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하늘에서 지상으로 쏜살같이 내리꽂힌다.
흐름이 유유하다. 비스듬한 곡선이 여인의 아미(蛾眉)를 그려놓은 듯하다.
유성이 불꽃들을 가른다.
분분히 떨어지던 불꽃들이 한 줄기 한성(寒星)에 베어져 치직 소리를 내며 꺼진다.
상관세가는 천수검법 안에 일섬광휘(一閃光輝)라는 초식을 두었으며, 모든 환검(幻劍)을 제압할 수 있는 중검(重劍)이러고 설명해 놓고 있다.
일섬광휘는 빠르지 않다. 무겁다. 너무 빨라서 부딪쳐 올 틈조차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딪쳐오는 것은 모두 깨어버리면서 나아간다.
퍼억!
봉황검이 상관가주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쇄골이 단번에 잘렸다. 폐가 베이고, 위장이 반으로 갈라졌으며, 갈비뼈가지 우드득 잘려나갔다.
“커억!”
상관가주가 신음을 토해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루검비를 쳐다봤다.
“어, 어떻게…… 어떻게…… 백…… 년…… 내공…… 을……”
화룡이 깃든 손에 정통으로 가격당하고도 멀쩡했던 그다. 그는 이번에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루검비는 중상을 당한 상태였고, 검법도 자신이 너무 잘 아는 천수검법이다. 질래야 질 수 없는 싸움이다. 허나 그는 그때와 달라진 것이 몇 가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우선 루검비는 화룡을 똑바로 직시할 줄 알게 되었다.
진기가 결코 화룡보다 뛰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산관 가주에 대한 압박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두 번째로는 그의 손에 봉황검이 쥐어졌다는 것이다.
화룡을 운집하여 초식을 전개해도 깨어지지 않는 보검이 있으니 마음놓고 절초를 펼칠 수 있다.
단지 육장으로 상대할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루검비에게는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으나 운명은 한 사람 손만을 들어주었다.
이것이 결투다.
2
그 시간, 상관락은 삼실로 들어섰다.
그는 가주의 지하 밀실을 상세히 파악해 놨다. 상관세가에서 살아온 나날이 며칠인데 그 정도도 모르겠는가.
‘쯧쯧!’
소리내어 혀를 차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목내이를 보는 순간 자연히 탄식이 쏟아졌다.
확실히 가주는 제거되었어야 할 사람이다.
헌데 또 작은 악마가 또 다시 탄생했다. 큰 악마를 제거해 줄 사람이 나타나니까 이번에는 작은 놈이 설쳐댄다.
“하악! 아아…… 좀 더…… 하악!”
삼실 안쪽에서 여인의 교성이 짜랑짜랑 울렸다.
음양합밀공은 참으로 무서운 무공이다.
사내는 목적을 위해 정사를 갖는다지만 여인은 무엇 때문에 저리 교성을 지르는가.
여인은 정사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선 낯선 사내와 처음 만나 옷을 벗고 날뛴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좋다. 세상에는 강간도 있고, 협박도 있으니 여자의 옷 정도는 쉽게 벗길 수 있다고 치자.
지금과 같은 환경 속에서 정사를 가질 마음이 생길까?
철창에 수많은 목내이가 있는 걸 봤으면서, 자신도 정사를 나누면 저리 된다는 걸 인식하면서…… 그래도 교성이 새어나올까?
“하악! 아아아……!”
여인은 신음소리로 상관락의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음양합밀공을 운용하는 순간, 여인은 이성을 잃는다. 춘약(春藥)을 복용한 것보다도 더 큰 환락 속에서 본능적인 열망에 충실해진다. 소리를 지르고 싶으면 지르고, 깨물고 싶으면 깨물고, 할퀴고 싶으면 할퀸다.
단언컨데 여인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까마득히 모를 것이다. 낯선 사내와 정사를 벌인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 소리를 질러대는 여인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여인은 옷을 벗는 순간 이미 사망했다.
‘저 악마를!’
가주가 상관외를 뇌옥에 가둘 때부터 이상한 조짐을 읽었다.
가주는 루검비를 표본 삼아 상관외를 키운다.
모든 진기를 빼앗겼다가 다시 되살아난 루검비처럼 상관외의 단전 자리를 텅 비워버렸다.
상관세가에서 얻은 양강진력(陽剛眞力)을 모두 제거해버렸다.
그 속에 오직 음양합밀공으로 거둬들인 혼원진력(混元眞力)을 불어넣는다.
그리하면 상관외는 이성을 잃고 오직 채음보양에만 매달리는 마인이 될 것이다. 하루 한시도 여자 없이는 살지 못하는 몸이 되리라.
세상의 이목은 당연히 상관외에게 집중될 것이고, 가주는 마음 놓고 흡정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그가 만든 모든 목내이는 상관외가 저지른 일로 둔갑하리라.
‘루검비가 진다면…… 형님 뜻대로 되게 할 수는 없지.’
스르릉!
그는 검을 뽑았다.
“흐흐흐! 이숙!”
“외. 네 눈에 아직도 이 이숙이 보이냐?”
“아니. 못난 놈만 보이는데?”
“다행이구나. 널 베려는데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미안은 무슨…… 어이, 늙은이. 진기는 충실히 쌓아놨겠지? 죽은 후에라도 이 조카에게 존경 한 마디는 들어야지 되지 않겠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상관락은 전력을 기울려 검을 그어갔다.
“좋아요!”
상관외가 기쁜 듯 즐겁게 웃었다. 그리고 옆에 쓰러져 있던 목내이를 발로 툭 차서 상관락에게 쏘아냈다.
“이런 악독한!”
툭! 툭!
상관외는 다른 두 구의 목내이도 던졌다.
그는 이곳에 들어와 모두 세 여인의 진기를 빨아먹었다.
그 진기를 모두 소화시켰다면 상당한 수준의 내공이 쌓였을 게다.
쉬익!
상관외의 신형이 물 찬 제비처럼 날아왔다.
상관세가의 독문신법인 연자해비(燕子海飛)다.
촤아악!
상관락은 상관외의 머리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그 순간, 상관외의 신형이 묘하게 비틀렸다.
연자해비는 두 다리의 강건함에 바탕을 둔다. 상체가 기울어지는 것을 하체가 받쳐줘야 한다. 때문에 진기운용법도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에 집중되어 있다.
상관외는 몸을 확 뒤집었다.
가슴을 위로 하고, 다리는 굳건히 버틴다. 두 손은 뒤로 하여 바닥을 짚었다.
상관세가의 신법이 아니다.
“어디서 요상한……”
그는 말을 이을 틈이 없었다.
상관외가 네 발 짐승처럼 두 손, 두 발을 이용하여 바짝 달려들었다. 가슴을 위로 했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여간 곤란하지 않을 텐데, 그의 신법은 뱀처럼 부드러웠다.
쒸익!
상관락은 검 자루를 고쳐 잡는 즉시, 허공으로 떠오르며 복부를 힘껏 내리찍었다.
“흐흐흐흐!”
상관외가 기분 나쁜 웃음을 터트렸다.
쉬익! 쉬이익!
상관외의 상반신이 용수철처럼 퉁겨 오르며 상관락의 두 다리를 낚아챘다.
“엇!”
상관락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상관외는 등 뒤로 돌아가 그의 상반신을 꽉 껴안았다.
“이놈!”
상관락은 진기를 모음과 동시에 힘껏 발길질을 했다.
뒷발로 놈의 무릎을 찍고, 이어서 발등을 내리 찍는다.
허나 그의 공격은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쏴아아아아……!
진기가 급격하게 빠져나간다.
“이, 이놈! 이놈……!”
“괜찮아. 괜찮아.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천천히……”
상관외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상관락에게 하는 말인지 대상이 분명치 않은 말을 중얼거렸다.
쏴아아아아!
어느 순간, 상관락은 들고 있던 검을 떨궜다.
진기가 너무 빠져나가 검을 들고 있을 수 없었다.
“허허! 허허허허!”
그는 넋 잃은 사람처럼 실실 웃었다.
야망을 가진 적도 있고, 상관세가를 진심으로 위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 역시 골육상쟁(骨肉相爭)쯤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가(世家)에서 태어난 사내들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삶이 아니라 강요된 굴레다.
그것만은 바꾸고 싶었다.
자신이 진기까지 내주며 죽을 줄은 진정 몰랐다.
상관외의 무공이 이 정도였던가? 그렇다면 자신은 물론 가주도 용검대주는 잘못 알았다. 크게 잘못 봤다. 자신이 일을 그르친 것처럼 가주도 소원대로 일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그야말로 저주받은 골육상쟁이다.
“후후후! 우하하하하!”
그는 앙천광소를 터트리며 심맥(心脈)을 끊었다.
“쩝! 한참 잘 먹고 있었는데.”
상관외는 입맛을 다셨다.
진기를 빼앗겼다고 죽을 날만 기다리며 멍청히 지낼 놈이 누가 있는가.
그는 뇌옥에 있는 동안 루검비를 연구했다.
그가 용검대와 싸우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구석도 빼놓지 않고 되새겼다.
루검비의 신법은 독특했다.
진기를 빼앗기 위해서는 상대와 밀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생각하지 못하는 기상천외의 신법을 필요로 한다. 상대가 깜짝 놀라 ‘어!’하는 사이에 등 뒤로 돌아가 껴안고 있어야 한다.
그는 루검비를 연구한 결과 몇 가지 신법을 찾아냈다.
무공에 숙달된 몸인지라 수련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지, 내공이 없으니 효율적인 움직임을 전개할 수 없는 게 답답할 뿐이었다.
남는 시간동안 그는 계속 루검비만 생각했다.
진기를 어떻게 뽑더라?
진기를 뽑을 때, 그의 몸은…… 손은…… 다리는 어디에 위치해 있었더라?
그를 면밀히 살피다 보니 공통점이 드러났다.
자세는 각기 다르지만 모두 승장혈과 수분혈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 위치다.
그 다음은 쉽다. 음양합밀공에도 진기를 출입에 대한 부분은 기술되어 있다.
문제는 자신이 생각한 것이 맞느냐 였다.
맞았다. 그는 두 여인의 진기를 자신이 생각한 방식대로 뽑아 흡취했다.
루검비 방식은 음양합밀공보다 훨씬 탁월하다. 진기를 빨아들인 즉시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준다. 단지 뽑아먹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일정 부분을 넘어서면 남은 진기는 모두 허공에 흩어져 버린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많은 진기를 빨아들여봤자 그릇이 작으니 채우는데 한계가 있다.
그릇을 넓혀야 한다. 어떻게?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다.
마지막 여인은 음양합밀공을 펼쳤다.
루검비 방식이 느리다고는 하지만 음양합밀공에 비하면 훨씬 빠르다. 손만 대어 진기를 빠는 것과 온전히 정사를 벌이는 것과 어느 것이 빠르겠는가.
그녀와 정사를 벌인 것은 여체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루검비 방식은 진기만 키워줄 뿐, 여체에 대한 충족감은 채워주지 않는다.
솔직히 루검비가 색마가 되어 날뛰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런 무공으로 색마가 되었다면 음양합밀공을 수련하면 아예 정신병자가 되었을 게 아닌가.
모두 만족스럽다.
진기도 가득 찼고, 평소 꼴 보기 싫던 이숙도 제거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이숙의 막강한 진기가 거의 대부분 흡수되지 않고 재발산되었다는 거다. 일부는 몸에 찰싹 붙었지만 많은 부분이 날아갔다.
빨리 그릇 키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빨아먹는 족족 진기가 커질 것이다.
그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 되어 삼실을 나섰다.
“이거였군. 오늘 상관세가가 없어질 것 같다고 한 말이. 난 또 무슨 말이라고.”
상관외는 죽은 사람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홍의랑은 전멸했고, 용검대도 절반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
평소 경비를 담당하는 수경원(守警院) 무인들은 사색(死色)이 되어 벌벌 떨고 있으며, 세가에 들어오면서부터 오직 궁술 하나만 집중적으로 연마한 궁정(弓鼎) 무인들도 활을 놓고 멍하니 앉아있다.
“루검비냐?”
“네. 흑! 가, 가주님께서! 흑흑!”
상관외를 보자 궁정 무인이 울기 시작했다.
그는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아버지의 시신을 살폈다.
베어도 야무지게 베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살 가망이 없다. 말도 몇 마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원하게 욕지거리라도 하고 죽었으면 괜찮으련만 기껏해야 ‘윽!’이나 ‘억!’ 소리 정도 내뱉고 죽었다.
그는 또 다른 점도 봤다.
아버지의 승장혈에 뚜렷한 자국이 있다.
‘응? 이건! 호…… 혹시!’
그는 재빨리 앞섶을 헤치고 수분혈을 살폈다.
그곳에도 흔적이 있다.
분명히 루검비의 환희밀공이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한 듯 싶다.
‘후후후! 그랬군. 환희밀공으로 진기를 흡취할 수 있는데, 이 아들에게는 감쪽같이 숨겼군. 가주라는 알량한 자리 하나 던져주고. 가만…… 그것도 아니네. 노인네는 내가 음양합밀공을 버리지 못할 걸 알았어. 삼실에 계집은 넣어뒀던 것도 그렇고…… 후후후! 후후후후! 나보고 똥 짐을 져라? 자기는 곶감만 따먹고?’
그는 아버지의 속셈을 읽자 그의 죽음에 일발의 애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기쁜 마음을 추스르고 짐짓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리해라. 장사 같은 건 없다. 시신은 수습해서 화장한다. 지금 당장! 어섯!”
“용검대주님, 그래도 가주님만은……”
“아버님도 따로 장사지내는 건 원치 않으실 터. 시신을 한데 모아 합동 화장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