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그러나 루검비는 조금도 절망하지 않았다.
“꺼내서 씻기게.”
‘치잇! 영감탱이.’
쇄심옥주는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손짓을 했다.
쇄심옥은 옥주의 영역이다. 대력검선 또한 옥주의 권한을 인정한다고 공언했다.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는 마음대로 휘젓는다. 자기 집처럼 마음껏 들락거리고, 명을 내린다.
아니꼽지만 거역하지 못한다.
그의 눈 밖에 나면 당장 자리를 내놓고 어딘가 머나먼 변방으로 쫓겨나리라.
옥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루검비를 꺼냈다. 순간!
“엇!”
“이, 이게!”
옥졸들은 달려들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물러섰다.
그들의 눈가에는 경계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떤 자는 병기를 움켜잡기까지 했다.
“뭐야!”
세심옥주는 신경질이 나던 판에 잘 걸렸다 싶어서 대뜸 앞으로 나섰다.
“저, 저 놈……”
“뭔데 호들갑들을…… 어?”
세심옥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검비는 눈을 감고 있다. 두 자리는 가부좌(跏趺坐)로 틀어져 있고, 두 손은 연화지(蓮花指)를 취했다.
“저, 저놈이 어떻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강한 바람 한 줄기가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쉬이익!
대력검선이다. 그는 한 달음에 달려나와 루검비의 완맥을 움켜잡았다. 온 몸에 오물이 묻어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루검비가 환희밀공을 수련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이 놈이 어떻게!’
오직 그 생각뿐이다. 어떻게 신경이란 신경은 모두 끊어진 놈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으며, 연화지를 펼쳤는가.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차서 다른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우, 움직인다!”
루검비의 몸속은 요란한 전쟁터 같다. 진기가 어찌나 활기차게 움직이는지 전차군단이 질주할 때처럼 시끄럽다.
“저…… 그 놈은 환희밀공을……”
쇄심옥주가 조심스럽게 말해왔다.
대력검선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반응이 없어서 다행이지 흡정대법이라도 펼쳤다면 노동거사와 같은 꼴이 될 뻔하지 않았나.
그는 황급히 완맥을 놓고 물러섰다.
“포박해!”
“저놈 지금 운공 중인 것 같은데, 지금 포박했다가 주화입마라도……”
“포박해!”
대력검선이 버럭 고함질렀다.
그 길로 루검비는 쇠창살이 있는 뇌옥에 갇혔다.
삼면은 암벽이고, 한쪽만 손가락 두 개 굵기의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다.
“허!”
왕신파는 할 말을 잃었다.
“사정을 봐줬던 게야?”
인화대협이 마뜩찮은 얼굴로 물었다.
“그럴 리가요. 한 치도 틀림없이……‘
말을 잇던 왕신파는 퍼뜩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생사침! 유화!’
그는 주위를 돌아봤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유화가 오늘 따라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창생원에 다녀오겠다며 머리를 조아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게 점심을 먹은 후이니, 한 시진 전이다.
그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녀는 상관세가 용검대 무인에게 합안사독(合眼死毒)을 썼다.
중원에서 합안사독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해서 상관세가까지 찾아가 해명을 해야 했다.
합안사독은 유화가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썼다. 상관세가 무인을 죽였다.
왕신파는 환희교 옛 동료들이 상관세가 무인들에게 쫓기기에 어쩔 수 없이 썼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 말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상관세가를 나오면서 본 목내이는 틀림없이 환희밀공에 정혈이 빨려 죽은 시신이었다.
환희밀공…… 환희밀공……
그는 환희밀공을 안다.
전대 수문장은 백여 명이나 되는 추살대(追殺隊)를 단숨에 목내이로 만들었다. 왕신파가 보는 앞에서 태연히 저지른 살행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뼈만 남은 인간으로 변하는 광경이라니.
그는 유화를 추궁하기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무천에 달려와야 했다. 천주(天主)는 만나기 어렵고, 삼관이라도 만나서 환희밀공의 출현을 말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유화가 합안사독을 쓰지 않았다면 자신이 상관세가에 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목내이를 보지도 못했으리라.
왜 그 점을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곤주신술은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머리만 살리고 몸통은 영원히 죽여버린다.
단, 생사침을 정확하게 꼽았을 경우에.
‘결국…… 이것이 너의 선택이었더냐.’
황신파의 후계자 자리를 버리고 환희교로 돌아갔다. 뛰어난 의원이 될 수 있었는데, 한낱 창기나 다름없는 환희교도를 택했다.
항상 환희교를 비웃었다. 교주를 조롱했다. 루검비 앞에서도 교주를 욕했다. 얼굴은 늘 차디찼으며, 음성은 쌀쌀 맞았다.
그녀가 싸늘함으로 위장한 건 환희교도였다는 자책감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자신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었던가.
“제자가 침을 잘못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도대체 유화의 속셈을 모르겠다.
루검비를 보호할 요량이었으면 합안사독을 쓰지 말았어야 한다. 그랬다면 무천도 한참 후에야 환희밀공의 출현을 알았을 게다. 생사침을 엉터리로 쓴 이유도 모르겠다. 기껏해야 명줄을 조금 연장시켰을 뿐인데, 그것으로 족한 것인가?
모든 게 한 마디로 설명되지 않는다.
“내 진맥해 봤는데, 진기가 콸콸 넘쳐. 저놈을 요절내려면 지금 아니면 안 되는데, 어찌하시겠소?”
대력검선이 인화대협을 쳐다봤다.
“어쩌긴…… 노동거사를 뇌옥에 넣으세.”
“뭐, 뭐요? 노망나셨소!”
“자네 입으로도 말했지 않나. 저놈 심성은 나쁜 것 같지 않더라고.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모험 한 번 해보세.”
“노동거사의 진기까지 모두 빨아먹게 할 참이오!”
“허허! 그러지 못하게 하면 되지 뭘 걱정이야.”
인화대협이 껄껄 웃었다.
루검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웬만하면 엉덩이라도 들썩일 텐데 석상이 되어버린 듯 꼼짝하지 않았다.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십여 일 이상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쏴아아아!
비가 내린다. 시원한 비가 흠뻑 쏟아진다.
유화는 침을 잘못 놓지 않았다. 생사침은 정확히 제 자리에 꽂혔다. 루검비는 목 아래로 신경이 끊겼다.
그럼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나?
기적! 기적이다. 루검비는 기적을 보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기적이 아니다. 화룡이 끊어진 신경을 복구한 것이니 그의 의지가 끊어진 다리를 이은 것이다.
화룡은 전신을 휘돈다.
몸 구석구석 없는 곳이 없다.
화룡이 없는 곳은 죽는다.
살은 썩고, 피는 검게 변색된다.
회음혈(會陰穴)에서 성신을 일으켰던 것은 음양화합의 요처이기 때문이다. 일점집중(一點集中), 의식이 쉽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또 있다. 회음혈서 진기를 일으키는 공부(功夫)가 꽤 있다. 때문에 별다른 저항감 없이 받아들인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루검비는 머리를 살폈다.
머리에도 화룡은 있다. 단지 땅에 내린 비처럼 사방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든 모아서 한 덩어리로 만들어야 한다. 연후, 정말 비가 내리듯 머리에서 아래로 쏟아 붓는다.
화룡을 모으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비를 쏟아 부으면서 망가진 신경을 만나면 화룡의 전능한 손으로 어루만졌다.
위에서 아래로…… 신경을 하나하나 이으면서 진행시켰다.
순환까지는 집중이 되지 않는다. 아직 몸 전체를 관통할 수 없기에 비를 한 번 쏟고 나면 다시 모아야 한다.
그는 서둘지 않았다.
천천히, 꾸준히, 한시도 쉬지 않고……
모든 게 수련이었다.
몸 어느 곳에서든 화룡을 모을 수 있고, 어느 방향으로든 뿌릴 수 있는 새로운 공부였다.
제25장 다접(多接)의 괴리(乖離)
1
보름이 지나갈 무렵, 죽은 듯이 앉아있던 루검비가 눈을 떴다.
파아아아!
세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어둠은 보이지 않고 광명만 보인다.
주위에 사람은 없다. 옥주도 없고, 옥졸도 없다. 화룡이나 수룡이나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나 됐을까?
지하감옥은 낮과 밤을 알 수 없으니 그게 불편하다.
‘응?’
루검비는 몸을 일으키려다 바닥에 누워있는 노인을 보았다.
자신에게 화룡을 빼앗아 허공에 방사했던 노동거사다.
그는 자신과는 다르게 푹신한 이불을 깔고 누웠다. 이불도 매일 새것으로 갈았는지 깨끗하기 이를 데 없다. 얼굴도 깨끗이 씻겨 있고, 머리도 단정히 빗었다.
루검비는 노동거사의 화룡을 읽지 못했다.
그에게서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다 보니 사람이 있어서 보게 되었다.
‘아직 죽지 않았어.’
틀렸다. 죽었다.
그는 숨을 쉬지 않는다. 몸은 빳빳하게 굳어간다. 살색도 파랗게 변색된 듯 하다.
누구든 죽었다고 단정내릴 상황이다.
루검비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은 노동거사의 몸 속에 실낱같은 화룡이 꾸물거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루검비도 파악하지 못할 만큼, 화룡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미미한 화룡이지만 화룡은 화룡이다.
몸에 화룡이 있는 한 사기(死氣)는 침범하지 못한다.
아직 죽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손을 쓰면 산다. 별로 어렵지도 않다. 이체관통으로 환희밀공을 밀어 넣기만 하면 된다. 그의 몸에 잔류해 있는 자신의 화룡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그의 화룡을 어루만지면 언제 죽었나 싶게 팔팔해진다.
허나 루검비는 쉽게 손을 쓰지 못했다.
문제는 노동거사가 지닌 무공이다.
그는 여러 무공을 수련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흡정대법과 흡사한 것이다.
자신이 환희밀공을 불어넣으면 흡정대법은 본능적으로 빨아들일 것이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큰 사단이 난다. 몸 안으로 들어간 화룡과 그의 진기가 싸움을 벌일 것이다.
화룡은 지지 않는다. 진기가 진다.
진기는 나뭇잎에 불과하고 화룡은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화룡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피를 쏟으며 죽으리라.
‘이걸…… 어쩐다.’
환희밀공과 무공의 상충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시간도 촉박하다. 실낱 같은 화룡이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
‘방사(放射)!’
루검비는 노동거사의 수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수분혈로 빠져나가려는 화룡을 잡아끌어 장심으로 방사했다. 허면 자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하면 자신은 또 화룡을 잃는다. 어쩌면 목내이가 되어 즉사할 지도 모른다.
루검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노동거사를 안아들었다.
환희!
환희가 어디에 있는 가를 살펴보면 무엇을 행해야 할지, 어떤 행동이 옳은지 명확해진다.
노동거사의 목숨을 구할 때 환희가 솟구치는가? 아니면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는 게 기쁜가.
환희교라면 환희를 쫓아야 한다. 쾌락이 아니라 환희다. 환희밀공은 환희를 따라가야 한다. 그곳에 올바른 길이 있다.
그의 아래턱이 노동거사의 아래턱에 맞닿았다. 순간!
쏴아아아!
이체관통이 이루어지고, 화룡이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갔다.
꾸우욱!
역시 반응이 온다. 미지의 힘이 수분혈로 빠져나오려는 화룡을 끌어당긴다.
루검비는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끌어당기는 곳을 향해 쏘아갔다.
그곳에 있다. 자신의 예전 화룡이 노동거사가 일으킨 미지의 힘과 아귀같이 싸우고 있다.
파파팟!
루검비는 자신의 화룡을 순식간에 거머쥔후, 노동거사가 그랬던 것처럼 장심을 향해 치달렸다.
이번에는 가로막는 것이 없다. 끌어당기는 것도 없다.
노동거사의 무공은 몸 안으로 들어온 진기를 빨아 당기는 데서 시작하여 방심으로 방사하면서 끝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련의 과정이며, 몸은 그 길을 안다.
노동거사는 의식을 잃고 있지만 몸은 노동거사가 시전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길을 열었다.
파아아아……!
화룡이 텅 빈 허공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 이게!”
“어르신!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옥졸들이 제일 먼저 괴변을 발견했다.
잠시 저녁 야참을 먹고 돌아오니 정녕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죽음을 확인한 노동거사는 살아있고, 며칠을 굶어도 멀쩡하던 루검비는 깡마른 목내이가 되어 널브러져 있다.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사연을 말해줄 사람은 노동거사다. 허나 그는 무릎에 루검비의 머리를 올린 채 손자를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을 뿐, 말이 없다.
소식을 들은 세심옥주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대력검선도 오고 인화대협도 왔다.
초저녁, 사망 선고를 내리고 물러났던 왕신파도 왔다.
“이제 중원제일의란 허명을 버려야 할까 봅니다.”
멀쩡한 노동거사를 보자 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진맥을 해봐도 괜찮겠습니까?”
“……”
“이봐, 그렇게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 그 아이하고 뭔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같이 데리고 나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