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밀공-113화 (113/125)

# 113

“천신갑(天神甲)이면 될 겁니다.”

“천신갑이 모적방에 있던가?”

“네.”

“후후후! 역시 모적방이야. 천신갑까지 가지고 있다니.”

광전신군은 정말 기뼜다.

천신갑은 도검에 뚫리거나 베이지 않는다. 또한 매미날개처럼 가벼워서 무복 속에 받쳐 입을 수 있다. 밖으로 드러난 손발과 머리만 공격당하지 않으면 모든 위험으로부터 해방되는 절세의 보물이다.

여자 두 명 죽이는 대가로 천신갑과 지하 금맥의 재산이라면 남아도 훨씬 남는 장사다. 그만한 돈과 안전이면 무천을 버리고 새로운 배로 갈아타도 된다.

“모적방주를 모셔라. 정중히.”

주고받을 게 많은 날은 활력이 넘쳐서 좋다.

***

유화는 무천으로 돌아왔다.

이유없이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자들과 싸우는 중에 낯선 기운을 감지했다.

이상하게도 정겨웠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남자들에게서 화룡을 느끼고, 여인을 보면 수룡을 본다.

거기에 어떤 감정 같은 것은 녹아들지 못했다. 루검비와 그의 여인인 두 여자를 제외하면 어떤 사람을 봐도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녀의 천성이 워낙 차가웠던 탓이다.

지인에게는 더 없이 친절하지만 낯선 사람을 보면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런 쌀쌀맞은 성격이 수룡을 알게 된 후에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헌데 낯선 곳에서 풍기는 여인의 향기가 유달리 정겹게 느껴지니 웬일일까?

그녀는 일부러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여인의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졌다가 빙 에둘러 뒤를 밟았다. 그리고 첨화를 봤다.

‘첨화……’

그녀였기에 정겨웠던 거다.

의지할 곳 없던 곳에서 서로 흉금을 터놓고 지냈던 사이이기에 수룡 속에 따뜻한 감정이 녹아있었던 것이다.

유화는 큰 배신감과 더불어 억제하기 힘든 살기를 느꼈다.

왜? 왜? 왜?

그러다 문득 자신이 루검비에게 했던 행동을 떠올렸다.

무류 왕신파의 곁을 떠나기 싫었다. 그가 나타나 환희교를 떠올리게 한 것이 못마땅했다. 교주도 죽고 없다. 환희교도는 모두 살해되었다. 그만 사라지면 남에게 존경받는 의원이 되어 한 평생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는데, 그 지옥으로 다시 들어가자고!

루검비를 해할 수밖에 없었다.

첨화도 같은 심정이리라.

그녀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다. 환희교도들이 헌납한 재산이라니 기껏해야 절곡에다가 전각 한두 채 세울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아무 것도 없던 그녀에게는 큰 돈이리라.

첨화의 본심을 알고 나자 건드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녀는 살수까지 동원하여 자신을 죽다. 물론 괘씸하다. 허나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반대 입장이 되어 보니 자신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물러나려고 했다.

가진 돈으로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랐다.

헌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

그녀의 뒤를 상당히 강한 자가 암암리에 따라붙고 있지 않은가.

그 자가 누구이며 첨화를 노리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 자가 손을 쓰면 첨화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죽는다.

뒤를 밟았다. 첨화 뒤에 사내가, 사내 뒤에 자신이 있었다.

이윽고 무천에 도착했을 때, 첨화는 사내를 불렀다. 무천 근처 야산에서 뜨거운 욕정을 불태웠다. 긴긴 밤, 첨화는 사내와 정겨운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아침이 되자 무천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당당히 배첩을 내놓았다.

무천에 배첩을 통보하고 들어갈 만한 신분이 된다는 뜻이다.

그제야 유화는 첨화의 내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 같았으면 꿈도 못꿀 정도로 강한 사내와 동침을 하고, 무천 정문을 당당히 들어서고……

‘첨화.’

유화의 눈길이 가늘게 좁혀졌다.

“누구냐!”

그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우뚝 멈춰섰다.

언제부터 따라온 것일까? 커다란 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들어서자 낯선 기척이 감지되었다.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다면 그만 나오는 게 어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면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화!”

그는 단번에 유화를 알아봤다.

‘역시!’

이제야 알겠다. 이 자는 첨화의 정부다.

“첨화에 대해서 말해줘.”

차앙!

대답은 호수구(護手鉤)로 돌아왔다.

그는 한 손에 한 자루씩 두 자루의 호수구를 들고 즉각 기수식을 취했다.

“날 보아왔으면 상대가 안 되는 걸 알 텐데?”

“보내주시오.”

뜻밖에도 그의 음성에는 절박함이 묻어나왔다.

“너흰 날 암살하려고 했는데, 내가 왜 보내줘?”

“제발…… 후일 꼭 목숨을 드리겠소. 시간과 날짜를 정해도 좋소. 오늘만…… 오늘만은 보내주시오.”

“그러니까 왜 보내줘야 하냐고?”

“……”

사내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말로 해서 안 될 줄 알았어. 우선 한 판 붙어보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그가 번개처럼 신형을 날려 숲 안쪽으로 뛰쳐들어갔다.

“풋! 정말 말 안 듣는다니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헌데!

“악!”

숲에서 짤막한 신음이 터지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휘이잉……!

미풍이 숲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만 나와. 알고 있으니까.”

“호호호! 들킬 줄 알았어요. 이놈의 수룡이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다니까.”

맑은 교소와 함께 안쪽에서 걸어나오는 사람은 소월신투였다.

그녀의 허리에 방금 전에 도주했던 사내가 축 늘어져 있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두 사람 모두 지인에게 배신당했고, 지인들은 한결 같이 무천으로 도움을 청하러 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모적방에는 어느 무인이나 탐낼 보물이 있어요. 천신갑이라고 하는데, 그걸 착용하면 무적이라고 자부해도 되요. 도검에 상하지 않거든요.”

“그것으로 널 죽인다고? 너, 유명인사가 되었구나.”

“푸훗! 그러게요. 모적방 밑천이나 다름없는 걸 내놓는 것으로 보면 급하긴 급했나 봐요.”

“후회 안 해?”

“이 길 택한 거요? 안 해요.”

“아니, 그 애 곁을 떠난 것.”

“어멋! 신랑보고 애라뇨? 언니는 말투도 문제지만 그 생각부터 바꿔야 해요. 언제까지 코흘리개 어린애로 볼 거예요? 이제는 어엿한 대장부라고요.”

“말 돌리지 말고.”

“쪼금요. 쪼금 후회해요. 밤이 되어 오솔오솔 한기가 들 때 더 생각나곤 해요. 호호호! 언니는요? 첨화라는 그 여자, 뭘 내줬데요?”

“몰라.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유화는 혼절해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이 형당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혼돈으로 밀어 넣던 여인이란 걸 꿈에도 모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발 살려달라며 아우성 쳤던 사실은 더더욱 모르리라.

거기에 한 가지 장점이 더해졌다.

무류 왕신파에게 의원 수련을 거치면서 인체의 신비에 대해 더욱 해박해졌다.

“우리 내기할까? 듣고 싶은 말을 듣는데 반 각. 어때?”

그녀가 품에서 침합(針盒)을 꺼내며 말했다.

2

누가 공격해 올 줄 안다.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

이제 조건은 공평해졌다.

사내는 유화가 손을 쓴지 일다경만에 뱃속에 있는 비밀을 술술 불어냈다. 첨화가 왜 무천에 갔으며, 그녀의 신분이 무엇이며, 재산은 얼마나 되며……

유화가 손을 털고 일어섰다.

“제, 제발……”

“목숨은 살려주잖아.”

“주, 죽여주시오.”

사내가 간절히 원했다.

유화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의 천령혈에 세침(細針)을 깊이 박았다.

“끄으윽!”

그가 절명했다.

“정말 지독해요. 어쩜 그럴 수 있어요?”

지켜보던 소월신투가 하얗게 질린 낯으로 말했다.

사내의 관절이란 관절은 모두 부러트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우두둑 꺾어버렸다.

그 다음은 갈비뼈를 하나하나 부러트려나갔다.

인정사정도 없었고, 시간을 지체하지도 않았다. 뼈마디를 빨리 부러트릴수록 말하는 시기가 빨라진다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연신 손만 놀려댔다.

사내가 극심한 충격 속에서 횡설수설,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말했을 때는 이미 회생불능의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토설했다는 사실도 뒤늦게야 깨달았다.

아픔이란 이런 것이다.

“분근착골(分筋錯骨)이란 것인데, 검비는 오래 전에 겪었어. 이 자는 토설했지만 검비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정말요?”

“아니. 날 사랑한다고 하더라.”

“푸훗!”

소월신투는 유화의 바람대로 밝게 웃어주었다.

성신을 운용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밝음과 즐거움을 찾는다. 어두움에 물들었다가도 금방 밝음으로 돌아온다. 나쁜 짓을 했을 때, 죄책감을 느끼고 바른 사람으로 돌아오는 주기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빠르다.

고문은 나쁘다. 알면서도 행한다. 수룡은 잔뜩 움츠려든다. 싫은 것을 보지 않으려고 외면한다. 고문이 끝난 후에는 불현듯 치민 죄책감에 몸을 떤다.

마치 수룡이 ‘거봐!’하며 질책하는 듯하다.

그녀들이 사람을 고문하거나 죽일 때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심한 번뇌와 갈등을 느낀다. 그런 고통을 참아가며 사람에게 철사를 휘두르는 것이다.

슬픈 일, 괴로운 일을 겪고 나면 웃어주는 게 제일 좋다.

이건 그녀가 겪어봤기에 안다. 모적방도를 죽이면서 애꿎은 사람을 죽인다는 죄책감에 손끝이 한두 번 떨려본 게 아니다. 그래도 눈 찔끔 감고 철사를 휘둘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말씀하신다. 악귀로 살지 말고 사람으로 살라고 하신다.

그래서 요즘은 할아버지 얼굴도 떠올리지 않는다. 부지불식간 머릿속을 차지하면 도에 깨끗하게 베어진 머리 밑 부분만 생각한다. 얼굴은 보지 않는다. 그래야 증오심이 조금이라도 더 생긴다.

“통령이 오겠지?”

“이미 소문 날대로 났으니 한두 명 선에서 그치진 않을 거예요. 칠통령 중 몇 명은 올 거고……”

“누가 이길까?”

“서로 장담하지 못하죠.”

“좋아, 따라와.”

“어디로 가게요?”

“우리나 무천 무인들이나 죽어도 억울하지 않은 곳으로 가자고. 이런데는 너무 삭막하잖아.”

그녀가 소월신투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거 더러워서 원…… 돈 없고 줄 없는 놈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만 쏙 가려내는 건 뭐야?”

서자묵이 투덜거렸다.

“이겨도 개망신, 져도 개망신인 싸움이에요. 자기 수족을 이런 데 보내겠어요?”

박빙 서채하도 입을 삐죽 내밀었다.

초진량은 의견이 달랐다.

“내 느낌은 달라. 이건 뭐랄까…… 아주 더러워.”

“그럼 더럽지 깨끗해? 무공도 몰랐던 여자를 죽이러 가는 건데.”

“음음…… 그런 게 아니라 기분이 묘하다니까. 뭐랄까 상대하기 벅찬 괴물을 죽이러 가는 기분이야.”

“뭐? 하하하! 초진량도 다 됐구나.”

“나도 그러길 바라는데…… 내 직감 알잖아?”

“싸우기도 전에 미리 초지지 마요.”

“흐음! 그러길 바라자고.”

세 사람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유화가 섬폭(蟾瀑)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폭포 아래에 두꺼비 바위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인근에서는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끝장내야 한다.

원래 이런 일은 끝낼 때 끝내야지 그러지 않으면 아주 긴 싸움이 된다.

쉬이익!

그들은 경공까지 펼쳤다.

“넌!”

“어!”

소월신투와 서채하는 서로를 보고 놀랐다.

“네가 여길 어떻게……?”

“무천에서…… 왔구나. 날 죽이러.”

“네가 아냐. 저 여자야.”

“인사해. 내가 언니로 모시고 있어. 이름은 유화. 저기는.”

“알고 있다. 박빙 서채하. 십삼단백지가 일절이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유화뿐이라면 간단히 제거할 수 있는데, 소월신투까지 가세해 있으니 참으로 난감하다.

그녀는 박빙의 유일한 벗이다. 박빙은 소월신투를 위해서 왜화창부 류취취를 빼돌린 적까지 있다. 무천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는다는 칠통령 중에 한 명이 그런 일을 했다.

그녀가 소월신투를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 정말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무천을 위해서 벗을 죽일 것이냐, 벗을 위해서 무천의 명을 거역할 것인가.

“저 여자와 같이 싸울 거야?”

그녀가 유화를 가리켰다.

“미안해. 이분, 내겐 친 언니나 마찬가지야.”

소월신투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나와 싸우는 일이 있어도?”

“미안해.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이리와. 내 곁에 있어.”

소월신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서자묵과 초진량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그들이 손을 쓰기 전에 서채하가 먼저 결정을 내려줘야한다.

“조하. 할아버님, 이야기 들었어. 그래서 이러는지 알겠는데, 이건 아냐. 이리 와. 내 곁으로. 좋아! 너와 나. 우리 둘이 싸움에서 빠지자. 그럼 공평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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