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밀공-96화 (96/125)

# 96

세상 사람들이 보면 화냥년, 색마들의 마을이다.

인륜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리라.

그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술이 없을 것이다. 운우지락만으로 지극한 환희를 느끼니 술의 힘을 빌릴 까닭이 없다. 고성(高聲)도 나오지 않는다. 이야기는 조용조용히 나눈다. 서로의 수도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질투는 당연히 없다. 서로의 육신을 소유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상대를 돕고 나를 발전시킨다는 지극의 도리만 공존한다.

이만한 성스러움이 또 어디 있는가.

루검비는 세상과 어울리려고 한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들끼리 살라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 되는데.

환희교는 교세를 확장할 필요가 없다.

몇몇 사람이 모여서 시작하고, 뜻이 맞는 사람을 한 명, 두 명 받아들이면 된다.

루검비는 불교나 도교처럼 중원 전역에 널리 알리고 싶은 모양인데,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다.

“계속 대침을 무기로 쓰실 겁니까?”

동문서답(東問西答), 유화의 말에 엉뚱한 말을 했다.

유화는 담담히 받았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옷에 피가 튈까봐서요.”

“아냐. 이거 생각만큼 피가 안 나와. 고통도 없어. 따끔거리는 게 고작인걸.”

유화가 대침을 꺼내들었다.

두 사람 앞에 무인 수십 명이 다가왔다.

쒜에엑! 파파파팟!

익히 아는 검초, 익히 아는 검진이 펼쳐졌다.

천수강막 안에서 펼쳐지는 천수검법은 무적을 자랑한다. 특히 용검대는 실전을 통해 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가다듬었다.

스으읏!

유화는 천수검법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달려오는 전차를 향해 두 팔 활짝 벌리고 뛰어드는 것과 진배없는 행동이었다.

쒜에에에엑!

그녀를 향해 여섯 자루의 검이 몰아쳤다.

죽여도 좋은 자, 가차없이 죽인다.

용검대의 살수에 인정이나 미련 따위는 기대하기 어렵다.

유화의 신형이 걸레조각처럼 찢겨져 나갔다. 꼭 그렇게 보였다. 여섯 자루의 검이 정확히 그녀를 베었다. 그 순간!

“크윽!”

“컥!”

짧은 단발마가 연이어 터지면서 천수강막 일부가 무너졌다.

유화를 향해 검을 날린 여섯 명은 관자놀이에게 가는 핏줄기를 흘리며 쓰러졌다.

철벽같던 제방은 무너졌다.

여섯 명이 한꺼번에 쓰러진 역사가 없기에 구멍난 부분을 채우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유화가 그 순간을 놓칠 리 없다. 그녀는 거침없이 천수강막 안으로 파고들었다.

번쩍!

“크윽!”

“아악!”

비명이 계속 터졌다.

용검대 검수들이 허수아비처럼 무너졌다.

검을 쓰기는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빈 허공만 때릴 뿐이다.

유화는 너무 빨랐다. 인간이 아니라 요괴가 번뜩이는 것 같았다.

용검대 검사들은 어떤 신법을 쓰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갔다.

“퇴(退)!”

수련시에도 들어보지 못한 명령이 떨어졌다.

지난 날, 용검대는 이할 가까운 검사를 잃었다.

그들을 보충하여 백 명의 검사를 만들고, 한 마음처럼 움직이게 하려고 무진 고련(苦練)을 시켰다.

이들 개개인은…… 장담하건데 일당백의 전사다.

헌데 엊그제까지만 해도 무공조차 모르던 여인에게 무너진다.

옛날처럼 이 할 가까운 검사들이 관자놀이로 가는피를 흘리며 절명했다.

검사들만 절명한 게 아니다.

쓰러진 자들 중에는 제일선을 담당했던 사동승(史東升)도 포함되어 있다.

용검대주 상관외의 팔 하나가 잘려나간 것이다.

“무섭게 달라졌군.”

천수강막 안에서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루검비는 그를 안다. 풍위(豊偉)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용검대주의 최측근이다.

“호호호! 무섭게 약해졌네? 겨우 이런 실력으로 최강입네 하고 허풍치고 다녔어?”

풍위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루검비를 보며 말했다.

“용건이 있소. 독대합시다.”

그가 허리에 찬 검을 풀어 바닥에 던졌다.

싸울 뜻이 없다는 의사표시였다.

“호호호호! 무력으로 제압하려다 안 되니까 협상을 하자? 너 참 편하게 산다.”

“편하게 사는 건 소저도 마찬가지요. 한 달 전에 우리와 만났다면 이리 말할 수 있겠소?”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 만났거든.”

유화가 피 묻은 대침을 들어보였다.

상관세가와 환희교는 양립불가(兩立不可)의 사이다.

선제공격은 환희교가 먼저 했다. 루검비가 백초원주 금령을 죽임으로써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과는 당연히 환희교의 몰살로 이어졌다.

그것으로 끝난 싸움이었어야 한다.

이제 유화에게 상관세가를 상대할 힘이 생겼다.

복수를 하지 말란 법은 없다.

“독대, 안하나!”

풍위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루검비는 못마땅해 하는 유화를 밀치고 풍위와 마주 앉았다.

유화는 십 장 밖으로 물러섰다. 용검대도 그만큼 물러났다. 그들 한 가운데 루검비와 풍위만 남았다.

“환희밀공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정말이군. 살아있었어. 그대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나 보군.”

“단도직입. 용건을 말해도 괜찮습니다.”

“자네를 잡아가려고 왔는데, 실력이 안 되는군. 도움을 청하네.”

풍위가 고개를 숙였다.

루검비는 재빨리 용검대를 훑어보았다.

용검대는 옛날의 용검대가 아니다. 교두(敎頭) 중 상당수가 빠졌다. 상관외가 밖에서 데려온 직속 부하만 남고, 상관 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 빠져나갔다.

검사들도 마찬가지일 게다.

단언하건데 죽은 자들까지 백 명의 용검대 중에 ‘상관’씨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 상관외가 없다.

상관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루검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평에서 발생한 흡정 사건을 캐내고 싶었는데, 상관세가의 일에 휘말리게 생겼다.

“무슨 말입니까?”

“본가에 환희밀공이 있네.”

“알고 있습니다.”

“본가에 환희밀공이 있네.”

풍위는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다른 말을 물어도 그는 같은 말을 반복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가죠.”

루검비는 풍위의 속마음을 읽고 응낙했다.

풍위는 승낙을 얻은 후에야 귓속말을 한참동안 했다.

“우리가 왜 저놈들과 같이 가?”

“환희밀공은 환희교도 것입니다. 다른 자가 쓴다면 거둬야죠.”

“흠! 상관가주…… 참 집요하더니 기어이 알아냈네.”

“상관가주가 아니라 상관외에요.”

“뭐! 그 자가 어떻게 환희밀공을 알고?”

“무수루고 부가의에게 삼대가 먹고 살만한 돈을 주고 정보를 얻은 모양입니다.”

“도굴꾼에게?”

“환희밀공과 흡사한데, 마공인 듯 싶다는군요. 전에 제가 했던 것처럼……”

“흡정?”

“네.”

“그럼 여기 기녀도?”

“그는 제압되어 상관가에 갇혀있답니다. 가주의 아들에서 연구대상으로 전락한 거죠. 용검대는…… 그를 구하고 싶어합니다. 마공만 빼낼 수 있냐고요.”

할 수 있다 없다는 물을 필요가 없다.

루검비는 할 수 있다. 화룡도 건드리는데 그까짓 진기 하나 못 건드리겠는가.

그는 일류고수도 단숨에 백면서생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무림이 알면 난리나겠지만.

용검대는 한 명, 두 명 대열을 이탈했다.

루검비가 십여 장쯤 걸었을 때, 뒤따라오던 용검대 검사는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말로 했으면 죽일 것까지는 없었는데.”

유화가 후회되는지 툭 쏘았다.

루검비는 픽 웃었다.

성신을 주목하다보면 심성이 착해진다. 굳이 화룡으로 다듬지 않아도 착하게 된다. 하물며 유화는 화룡과 어울리기까지 했다.

과거가 만들어 놓은 습성과 생활환경 때문에 쉽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결국은 변하게 된다. 류취취처럼 보름여에 걸쳐서 사기를 씻어내면 단번에 요조숙녀로 변신할 수도 있다.

겉모습이 변한다는 게 아니라 심성이 변한다.

유화가 살인에 대해서 미안함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루검비는 또 한 번 느꼈다.

‘환희교는 무림과 어울리지 않아.’

3

“그 놈 참……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못했는데, 정말 살아있었네. 도대체 이놈은 뭘로 만들어진 거야? 분명히 죽었었는데 봐봐 멀쩡하잖아?”

노동거사가 쪼르르 달려와 루검비를 살폈다.

주위를 한 바퀴 뺑 돌면서 살도 만지고 볼도 꼬집었다.

루검비는 웃기만 했다.

사실 그와 대면했을 때의 기억은 별로 좋지 않다. 화룡을 빼앗아 허공에 방출해버린 게 마지막 대면이었다. 그 후에는 세심옥에서 봤다. 그는 잠들어 있었고, 자신만 깨어있었다. 반대의 상황도 있었다. 자신이 죽었고, 그가 깨어있을 때다.

이래저래 상당히 어색했는데, 노동거사의 장난기 섞인 행동으로 인해 말끔히 가셨다.

채의마옹과 유수신투도 있다.

류취취와 소월신투도 있다.

루검비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렇게 쳐다볼 것 없어. 화룡은 어쩌지 못하지만 수룡은 깨워줄 수 있잖아. 내 수룡이 뛰어나다며? 내가 보기엔 동생 수룡도 이주 좋더라고. 그래서 한 눈에 가가를 보고 반한 거지. 잘했다고 칭찬 안 해 줄 거야?”

류취취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들은 유화를 처음 본다. 그럼에도 그녀가 누구이며, 어떤 관계인지 묻지 않았다.

서로의 몸에 흐르는 기운이 너무나 활기차기에 물을 필요가 없다. 수룡을 느끼는 자만이 떠올릴 수 있는 밝음이 보이기에 묻지 않아도 안다.

루검비는 고개를 내둘렀다.

화룡을 방사하여 사람을 치유하면서도 환희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이유가 있다.

숙제를 풀지 못했다.

고평에서 만난 여인들 중에는 수룡이 뛰어난 여인도 있었다. 그녀들 대부분이 소월신투처럼 가까이 다가오려고 했다. 하룻밤 풋사랑만으로 만족하겠다는 여인도 있었다.

환희교를 전파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이지 않은가.

그녀들의 수룡을 일깨우면, 수룡을 알게 하면 그가 권유하지 않아도 환희교에 입문할 것이다.

형당 화녀들은 특이한 성향을 지녔다. 같은 여자를 좋아하기도 하고, 둘 다 싫어하기도 한다. 어쨌든 남녀 간의 정사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그런 유화마저도 지금은 환희교를 인정하는데, 수룡이 뛰어난 여인임에야 말해 무엇하랴.

애써 거리를 벌렸다.

이유? 말했다. 아직 숙제를 풀지 못했다.

그가 유화를 물리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그녀에게 환희교의 정사가 일반적인 정사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환희교와 세상 양쪽을 모두 다 안다.

루검비는 그녀에게 환희교의 정사를 알려준 다음, 다접과 인륜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너무도 단순 명쾌했다.

환희교는 환희를 쫓으라고 했다. 루검비, 너의 환희는 어디로 향하는가. 어느 쪽으로 마음이 가는가. 마음이 일러주는 대로 가면 되지 않겠나.

가장 정답에 근접한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난관이 있다. 루검비는 자신의 마음을 보지 못했다. 성신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마음과 인륜이 무너지면 세상도 무너진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지금은 환희교를 설파할 단계가 아니다.

“당분간…… 당분간은 혼자서…… 개인 수련만…… 부탁합니다.”

루검비는 세 여인을 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그건 우리가 당부할 말이었는데.”

소월신투가 수줍게 말했다.

“호호호!”

“호호호! 아유 배 아파!”

두 여인은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허나 남자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노동거사는 세 여인에게 극도의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무림에서 안 산다면 모를까 살 바에는 강해지는 게 최선이지. 강해지는 방법 중에는 실전을 따라올 게 없어. 허니 너희는 오늘부터 치고 박고 싸우도록 해. 사정 봐주지 말고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거야. 밥 먹을 때도 하고 뒷간에서 응아 할 때도 하고. 지금 공격하면 꼼짝없겠다 싶을 때 여지없이 한 방 먹이는 거야.”

노동거사는 스스로 세 여인의 사부를 자청했다.

유수신투와 채의마옹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의 무공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유수신투와 채의마옹이 합공을 해도 노동거사를 당해내지 못한다. 무천의 삼관은 백 명 이상의 절정 무인이 추대를 해야만 앉을 수 있는 자리다.

삼관이 무공지도를 해준다는 건 그녀들에게는 복이었다. 어느 무림인이 이런 복을 마다하겠는가. 헌데,

“꼭 해야 되요?”

류취취가 싫은 표정을 지었다.

“무림인으로 살 것도 아닌데 뭐하러 배워요. 지금만 해도 충분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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