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밀공-120화 (120/125)

# 120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이 네 가지만이 성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환희교의 교리나 불교의 교리나 자신을 가다듬는 부분에서는 맥을 같이 한다.

불가는 계를 어기면 어찌한다 했는가. 수많은 번뇌와 고통이 따를 것이라고 했다.

파계(破戒)를 한 자에게 인간이 주는 형벌은 수많은 고통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더 많은 번뇌와 고통이 스며들 것이다. 차라리 알지 못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번뇌가 부처님을 알게 됨으로 해서 일어나게 된다.

소월신투가 같은 경우다.

그녀는 살인을 한다. 그리고 사람을 죽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그녀의 살인은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할아버지의 복수라는 당당한 명분이 있다. 할아버지의 죽음도 근본 원인은 그녀에게 있지만, 모적방주를 죽이겠다는 생각에는 별다른 하자가 없어보인다.

이것이 일반인의 생각이다.

수룡을 알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살인을 할 때마다, 거짓말을 하고, 음란한 행위를 할 때마다 수룡이 움츠려드는 것을 본인 스스로 느끼게 된다.

수룡을 보지 못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을 봄으로써 알게 된다.

그런데도 살인을 할 때가 있다.

살인을 함으로써 밀려올 수많은 번뇌와 고통을 감수하고 칼을 휘두른다.

만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경우다. 한 사람의 마인을 살려둠으로써 수백 명이 고통을 받는다면 기꺼이 그를 죽여 만인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은 살인의 대가인 번뇌와 고통에 시달린다.

바로 화룡의 이면이다.

이들을 모두 죽여 세상을 정화시키고, 자신은 이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산다.

이러한 고통은 결코 죽는 것에 뒤지지 않는다. 차라리 속 편하게 죽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루검비는 살인의 유혹을 뿌리쳤다.

이들을 교화시키겠다는 자신감은 자신, 즉 화룡이 선언한 것이다.

어렵지만 할 수 있으니 이들을 받아들였다. 이제와서 그 길이 힘들다고 살인이라는 간단한 방법을 선택한다면 그의 화룡은 여기서 성장을 멈추리라.

그는 결심했다.

독룡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화룡전이를 해야 한다. 이들도 자신의 내면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을 알 권리가 있다.

“더 이상 안 되겠어. 보아하니 화룡전이인가 뭔가 할 모양인데. 저들이 모두 환희교도가 된다는 걸 생각해보게.”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우리 선입견이 아닌가 하는. 원래 나쁜 사람은 없지 않나요? 저들을 교화시켜서 착한 사람을 만들 수 있다면 화룡을 알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아무하고나 혼교(混交)를 해도 말인가?”

“그게 우리 기준이라니까요. 우리는 내 부인, 네 부인 가르지만 그런 게 없는 집단도 있을 수 있지 않나요?”

절죽원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냐. 무언가 크게 잘못 된 거야. 일단을 보여줄 생각이네. 알고야 이런 일을 하겠나. 말이 좋아 화룡과 수룡이 얽히는 거지 막말로 하면 제 여자를 이놈 저놈이 마구 품어도 괜찮다는 것 아닌가. 자기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네. 신의 세계가 이렇다면 차라리 인간 세계가 좋지 않나 싶네. 지킬 것은 지켜야 인간이지.”

“교리를 다 푸셨군요.”

류취취가 걸어오며 말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게 분명했다.

“다 푸셨으면 보여주세요. 얼른 보고 싶어요.”

“그게……”

“왜요?”

절죽원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는 듯 책자를 꺼냈다.

“이걸 루검비에게 줄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었지.”

“안 좋은 내용이 있나 보죠?”

“읽어보고…… 읽어보고 판단하시오. 휴우!”

절죽원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류취취는 밤을 꼬박 밝히며 경전을 읽었다.

처음에는 시간 날 때마다 읽어볼 생각이었는데, 첫 장을 읽자마자 푹 파묻히고 말았다.

자신이 경험했던 부분이 나올 때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처음 보는 부분이 나오면 정신을 집중해서 깊이 파고들었다.

경전은 환희밀공의 해설서나 다름없었다.

환희교의 교리라는 말도 틀리지 않다.

경전 중 절반은 성신이 완전히 성숙하기 위해 거쳐가는 단계를 설명했고, 나머지 절반은 환희교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도리와 의무를 기재해놓았다.

‘이게 환희밀공……’

그녀는 책자를 덮으며 가슴 뿌듯한 희열을 맛봤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토록 심오하고, 위대하며, 힘든 길을 루검비라는 사내와 함께 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찬 감동이 치밀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너무 무거워 철판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환희교도…… 그들은 모두 한 가족이다.

다접, 혼교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이런 식이라면 부모와 자식 간의 구분도 없어진다.

말세(末世).

인간은 이런 지경을 말세라고 칭한다.

환희밀공의 최고 경지가 말세다.

본인들의 의식이 아무리 숭고하고 좋을 지라도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 인간의 윤리가 산산조각난다. 인간의 잣대로 신의 영역을 재기 때문일까? 신의 세계에는 윤리가 없는가?

‘뭔가 잘못됐어.’

그녀는 숨이 막혔다.

“봐.”

“……?”

“청음산 쌍괴목에 있던 교리야. 내가 산을 내려올 때 가져왔는데, 범어로 적혀 있더라. 다행이 우리에겐 천하의 석학이 있잖아. 번역을 부탁했어. 이게 그거야.”

루검비는 머리를 내저었다.

“교리는 나중에……”

“지금. 지금 꼭 봐야 돼. 화룡전이를 할 거잖아. 그렇지? 그걸 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봐. 이걸 보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무조건 믿고 따라갈게.”

류취취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루검비는 교리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절죽원주의 번역본이 루검비의 손에서 한 줌 재가 되었다.

번역이 잘못되었다. 환희밀공이 이럴 리 없다. 기껏 선(善)을 쌓았더니 말세가 된단 말인가.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가 지난 이틀 동안 번뇌한 것 중에 하나가 불가의 사음(邪淫)이다. 사음이란 무엇인가. 배우자가 있는 남의 남편이나 아내를 범하는 것이다.

사음을 말한 사람은 부처다.

환희밀공과 같은 종류의 공부를 한 사람이 사음을 말했다면 환희밀공도 같은 말이 나왔어야 한다.

적어도 경전에는 그와 비슷한 말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가 지금까지 경전을 찾지 않은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다음(多淫), 혼음(混淫), 사음(邪淫)……

경전에는 이를 경계하고 제어하는 말이 들어있어야 한다. 하지만 없다면…… 아무 말도 없다면 어찌 하는가. 화룡이 시키는 대로, 수룡이 일어나는 대로 마구 뒤엉키면 되는 것인가.

모든 일에는 절제가 요구된다.

루검비는 자신이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을 먼저 찾을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에 교리를 읽어서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나오면 그를 따르고, 언급이 전혀 없으면 자신의 방식대로 이끌어나갈 계획이었다.

단, 그 방법이란 것이 머리로 생각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환희밀공이 이끌고, 화룡이 절제할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한다. 이성적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손이 남의 아내를 더듬는 식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직 아무 것도 증명된 것이 없는데……

뻐억! 퍽!

무공도 모르는 사람들을 제압하는 건 주먹 두 대면 충분하다.

칠절신군은 절죽원주의 품을 뒤져 비급으로 보이는 서적 한 권을 찾아냈다.

‘범어?’

시서화기에 능통한 그는 범어를 단번에 알아봤다.

심상치 않다. 허기는 루검비와 주고받는 물건이라면 굉장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그는 재빨리 비급을 품속에 갈무리하면서 주위를 돌아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그는 흑화녀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류취취가 간단하게 혈우광도를 제압하는 모습을 본 순간, 흑화녀의 함정에 말려들었다는 걸 새삼 절감했다.

자신과 혈우광도가 합공을 해도 류취취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녀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면도까지 힘을 합쳐도 된다는 보장이 없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이 뒈지든 말든 자신들은 루검비만 제거하고 도주하겠다는 심산이다.

‘나쁜 것……’

그는 루검비가 가르쳐주는 환희밀공보다 비급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게 더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고, 무엇보다도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자신이 알고 있는 비기를 전부 전수해 주겠는가. 딱 써먹기 좋을 만큼만 가르쳐 줄 게다.

그런 건 백 번 배워봤자 종노릇밖에 못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비급을 가지고 도주하는 게 낫다. 비급이 있는지 몰랐다면 어쩔 수 없이 배우겠지만, 이렇게 비급이 존재한다면 기다리는 놈이 미친놈이다.

‘좌우지간 고것……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단 말이야.’

처음에는 흑화녀의 계획을 듣고 긴가민가했는데, 막상 부딪쳐보니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다.

한 눈에 루검비의 성격을 환히 읽어버렸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계획을 짰다.

혈우광도가 괜히 부하들을 이끌고 온 게 아니다. 그놈 여자인 줄 알면서도 계속 찝쩍거린 것 또한 계획에 있었다. 물론 쥐어터지는 것만 말고.

그놈은 처음에는 갈등을 느끼겠지만 ‘사랑’을 교리로 삼는 환희교 특성상, 그리고 여리디 여린 놈의 성격상 사악함에 찌든 영혼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환희밀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헌데 와서 보니 계획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었다.

놈은 환희밀공을 가르쳐주지 못해서 안달 난 것 같다. 아무 계획 없이 그냥 나타났어도 전수해줄 놈이다. 정말 미친놈이거나 알지 못하는 암수(暗手)가 숨어 있다.

놈이 가르쳐주는 환희밀공은 배우는 것도 찝찝하다.

‘역시 이게 낫지.’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본 후, 슬그머니 몸을 빼냈다.

삼사 리쯤 벗어나 한 숨 돌려도 되겠다 싶자 칠절신군은 신법을 멈추고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놈들이 뒈진 건 내일 아침에나 알게 될 테니, 그 전까지 최대한 달아나야겠군.”

당분간 심산유곡에 은거하여 비급을 연구한다. 그 후, 사오 년 정도 수련하고 무림에 나서면 그의 발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여인들이 없을 게다.

“후후후!”

그가 옅은 웃음을 터트릴 때,

“죄우지간 머리 좋은 놈들은 꼭 신경 쓰게 한다니까. 어이, 칠절. 그 비급, 우리도 좀 보자!”

음침한 음성과 함께 면도와 흑화녀가 나타났다.

“흐흐흐! 칠절, 네 놈이 쥐새끼라는 건 진작 알았는데……”

혈우광도 역시 수하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길도 없는 곳을 무작정 뛰어왔는데, 어떻게 앞 길을 막을 수 있을까.

“허허! 웬래 강호 인심이란게 다 그런 거잖소. 이제 들켰으니 다 함께 나눠 봅시다. 허허허!”

“누가 나눠 보겠데?”

쒜에에엑!

혈우광도가 묵직한 도를 휘두르며 돌진해왔다.

“와! 죽여!”

그의 수하들도 개미떼처럼 달려들었다.

“이걸로 화근 하나는 덜어냈어요.”

“그런 것 같군. 하지만 이게 최선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역시 루검비에게 물어봤어야 했을 것 같아.”

“물어보면 말렸을 겁니다.”

“허어!”

절죽원주와 호리수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지켜보았다.

류취취가 경전을 읽을 때, 루검비에게 건네졌을 때 저들은 탐욕스런 눈초리로 경전을 노려봤다.

호리수는 그 탐욕을 이용하여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다.

루검비와 류취취가 없는 곳에서 두 사람이 산책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미끼가 되었다.

경전을 빼앗기는 것은 정해진 것이었고…… 문제는 이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리수는 오 리 밖에다 등불을 밝혔다.

야밤에 밤길을 걷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불빛을 찾아가게 된다는 심리 요인을 이용했다. 면도와 혈우광도를 움직이는 건 더 간단했다. 뒷머리를 잡고 뒤척이는 행동만으로도 그들은 움직여주었다.

어느 쪽으로 갔소? 저쪽으로. 그리고 그곳에 불빛이 있었다.

칠절신군은 혈우광도의 수하를 여섯 명이나 베었으니 결국 등이 쩍 벌이지는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비틀거리는 그를 혈우광도가 단칼에 베었다.

그가 목이 떨어진 시신에서 비급을 주웠다. 그런데…… 그가 비틀거린다. 칠절신군은 죽어서 움직이지 못하는데, 꼭 반격을 당한 사람처럼 휘청거린다.

“저놈들을 죽엿!”

그의 음성이 밤하늘을 울렸다.

아비규환, 인간지옥이 연출되었다.

흑화녀가 꼬꾸라졌다. 면도 역시 날랜 신법을 자랑했지만 혈우광도의 무지막지한 도법 아래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