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밀공-104화 (104/125)

# 104

그의 짐작은 맞았다.

삼실은, 뇌옥은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린아이 팔뚝만한 굵기의 쇠창살이 길게 이어져 있다. 얼핏 보기만 해도 뇌옥이 삼십여 개쯤 된다.

그 속에 목내이가 가득 찼다.

뇌옥 하나에 이십여 구 정도 되는 목내이가 아무렇게나 놓여져 뒹군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모두 발가벗겨져서 소지품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목내이가 되면 신장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얼굴 형태가 모두 비슷비슷해진다.

이들은 영원한 실종자들이다.

상관외는 피가 들끓었다.

상상만 했는데도 여인들의 음기를 빨아들일 때 느꼈던 강렬한 쾌감이 전신을 관통했다.

아버지가 뺏어간 것은 진기뿐이다.

음양합밀공의 구결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생생하게 각인되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리라.

가주?

웃기는 소리 마라고 해라.

예전에는 큰 꿈이 있었다. 상관세가의 가주직을 이어받는 것도 꿈 중에 하나였다. 한 지역의 패주가 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웃기기만 한다.

가주와 마인 중 양자택일 하라고?

당연히 마인 아닌가. 여자의 음기를 빨아먹으면서 중원을 유람하는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오늘로써 가주직을 버린다?

이제야 아셨나? 한낱 문파를 이끄는 것보다 여자의 음기를 빨아먹는게 훨씬 즐겁고 짜릿하다는 것을.

그래도 가주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았을 테니까. 어쩌면 단 일 장에 때려죽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친 혈육이라고 상관파 대신 자신을 선택했다.

그것만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여기서 내공을 찾는 즉시…… 어느 계집을 고를까? 오늘은 간단하게 한 명만 맛보고……’

철창 안의 풍경이 다른 사람에게는 충격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쾌락의 결과로만 비쳤다.

그가 삼실 막다른 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버지가 말한 내공회복법이 무엇인지 알았다.

“후후! 크흐흐흐! 역시 아버님이야!”

그곳에는 자신도 익히 아는 여인들이 갇혀 있었다. 상관세가 혹은 백초원에서 한두 번 스쳐지나가며 얼굴을 보았던 여인들이다.

상관외는 눈을 감고 곧 다가올 희열을 만끽했다.

***

“쳐라!”

“승산이 없습니다.”

“너!”

“죄송합니다. 일방적인 도살을 당할 뿐입니다.”

“내가 잘못봤구나, 홍의랑주. 홍의랑이 싸움 앞에서 물러설 줄이야 상상도 못했어.”

“죄송합니다. 저는 노동거사를 이기지 못합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승패를 논한다? 그렇군. 그게 네 방식이었군.”

“차이가 나도 너무 나니까요. 전 제 자신을 알고 노동거사의 무공도 짐작합니다.”

“상관파. 치든가 물러서라. 널 따르는 자들을 데리고 가도 좋다. 넌 이 순간부터 홍의랑주가 아니니 홍의랑에 대한 명령권도 없다. 반 각 여유를 주마, 그 안에 갈 사람들을 데리고 가라.”

“가주님!”

“지금부터 정확히 반각이다.”

“그렇게까지 명하신다면…… 싸우겠습니다. 현실을 말씀드렸고, 받아들이지 않은 이상 따라야 할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존체 보존하시길!”

홍의랑주 상관파가 포권지례를 취했다.

그렇다. 그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해서 포위만 할 뿐 공격하지 않았다. 루검비가 절죽원주와 호리수를 풀어주는 모습도 지켜봤다. 제지하면 싸움이 벌어진다.

그는 루검비도 루검비지만 그의 뒤를 바짝 쫓는 두 여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소월신투와 왜화창부라고 들었다.

한 여인은 무림에 적을 뒀지만 변변치 않고, 또 한 여자는 아예 무인도 아니다.

그런 여인들이 그의 눈길을 잡아당긴다.

보폭, 발에 실린 무게, 손의 위치, 허리의 놀림……

그의 머릿속에 그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낱낱이 새겨졌다.

‘고수다!’

그것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

어제 상관세가에 난입하여 많은 무인들을 곤란하게 만들 때까지만 해도 이토록 강한 고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밝은 대낮에 모든 행동이 환히 보이는 곳에서 정신을 집중시켜 살펴봤다.

상관세가에서는 보지 못했던 절대 기도가 넘실댄다.

싸움이 안 된다. 그나마 믿을 것이라고는 인해전술(人海戰術)인데, 그러기에는 인원이 너무 적다. 지금보다 네 배, 다섯 배 정도 되는 사람들이 달려들어야만 죽이다가 지친다.

상관세가의 무인들은 그토록 비참하게 전락했다. 너무나도 강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확 내렸다.

“공격이다!”

바로 옆에서 수신호를 받은 홍의랑이 큰 소리로 외치며 제 죽을 줄 모르고 달려나갔다.

쉬익! 촤라락! 쒜에엑!

철사는 목을 조이는데 사용되지 않았다. 채찍처럼 후려치는데 쓰였다. 노리는 부위는 검 아니면 팔이다. 검을 감싸면 손아귀를 찢어버리며 허공에 띄웠고, 팔에 닿으면 잘 든 도검으로 베어내듯 싹둑 잘라버렸다.

홍의랑과 용검대 무인들은 잘린 팔을 움켜잡고 팔짝팔짝 뛰었다.

“받앗!”

휘르르릉!

천수검법이 현란한 변화를 일으키며 몰아쳐왔다.

팟! 스읏!

소월신투와 류취취는 어떤 검에도 노출되지 않았다. 검이 변화를 일으키기 전, 그녀들의 신형은 벌써 검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반격이 이어졌다.

따앙!

검 한 자루가 철사에 칭칭 감기더니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헉!”

“죽이긴 싫어. 물러섯!”

검을 잃은 무인은 정신없이 뒷걸음쳤다.

신법 차이가 너무 난다. 느린 굼벵이와 닭의 싸움처럼 보인다.

인간의 움직임이 이토록 빠르다면, 상대할 사람이 없으리라.

‘저 빠름을 무너트리지 않는 한……’

홍의랑주는 검을 뽑았다.

“사자(死者) 천수강막(千手剛幕)!”

홍의랑들은 매에게 쫓기는 병아리 떼처럼 물러서기 바빴다. 그러다 천둥처럼 들려온 일성에 황급히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그들은 평생을 가주의 그림자로 살아온 사람 아닌가.

척! 척척척!

전면에 무인 열 명이 섰다.

그들은 언제 꺼내들었는지 굵은 철삭으로 서로의 몸을 묶었다.

열 명, 열 명, 열 명……

사방에서 몸을 묶은 홍의랑이 거리를 좁혀왔다.

지금 당장은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열 명이라고 해봐야 큰 거리를 모두 가리지는 못한다. 더군다나 그들은 어깨를 바짝 붙여서 넓이를 최대한으로 죽였다.

“뭐 하자는 걸까?”

류취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자 천수강막이라는 거다. 홍의랑이 아니면 펼칠 수 없는 거지.”

“사자 천수강막이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요. 저게 뭐냐고요.”

“뭐긴 뭐야! 죽겠다는 거지.”

“죽어요?”

“자신들 육신으로 움직일 공간을 차단하겠다는 뜻이야!”

그들이 말을 나누는 사이, 홍의랑 쪽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촤악! 스르릉! 촤아악!

열 명의 홍의랑 중 맨 가장가리에 있는 홍의랑이 다른 조를 향해 철삭을 던졌다. 다른 조에 있던 홍의랑이 철삭을 받아 몸에 둘렀다. 이로써 사면(四面)에 인벽(人壁)이 생겼고, 인벽 사이에는 철삭이 다섯 겹이나 둘러쳐졌다.

“쏴라!”

홍의랑주는 아끼고 아꼈던 명령을 내렷다.

쒜에엑! 쉐에에엑!

담장 위에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냈다.

팟! 파파파팟!

루검비 일행은 번개불에 콩 튀듯 튀었다.

그들과 담장과의 거리는 너무 가깝다. 더군다나 그들이 쏘아내는 것은 강하기 이를 데 없는 철시다.

피한다는 게 기적 같다.

더불어서 루검비와 노동거사는 각기 절죽원주와 호리수를 안아들어 있다.

“이대로는 오래 못 버텨!”

노동거사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며 소리쳤다.

화살만 쏘아대도 견디기 힘들다. 하물며 그들은 인벽을 좁히고 있다. 철삭을 조금씩 당겨 느슨해지는 것을 방비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온다.

용검대 무인들의 홍의랑 뒤로 붙었다. 그들은 두 눈에 독기를 품고 언제든 천수검법을 펼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모두 다 죽이는 것은 쉽다.

죽은 자들을 짓밟고 뛰쳐올라 용검대 무인들과 검을 부딪치기까지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이어질 게다.

죽이고 싶지 않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 목숨은 귀히 여겨져야 한다. 가능한 검을 쳐내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팔을 자른다. 그것도 괴로운데 목숨까지 빼앗아야겠나.

무림인의 삶과 죽음에는 관심없다.

무림에서 살려면 검을 쓸 때 잔인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럴 수 없다.

누가 무림에서 살고자 했나? 지금도 무림과 인연을 맺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물론 홍의랑도 몰살 당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인벽이 무너지는 순간 곧바로 다음 수를 쓸 것이다. 인벽은 아예 검조차 들고 있지 않으니 마음껏 목숨을 취하라는 뜻이지 않은가.

“뭘 하든 빨리 하자고!”

노동거사가 화살 두 대를 잡아챘다. 신형은 세 번이나 뒤틀었다. 가까이서 쏘아대는 화살을 피하기가 그리 녹녹치 않았다.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화살만 피해야 하니……

“내가 앞장 선다!”

루검비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홍의랑은 무공수련만큼이나 중요시하는 공부가 있다. 목숨을 내던져야 할 때, 기꺼이 던질 수 있는 용기다.

홍의랑이 죽기로 결심하고 나섰으니 이들을 물러서게 할 방법은 오직 무력제압뿐이다.

루검비는 검을 쓰지 않았다.

“물러섯!

쩌렁 일갈이 터졌다.

제일 먼저 영향을 받은 무인들은 담장에서 활을 쏘던 궁수들이다.

“헛!‘

“음!”

그들이 황황히 활을 내려놓고 뒤로 빠졌다.

화룡이 화룡을 친다.

그들은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을 때처럼 숨이 차면서 구토가 치밀었을 것이다. 화룡을 쳐서 생기를 위축시키면 기혈에 타격이 가해진다. 진기는 화룡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러섯!”

두 번째 고함은 인벽을 향해 쏘아졌다.

인벽은 잠시 움찔거렸다. 누군가는 뒤로 빠질 생각을 했다. 허나 그들은 철삭에 묶여 있었고, 몇 명이 버티고 있어서 뒤로 빠질 수가 없었다.

“물러섯!”

그가 세 번째 고함을 터트릴 때

쒜에엑!

눈앞에서 번쩍 불길이 솟앗다.

붉은 검이다. 검신이 빨간 색이어서 불길이 솟구치는 것처럼 보인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불꽃이 허공을 수놓는다.

까앙! 까앙! 까앙!

루검비는 봉황검으로 적검(赤劍)을 상대했다.

“훗!”

상대가 거친 고함을 지르며 물러섰다.

“봉황검! 봉황검이 어찌 네 손에! 흠! 봉황검이 명검인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무서울 줄은 짐작 못했군.”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적검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적검에 이가 빠졌다. 어떤 곳은 톱니처럼 들쑥날쑥했다. 봉황검과 부딪친 결과다.

“홍의랑주, 그대를 죽이고 싶지 않소. 물러서 주시오.”

순간 홍의랑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몰랐는가? 사자 천수강막이 펼쳐지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이 안에 들어선 것은 수하만 사지로 몰아넣을 수 없기 때문. 우리들은 다함께 저승동무가 된 게야.”

“발진(發陣).”

홍의랑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발진? 그럼 아직 진이 발동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럼 여태까지 한 것은 무엇인가.

순간, 홍의랑이 적의를 벗어던졌다.

그들은 안에 갑옷을 받쳐 입고 있었다. 갑옷의 겉면에는 송곳이 삐죽삐죽 삐져나와있어서 몸으로 부딪쳤다가는 고슴도치를 껴안는 꼴이 될 것이다.

척척척척……!

그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동귀어진(同歸於盡)!’

루검비는 그들의 심사를 읽었다.

그들의 화룡이 급하게 뛴다. 머리 위까지 치솟았다가 단번에 회음혈까지 내려오곤 한다. 인간이 죽음에 직면하기 전에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생존 몸부림이다.

“살(殺)!”

루검비는 쩌렁 고함을 내지르며 봉황검을 힘껏 떨쳐냈다.

제30장 태초에

1

파파파파팟!

갑옷에 꼽혀 있던 송곳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사면에서 일시에, 무조건 앞으로만 쏘아냈다. 적을 조준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신법을 펼쳐 피할 터인데, 조준해봤자 무엇하는가. 그냥 앞으로만 쏘아낸다.

기가 막히게도 그러한 방법은 아주 효과가 높았다.

루검비 일행은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아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자 천수강막이 펼쳐진 이상 죽음을 모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다! 있다!

따다다다땅!

루검비의 검이 맹렬하게 휘둘러지며 쇠털처럼 수많은 송곳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랬다.

루검비와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들은 많다.

두 여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철사를 빙빙 돌렸다. 그러자 무형(無形)의 방패(防牌)가 생성되었다.

노동거사도 검을 마구 휘둘렀다.

따따땅! 따땅! 쒜에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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