겠습니다.”

“후후후! 역시 자네야. 여기 통령들이 자네처럼 말이 잘 통하면 좋겠는데. 후후후!”

광전신군 장해파의 눈길은 춘화에 머물러 떨어지지 않았다. 백면 구욱동을 향해 말을 걸지도 않았다. 스스로 알아서 나가라는 축객령이다.

“남의 밑도 어지간히 닦아야지 이거 냄새나서……”

서자묵이 술잔을 기울이다가 구욱동을 보고 한 마디 툭 쏘았다.

“술이나 마셔. 똥 묻은 놈 곁에 가봐야 똥 밖에 더 묻어? 괜히 술맛 떨어지게 똥냄새 맡지 말고 코 딱 막고 술이나 마셔.”

초진량도 비웃었다.

구욱동은 못들은 척 지나쳤다.

평생 통령만 하다가 죽을 놈과 야망을 가진 자는 근본이 다르다. 놈들은 들개고, 자신은 호랑이다. 들개들이 비록 사나워보여도 결국은 호랑이 먹이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그의 귀에 한 가닥 전음이 들려왔다.

“서(徐) 소저께서 아미(峨眉)를 찾아가셨습니다.”

“지금?”

“네.”

순간, 구욱동의 눈가에 이채가 번뜩였다.

박빙(薄氷) 서채하(徐彩霞), 그녀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아미산(峨眉山)을 찾곤 했다. 명절 같은 때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늘 아미산을 찾았다.

당연하다. 무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미파(峨嵋派) 속가제자(俗家弟子)다. 제자가 사문(師門)을 찾는 게 뭐가 이상한가.

헌데도 구욱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눈초리를 루검비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모적방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총통령과 자신에 대한 이질감이 그녀를 감시의 눈초리로 만들었다.

그런데 정작 무천에 압송해 오자 사라졌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놈의 안위를 살펴야 하는데?

그는 입술을 오물거려 전음을 보냈다.

“걸어서?”

“마차를 탔습니다.”

더욱 이상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마차를 쓴 적이 없다.

“동행자는?”

“없습니다.”

“알았다. 내가……”

구욱동은 전음을 보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서자묵이 쳐다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다. 초진량의 입술 꼬리도 살짝 비틀어져 있다. 그들은 마치 ‘소리 내어 말하지도 못하는 쥐새끼’라고 놀리는 듯 했다.

‘이 자식들이!’

구욱동의 미간도 찌푸려졌다.

이 순간, 그는 급히 명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다.

초진량이 손으로 술을 찍어 탁자에 글을 썼다.

왜화(歪貨).

서자묵이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진량이 다시 글을 썼다.

추적(追跡), 사(死).

서자묵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똥냄새를 너무 맡아서인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군. 에잇! 술맛도 떨어지고…… 그만 마셔야겠어.”

“술 안마시면 뭐하려고?”

“밀린 빨래나 하고 잠이나 퍼자야지 뭐.”

“정말…… 그럴 생각이야?”

“그래야지, 그럼 뭐해? 똥냄새 맡지 말라며?”

“뒷간이 지저분하면 치우는 방법도 있지.”

“내버려둬. 누군간 치우겠지 뭐.”

초진량은 잠시 생각하더니 술잔을 놓고 일어섰다.

박빙의 부탁대로 구욱동의 직관력을 흐려놓기는 했는데, 그래도 찜찜하다.

통령들에게 세심옥의 명예 따위는 개똥만도 못하다. 하지만 세심옥의 불문율이 깨져서 무천의 명예에 흠집이 생기는 건 곧바로 통령들의 위신과도 연결된다.

왜화창부는 죽어야 할 여자다.

그녀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그녀가 과거에 어떤 여자였고, 어떤 짓을 했건 상관치 않는다. 그들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건 강한 마공을 지닌 마인이나 지독한 살인마뿐이다.

죽어야 할 여자이기에 죽어야 하는 거다.

그 이유밖에 없다.

박빙이 잠시 숨을 더 붙여 놓는 것에 불과하다며 데려갔지만 그것마저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뒤를 추적하여 박빙의 용건이 끝나면 직접 죽이려고 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냐고?

있다. 이전까지는 왜화창부 사건에 백면만 끼여 있었지만 이제는 박빙까지 가세했다.

이제는 세심옥 사건이 아니라 통령들 사건이 되었다.

마무리는 확실히 해야 하는데…… 서자묵은 박빙을 믿자고 하고, 초진량은 믿기로 했다.

“밖으로 나가지. 내 냄새나지 않는 곳을 알거든.”

“자시쯤 되면 쫓아내는 곳 아냐?”

“아냐. 밤새도록 마셔도 돼.”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갔다.

구욱동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통령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뛰어나야 한다. 그 중에서도 칠통령쯤 되려면 탁월한 게 한 가지쯤은 있어야 한다.

구욱동은 직관력으로 살아남았다.

그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자신의 느낌을 우선시 한다. 모두가 오른 쪽으로 가도, 느낌이 왼쪽으로 들면 왼쪽 길을 택한다.

항상 그래왔다. 그리고 자신의 느낌은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얼마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그런 직관이 무너지고 있다.

왜화창부가 도주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때는 어찌된 일인지 눈에 루검비만 들어왔다. 놈이 죽이도록 미웠다. 놈을 보는 순간, 놈의 품에서 교성을 지르는 왜화창부가 떠올랐다.

왜 그런 미숙한 생각을 했을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고개만 갸웃거려진다.

덕분에 왜화창부를 놓쳤다.

완전히 놓친 것은 아니다. 방원 이 리를 급히 포위하면 잡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 느릴 것이고, 발 빠른 무인들이 목을 차지하고 있으면 꼼짝없이 걸려들 것이다.

두 번째로 느낌이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느낌을 비웃기라도 하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번에 또 느낌이 들었다.

마차를 추적해야 한다. 마차 안에 왜화창부가 있다.

박빙과 왜화창부를 연결시킬 고리는 전혀 없다.

그녀들이 만나는 일도 없을 뿐 아니라 같이 마차를 타고 간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다.

박빙은 아미파에서 여승들과 함께 구도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 그녀가 시궁창보다도 더 더려운 왜화창부와 함께 마차를 탄다는 건 꿈에서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느낌은 달랐다. 마차 안에 왜화창부가 있다고 말한다.

그때 바로 추적했어야 한다.

초진량과 서자묵이 노골적으로 비웃지만 않았어도 추적했을 게다.

느낌이 또 온다.

서자묵과 초진량은 박빙과 연관 있다. 그녀의 사주를 받았거나 최소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는 안다. 또 있다. 지금은 마차를 추적해도 왜화창부를 찾지 못한다. 그녀는 이미 빠져나갔다.

정보에 바탕을 둔 논리적 판단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떠오른 직관일 뿐이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믿었다.

‘초진량…… 서자묵…… 박빙…… 너희들! 두고 보겠어!’

제24장 정교(正敎)와 이단(異端)

1

묶였던 손발은 풀렸다.

행동도 자유로워졌다. 일어나서 왔다 갔다 움직여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덜컹!

문이 열리며 네 노인과 한 여자가 들어왔다.

두 노인은 풍채가 좋다. 키도 크고 몸도 크며, 얼굴 윤곽도 굵직굵직하다. 한 노인은 키가 작고 행동도 가벼워보인다. 어린아이 같으면 촐싹거린다는 말이 딱 맞을 것이다. 뒤따라 들어서는 노인도 풍채가 좋다. 약간 뚱뚱한 편에 머리가 약간 벗겨졌다.

대체로 인상들이 좋다. 모두 마음이 선한 사람들이지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화룡이 넷, 이들이 오는 줄 알고 있었다. 회랑(回廊)을 굽이도는 순간부터 눈치챘다.

이어서 여인이 들어섰다.

“엇!”

루검비는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는 여인이다. 어떻게 저 여자를 잊을 수 있을까. 팔십 년을 산다고 해도 잊지 못할 여자다.

“유화……”

한 이름이 신음처럼 새어나갔다.

유화는 그를 힐끔 쳐다봤을 뿐,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이제야 알겠다. 어떻게 해서 무천이 환희밀공에 대해 소상히 알게 되었는지.

그들이 의자에 앉았다.

“시작하지.”

그 중 한 노인이 걸걸한 음성으로 말했다.

“흠! 루검비. 육반 루가의 후손이라고?”

키 작은 무인이 장난처럼 물어왔다.

루검비는 유화를 쳐다봤다.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쌀쌀맞기가 오뉴월 서릿발 같다.

‘모든 것을 말했나?’

그녀가 아는 모든 것이 앞에 앉아있는 네 노인에게 전해졌다.

“그렇습니다.”

루검비는 순순히 시인했다.

“그 환희밀공이란 것 말이야. 남자와 여자…… 그러니까 응응을 해서 수련한다던데 맞나?”

“허! 응응이라니.”

옆에 있던 노인이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응응이 뭐가 어때서? 그럼 그게 응응이지 으응일까. 자자, 이런 늙은이 말은 신경쓸 것 없고, 우린 우리 이야기를 하자고. 말해봐. 응응하면서 수련하는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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