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밀공-88화 (88/125)

# 88

“……”

“저 사람 왜 이래! 갑자기 더위라도 먹었나! 자네 두 시진 전만 해도 죽었던 몸이야! 사망 선고가 떨어졌었다고! 어여 이리 나와! 나와서 몸을 추슬러야지!”

“……”

노동거사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왕신파는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물러섰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진맥을 할 수 없었다.

루검비가 죽었다.

목내이가 되어 죽은 다른 시신들처럼 완전히 생명이 끊겼다.

왕신파가 두 번, 세 번 살펴보고 내린 결론이다.

원래 왕신파 같은 신의(神醫)가 누가 봐도 뻔 한 죽음을 여러 번이나 살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노동거사의 선례가 있고 해서 거듭 살폈다.

“죽었습니다. 이번에도 살아난다면 이제 그만 침을 놓고 초야에 은거해야지요.”

그가 그렇게까지 말할 때는 확실히 죽은 것이다.

“죽음은 애석하나…… 시신을 내보낼 수는 없지요.”

대력검선이 말했다.

맞는 말이다. 루검비의 죽음은 애석하다. 허나 그의 시신은 세심옥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죄인들의 경우에는 죽어서까지 잡아 두지는 않지만 루검비는 다르다. 목내이가 되어버렸지 않은가. 자칫 노동거사가 지탄받을 수도 있다. 그의 무공 연원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다못해 어찌된 일인지 정도는 물어올 게다.

“이번 일은 자네가 결정하는 게 좋겠어. 노동거사.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인화대협이 노동거사를 보며 물었다.

노동거사가 죽었다가 살아난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데려갑니다.”

양해가 아니다. 단호한 결정이다.

“허어! 이 사람, 세심옥을 벗어나면 안 된다니까!”

“삼관 자리를 내놓죠. 그래요. 그러는 게 홀가분하겠어요. 이런 짓 하는 것도 지겹고…… 가져갈 것도 없으니 지금 빠져나가렵니다.”

“그렇게까지 할 게 뭐야. 그 아이는 데려가게. 삼관을 그만두겠다 어쩐다 소리는 하지 말고 푹 쉬었다 오게. 자네 자리 비워놓고 있을 테니까 언제든 와.”

“무천에 몸 담았던 사람, 무천을 욕되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그는 루검비의 시신을 안아들었다.

세심옥주는 급히 세심옥을 벗어났다.

그가 달려간 곳은 무천에서도 총령(總領) 이상만 거주하는 무로(武路)다.

무로는 사두마차 두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다. 바닥은 청석을 깔았다. 대로 좌우로는 최소한 오십 간은 되는 저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무천은 이들이 움직인다.

세심옥주는 주위를 두리번거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에 커다란 저택으로 쑥 들어갔다.

광전신군 장해파의 저택이다.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통령들의 모습도 보였다. 근 이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데, 그 중에는 백면 구욱동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단번에 찾을 수 있다.

세심옥주는 구욱동에게 달려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노동거사가 살아났습니다.”

“……”

“루검비는 죽었습니다. 왕신파가 두 번 세 번 확인했으니 틀림없습니다. 노동거사가 놈의 시체를 가지고 떠났어요.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삼관을 내놓는다고 하더군요.”

“어디로 갔나?”

“그것까지야 모르죠.”

“수고했어. 앞으로도 부탁하네.”

“그건 염려마시고……”

“걱정말게. 항시 염두에 두고 있으니, 자리가 비면 천거하지.”

“감사합니다.”

세심옥주가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무천 직급상 통령은 세심옥주의 아래다. 그러니 세심옥주는 아랫사람에게 존재를 했고, 머리까지 숙여 보인 거다.

광전신군 장해파의 저택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많다.

이곳에서만큼은 무천에서의 직급이 사라진다. 그리고 새로운 배분이 형성된다. 광전신군의 눈짓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서 서열이 결정된다.

현재, 광전신군의 오른팔은 백면 구욱동이다.

그는 세심옥주가 사라지는 것을 힐끗 쳐다본 후, 광전신군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

삭막한 무천보다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창생원이 훨씬 좋다.

사부를 따라 무천에 기거하고는 있지만 돌보던 환자 생각이 나서 견딜 수 없다.

유화는 창생원으로 돌아가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고름이 잔뜩 묻은 헝겊도 빨고, 붕대도 갈아주고, 약도 다렸다. 연세 많은 노인의 말벗도 되어 주었다.

이렇게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이 좋다.

그녀는 진정 환희교에서 있었던 일을 잊고 싶었다.

고문하고, 극약을 먹이고, 알몸의 남여가 아무 곳에서나 관계 갖는 모습을 보면서 냉소를 피워내야 했던 과거.

그녀가 창생원에 들어와 왕신파의 제작가 되기까지는 교주의 힘이 컸다. 그녀가 소개하지 않았다면 창생원 문턱도 밟지 못할 뻔했다.

오늘만 해도 왕신파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넷이다. 보통이 그렇다. 많을 때는 십여 명도 넘게 몰려온다.

왕신파는 그들을 보지 않는다. 그는 늘 부재중(不在中)이다.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은 차 한 잔만 대접받고 돌아가야 한다.

그 일을 주로 유화가 했으니 그의 제자로 선발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안다.

교주는 무슨 수로 왕신파의 두꺼운 장벽을 뚫었을까.

그러나 교주의 고마움은 거기까지다. 다시 환희교로 돌아가라면 정녕코 싫다.

정체가 드러날 것이 뻔한 합안사독을 괜히 썼겠나.

환희교에 대해 마음의 부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수두화가 루검비에게 죽은 뒤로 미련 따위는 버렸다.

수두화는 친 언니나 다름없었다.

마음 둘 곳 없던 환희교에서 언제나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었다. 눈물도 닦아주었고, 좌절해 주저앉으면 욕지거리를 해서라도 일으켜 세웠다.

루검비……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수두화를 죽여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 사실을 안 후부터 환희교에 대한 미련은 손톱만큼도 남지 않았다. 정말이다. 깨끗이 지워버렸다.

생사침을 쓸 때도 망설이지 않았다.

놈의 얼굴을 보면 옛일이 생각난다. 꼬마 아이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 그려진다. 자신이 생각해도 잔혹한 일이었기에 잠을 자다가도 깜짝 놀라 깨곤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검비가 환희교를 올바로 세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제는 없다. 놈은 살인마일 뿐이다. 색마요, 악마다. 기녀들의 죽음이 놈의 소행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다. 놈도 어차피 그리 될 터이니 지금 죽는 게 낫다.

생사침을 정확히 꽂았다.

이제 그녀를 아는 사람은 없다.

집단 참살에서 살아난 몇몇 화녀와 정랑이 그녀를 알고 있지만 그들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첨화와 서화가 살아있고 연락을 취해올 가능성이 높지만 각자의 길을 가자고 하면 들어줄 게다.

환희교와의 인연이 끝났다.

깨끗하다. 홀가분하다. 추악함과 함께 했던 과거는 지워졌다.

헌데도 마음이 무겁다. 루검비의 얼굴이 계속 떠오른다. 어린 꼬마놈이 살려달라고 눈물 콧물을 질질 짠다.

‘그깟놈이 뭐라고.’

그녀가 창생원에 돌아와 몸을 부지런히 놀린 데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지우려는 의도가 강했다.

해가 뉘엿뉘엿 진다.

싫든 좋든 무천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그녀는 일어섰다.

‘이 분위기는 뭐지?’

그녀는 자신을 향한 무인들의 눈빛에서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곁눈질에는 ‘남 몰래’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무천 무인들이 자신 모르게 꾸밀 일이 무엇인가.

진맥법(診脈法) 중에 안찰(顔察)이라는 것이 있다.

얼굴색을 보고 특이한 습성 및 고질적인 병을 알아내는 방법이다.

뛰어난 의원은 환자의 맥을 살피기 전에 병을 알아낸다고 했다. 안찰로 병을 알아내고, 진맥으로 확인한다.

그녀는 수십, 수백에 이르는 사람들을 안찰했다.

수십 명을 안찰하여 정확한 진단을 구 할 이상 내려야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무인들의 낯빛 정도 살피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무인들은 행동도 이상했다.

뒤는 벌써 가로막혔다. 좌우에도 은근히 다가오는 사람이 있고, 앞에도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있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무천이 자신을 생포하려고 한다.

어떻게 할까? 생포 당하고 무슨 일인지 알아볼까? 아니면 일단 빠져나간 후 은밀히 알아볼까.

결정을 내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녀가 보아온 무천은 용서가 없다. 조사를 시작했다 하면 이미 세상에서의 삶은 끝난 것이다. 모두가 그랬다. 무천의 조사를 받은 사람들 중에 세심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세심옥에 갇힐 수는 없다.

그녀는 걷던 길을 계속 걸었다. 다만 손끝을 부벼 흰색 분말을 은근히 퍼트렸다.

“우욱!”

“컥!”

뒤에서 따라오던 무인 두 명이 갑자기 목을 움켜잡고 주저앉았다.

그녀는 재빨리 뒤돌아서서 그들을 살피러 갔다. 아니, 그들의 곁에 이른 순간 재빨리 신법을 전개해 앞으로 쏘아나갔다.

“엇!”

옆에서 다가오던 무인들이 깜짝 놀라 뒤쫓아 왔다. 허나 그들의 발걸음도 곧 멈춰세워졌다.

“독!”

“컥!”

순식간에 네 명이 쓰러졌다.

죽지는 않는다.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죄가 있건 없건 죽이는 순간부터 어떠한 말도 소용없게 된다.

그녀는 무천을 빠져나오는 즉시 창생원으로 돌아와 약재창고 속에 숨었다.

그녀가 제일 잘 아는 곳이다.

“유화가 환희교 간세였다네?”

“유화가? 에이…… 설마……”

“어른께서 말은 않는데…… 내 무천에 아는 사람 있거든. 그래서 살짝 물어봤지. 유화를 잡으려다가 놓치기까지 했데.”

“환희교 간세가 왜 창생원에 들어와?”

“그러게. 그걸 모르겠다니까. 좌우지간 루검비라는 놈을 살리려고 애를 썼던 모양이야.”

“그 놈은 죽었잖아?”

“애를 썼다고. 살렸다는 말이 아니라 애만 쓴 거라고. 어른께서 생사침을 놓으라고 했는데, 엉뚱한 곳에 놨나봐. 그래서 놈이 살아났는데, 마침 그곳에 노동거사께서 계셨다네. 끝난 거지.”

“유화가 왜 그랬을까? 의도에만 매진했는데?”

“나도 그게 궁금해. 왜 그랬을까?”

그녀는 약재창고에 몸을 숨기고 잡다한 수다들을 주워들었다.

약재창고는 사방이 막힌 폐쇄공간 특성상 사람들이 쉽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비밀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싶었던 것을 모두 알았다.

무천이 왜 자신을 잡으려고 했는지 알았다. 루검비가 죽었다는 사실은 덤으로 들었다.

자신이 무천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인간이 갑자기 죽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보다 자신이 환희교의 간세로 낙인 찍혔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스승님을 찾아봐야겠어. 자초지정을 말해주시겠지.’

왕신파는 밤늦도록 취침을 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유화는 불 켜진 방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러섰다.

스승님이 기거하시는 방 앞에는 석등(石燈)이 두 개 있다. 왼쪽 것은 평상시에 켜는 것이고, 오른쪽 석등은 유사시에 켠다.

오른쪽 석등이 켜지면 손님이 계시니 출입을 금하라는 뜻이다.

밤 늦은 시간, 봉창에 비친 그림자는 스승님 밖에 없다. 스승님 혼자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계시다. 헌데 오른쪽 석등이 켜졌다.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이대로 물러가는 절 용서해 주시고, 존체 편안하시길.’

유화는 마음속으로 안녕을 빌며 은밀히 물러났다.

2

루검비를 살릴 방도는 없다. 왕신파도 살리지 못한 놈을 무슨 수로 살리랴. 기약선초(奇藥仙草)가 있는 것도 아닌 바에야. 또 그럴 목적으로 안고 나온 것도 아니다.

놈에게 세심옥은 너무 춥다.

세심옥에 묻히기에는 너무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

그는 왕신파가 사망선고를 내릴 때도 의식이 깨어 있었다. 루검비가 손을 쓸 때도 멀쩡히 지켜봤다.

그가 무슨 짓을 했냐고?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믿지 못할 일을 했다.

살신성인(殺身成仁).

말은 쉽다. 남을 위해서 죽을 사람도 많아 보인다. 인의(仁義)를 부르짖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면 절반은 인의가 최고라고 말할 게다.

루검비는 살신성인을 몸소 보여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해한 사람인데,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던지는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은가.

그가 알기로 정의의 화신인 무천에서도 그만한 인의를 지닌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기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에서 안고 나왔다.

생각해 둔 곳이 있다. 그곳이라면 놈이 쉬기에 적당하리라. 풍광도 좋고, 햇볕도 따스하다.

헌데 무천을 벗어나 이십 리를 채 달리기도 전에 앞을 가로막히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좀 물읍시다. 품에 안고 있는 그놈, 혹시 루검비란 색마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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