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신의 영역에 가까이 간 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자네는 이제 첫발을 내딛었군.”
순간, 루검비의 뒷머리를 강하게 두들기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물었다.
“환희교를 왜 버리셨습니까?”
“한 여인을 죽였기 때문이지.”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다. 그는 실종되었다던 전대 수문장이다.
“교주입니까?”
“그렇네. 자네도 그런 것으로 아네만.”
루검비는 할 말을 잃었다.
여기 자신보다 한 평생을 먼저 산 사람이 있다. 자신이 지닌 것을 지녔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먼저 가졌던 사람이다.
“환희밀공, 끝은 보셨습니까?”
“허허허허!”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끝나지 않았어.’
짐작이다. 이것 역시 육감이 물어다준 소식이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정확하다고는 할 수 있다.
“자네, 나와 싸워보겠나?”
“……!”
“날 이길 자신이 있나?”
“그래야 합니까?”
“내가 모초권을 키웠네. 기녀들에게 환희밀공을 펼치라고 종용했네. 허허허!”
루검비는 잠시 생각했다.
이유 있는 행동…… 이유…… 어떤 이유……
루검비는 기녀들의 특이한 죽음에 주목했다.
모초권은 그녀들의 진기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목 매달 것을 종용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죽지 않는 기녀들은 자신이 직접 목매달아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닷새후, 그녀들은 목내이가 되었다.
모초권은 환희밀공의 묘용이라고 했다.
어림없는 소리, 환희밀공도 그런 요술을 부리지 못한다. 무엇인가가 그녀의 체내에 남아 끊임없이 수분을 빼앗아 간 것이다.
“화룡……”
루검비는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허허허! 짐작할 줄 알았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노인은 모초권의 몸에 화룡을 심었다. 날카로운 금침을 목함에 넣어 보관하듯이 살아 움직이는 화룡을 투명막에 가둔 후, 모초권의 몸에 밀어 넣었다.
모초권은 자신의 몸에 화룡이 숨어든 줄도 모르고 기녀들을 건드렸다. 그리고 노인의 명에 따라 그녀들을 죽였다. 죽음을 유도했다로 말을 바꿀까?
노인의 화룡은 그녀들이 죽은 후에야 깨어났다. 투명막을 찢고 밖으로 나와 수분을 갈취했다.
양과 음의 결합이다.
헌데 음은 죽은 음이다. 사기(死氣)가 건넨 음이다.
사람으로 치면 독을 마신 것과 진배없다.
그렇데 노인은 자신의 화룡을 끊임없이 버려왔다.
그토록 버리고 싶으면 그냥 허공에 버리면 안 되나? 꼭 사람을 죽여 가면서까지 몸속에 버려야 하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이다.
보통 사람은 생명이 끊어지면 성신도 사라지지만, 오랜 시간 성신을 보아온 사람은 사후(死後)에도 얼마동안은 성신이 살아 숨 쉰다.
사체 속에서 꿈틀거린다면 아무 상관없다.
문제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육신을 떠나 허공에 부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인연이 닿은 사람에게 앉아 영향을 끼친다.
그 영향이 두려운 게다.
자기 자신이 온전한 삶, 깨끗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못된 영향을 끼칠까봐 그게 두려웠던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그치면 차라리 그쪽을 택하고 만다.
화룡은 그 범주를 넘어선다.
영향을 끼친 사람에게 절대적인 힘을 준다. 정상적인 뇌로는 감당하지 못할 거력이 스며든다. 그러니 결국은 미칠 수밖에 없다.
미친 인간이 엄청난 힘을 소유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런 일이 한두 명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화룡이 몇 조각으로 찢어지느냐에 따라서 영향을 끼치는 사람 수가 결정된다.
노인의 몸에서 화룡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다 소진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든 겁니까? 화룡을 보면서 산다는 것이?”
“아니지. 즐거웠네. 환희교 아닌가. 환희가 없으면 환희교가 아니지. 참 즐거운 삶이었네. 하지만 이젠 쉴 때가 되지 않았나. 오래 산다는 것도 지치는 구먼. 잊지 말게. 환희밀공은 끝없는 탐구를 요구한다네. 이 나이가 되도록 반에 반도 알지 못했다면…… 허허허!”
“기녀들을 죽이고도 마음 편하셨습니까?”
“편할 리 있겠나. 그래서 보지 않았네.”
“안 보면 괜찮은 겁니까?”
“두 가지만 말해주겠네. 첫째! 경전에서 논한 사음(邪淫). 일어나네. 일종의 유혹이지. 아주 강렬한 유혹일세. 난 그 유혹에 졌네. 내가 화룡을 다 버린 이유는 그때 일 때문이지. 그동안 정화시킨다고 시켜왔네만 아직 절반도 씻지 못했네.”
“유혹을 넘기면 어떻게 됩니까?”
“세상이 보이네.”
“독룡에게 화룡을 줘야 합니까?”
루검비는 침착하게 묻고 싶은 것들을 물었다.
그는 분명히 선배다. 환희밀공을 먼저 알았고, 그 길을 평생 걸어왔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심득을 얻었다.
그가 기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화룡을 버린 것도 시행착오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이런 사람이 나타나주어 정말 다행이다.
노인이 루검비의 물음에 답했다.
“주지 말게. 그들도 언젠가는 사음의 유혹을 받게 될 터. 일단 독룡에 찌들었던 사람은 결코 그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네.”
“보통은 사음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할 텐데요?”
“그러니 교도를 선별해서 받아야 하네. 두 번, 세 번 관찰하고 완벽하게 확신이 선 후에야 받게.”
“지금까지 몇 명이나 받았습니까?”
“없네.”
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류취취는 무천 담장을 넘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루검비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기운도 느낄 수 없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화룡은 강렬한 기운을 발산했기에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전각이란 전각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뒤졌다.
없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잡혀갔나?
그래서 자신이 갇혀있던 쇄심옥을 뒤졌다.
쇄심옥주는 그때 그 사람이다. 자신을 괴롭혔던 옥졸들도 봤다. 그 중 한 명은 거의 밤마다 찾아와서 욕을 보이고 가곤 했다.
그들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오직 루검비만 찾았다.
‘없어! 어디 있는 거야!’
그녀는 다시 밖으로 나와 전각들을 뒤져나갔다.
정문부터 가사까지 앞에서부터 훑어나가고, 뒤에서부터 훑어오고…… 그래도 없다.
그녀는 무천에서 가장 높은 사층 전각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가…… 그가 어디에 있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수룡들은 읽혔다.
유화가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있다. 복수를 위해 떠났던 소월신투도 가까이에 있다.
그녀들이 어떻게 이곳에 있을까?
류취취는 생각을 그녀들에게서 돌려 루검비를 쫓았다.
왜 그는 보이지 않는 걸까? 옆에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루검비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내 옆에 있게 해달라고 빌었어.”
“미안.”
루검비가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볼 일은?”
“다 끝났어.”
“그럼 환희교를 일으켜야겠네?”
“아니. 환희교는…… 환희밀공은 우리만 알자.”
“죽은 교주님이 차기 교주를 찾으랬다며?”
“찾았어.”
“피이! 그러느라고 늦었구나? 누군데?”
루검비는 피식 웃기만 했다.
그의 머릿속에 좌화(坐化)한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 여자로 환희교주를 삼는 이유는 수문장을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네. 자네도 지금은 알겠지만 환희밀공이란 것이 꼭 삼법을 거쳐야 되는 건 아니네. 내가 있었다면 자네는 삼법을 거치지 않고도 화룡을 알았을 걸세. 여자가 교주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자네나 나 같은 수문장이 사라졌을 때를 대비해서지.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다네. 그런 생존력이 오늘까지 환희교를 끌어온 게지. 창기 노릇을 하면서까지 말일세. 남자라면 그렇게 하겠나?
전대 수문장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갔다.
그는 영예로운 삶을 영위했다.
무천 천주라는 신분으로 반평생 동안 무림을 호령하며 살았다.
헌데 그는 그런 과거가 부끄럽단다. 환희교 수문장이라는 직책이 더 자랑스럽단다.
갈 때는 그마저도 버렸다.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는 무명노인이 되어 가고 싶은 곳으로 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루검비를 불러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렇다. 루검비가 무천에 미련을 가지고 악착같이 온 것은 지법 석화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을 이유 삼아 무천으로 달려오게끔 노인이 화룡에게 빌었던 게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잠깐의 만남도 누군가 소원하기에 생긴다.
“가지. 오늘은 술 한 잔 마시게. 술 좀 가르쳐줘.”
“정말?”
류취취가 펄쩍 뛰며 좋아했다.
3
섬서성(陝西省)에는 험산(險山)이 많다.
무산(武山) 밑에 백애산(白崖山)도 험하다. 험할 뿐만 아니라 계류비폭(溪流飛瀑)이란 말에 걸맞게 물과 폭포가 이뤄내는 경치는 가히 일품이다.
세 사람은 백애산을 바라보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어휴! 저걸 언제 올라가.”
“쉬엄쉬엄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 있지 않던가. 괜히 엄살 부리지 말어.”
“허허허! 그만들 싸우고 올라갑시다. 이러다 해지겠소. 천리 길도 왔는데 저길 못 올라가겠소.”
무류 왕신파가 뚱뚱한 몸을 이끌고 먼저 발을 내딛었다.
“어찌 여기는 길도 안 나. 그만큼 다녔으면 길이 생길 법도 한데.”
“고작 일 년에 한 번 오는 걸로 길이 생기길 바래?”
“거기서 여기가 어디라고 고작이오? 장장 천 리요, 천 리.”
“허허허! 그 사람 참.”
절죽원주와 호리수는 늘 아옹다옹이라서 싸우건 말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다.
“이번에 올라가면 경신술이라도 배워볼까봐.”
“왜? 이번에는 화룡 본다는 소리가 빠졌네?”
“그걸 가르쳐줘야 말이지. 언제는 가르쳐 주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이제는 사정사정해도 안 보여주네.”
“왜? 밉보였나? 그러게 잘 보이지 그랬어?‘
“내 딴에는 잘 보인다고 보였소만…… 이구!”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농을 건네며 산을 더듬어 올랐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이고, 평생을 의술과 학문에만 전념해온 사람들이라 산을 타는 게 용이치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은 머리에 하얀 서리가 않은 노구(老軀)였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세 사람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인 줄 모르나?”
“알 텐데…… 한 번도 거르지 않았잖아?”
“그런데 왜 안 나왔지?‘
그때다!
“어흥!”
길 옆 풀숲에서 큼지막한 호랑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헉! 이, 이……!”
세 사람은 당황해서 손발을 허우적거렸다.
그러자 호랑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위에서부터 스스로 껍질을 벗어 내렸다.
“호호호! 깜짝 놀랐죠?”
호랑이 가죽을 벗고 나온 건 앙증맞은 소녀였다.
“에구! 야 이놈아! 깜짝 놀라 심장 떨어질 뻔 했다!”
“피이! 맨날 그 소리야.”
“피이는! 이 꼬마 녀석이! 이리오너라. 어디 얼마나 컸나 안아보자!”
왕신파가 꼬마 소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모두들 안녕하시냐?‘
“참! 나 동생 생겼어.”
“그래? 좋겠네? 어느 엄마?”
“찬바람 엄마.”
“찬바람 엄마가 뭐야, 이 녀석아!”
그렇게 험한 산길을 더듬어가길 얼마간, 깊디깊은 산골에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오두막 같이 생긴 집들이 서너 채 나타났다.
“돈도 많으면서 인색하긴. 집이나 짓고 살지.”
호리수가 못 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그곳에서 한 명, 두 명 사람들이 나타났다.
“어서 와요.”
“호호호! 할아버지 왔어!”
“내 선물은?”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고 아낙들은 뒤에서 곱게 웃으며 마중 나왔다.
익숙한 얼굴들이 거기 있었다.
“여기 있네. 완성본이네.”
절죽원주가 보자기에 곱게 싸온 책자를 내밀었다.
“자네 말을 참고로 하니까 내용이 확 달라지더군. 허허허! 내 범어 실력이 형편없는 줄 이번에 알았네.”
“수고하셨습니다.”
서른을 넘긴 루검비는 굳센 장한으로 변모해 있었다.
“십 년도 더 걸린 대 공사였는데, 술 한 잔 안 줘?”
호리수가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대신 화룡을 보게 해드릴까요?”
“그럴래?”
호리수가 확 다가와 앉았다.
“해본 소립니다. 이걸 번역하셨으면서 아직도 화룡을 모르십니까. 하하하!”
“놀리기는. 난 정말 보여주는 줄 알았잖아!”
호리수가 짐짓 신경질을 부렸다.
세 분은 나이 탓인지 저녁에 마신 반주 탓인지 자리에 눕자 마자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루검비는 절죽원주가 번역해 온 경전을 펼쳤다.
- 아작세간(我作世間).
제일 첫 번째 장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세상을 만든다.”
루검비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5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