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괴롭히던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말려 죽일 듯 내리쬐던 열기도 차츰 사그라지고, 남은 것은 한기를 머금은 바람줄기였다. 유난히 힘들었던 여름이 지나가고, 어느새 가을이 다가왔다.
수확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제화국 사람들의 손도 바빠졌다.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수확 전 치러지는 성대한 축제에 있었다. 아무리 삶이 퍽퍽하고 살기 힘들더라도 그날만은 모든 근심을 잊고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날.
나라에서 총괄하며 같은 날 전국에서 열리는 화랑제는 제화국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기다리는 축제였다.
물론 그것은 백경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늘 밤, 함께 구경 가지 않으시렵니까?”
“…….”
조금은 쑥스럽게 건네진 백경화의 청에 그가 내밀고 있던 빙수를 받아먹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던 이연의 행동이 멈췄다. 그답지 않게 시선까지 못 마주치고 있는 모습이 의아하여 고개를 기울인 이연은, 그 순간 톡톡 제 입가를 두드리는 것에 잊고 있던 것을 먼저 받아먹었다.
사르르, 입과 배 속에 퍼지는 찬기에 어깨를 움츠리는 이연을 바라보며 낮은 웃음을 흘린 백경화는 얼른 그 입술에 입 맞췄다.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써늘한 감각을 되새기듯 몇 번 핥고 떨어져 나간 백경화가 이연의 물음이 있기 전에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다.
“화랑제, 구경 말이냐?”
“예, 전하.”
이연의 물음에 곱게 답하면서도, 백경화는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저 하릴없이 사각사각, 빙수를 섞던 백경화의 고개가 들린 것은 그 손 위로 겹쳐지는 작은 손이 있고서였다.
“가고 싶으면 날 보고 청해야지 어이하여 엉뚱한 곳만 보느냐.”
“…같이 가 주시렵니까?”
이상하구나, 어이하여 이리 부끄러워할꼬.
의뭉스럽기 짝이 없는 백경화의 태도에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인 이연이 어느새 제 손을 잡고 있는 큰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사내답기 그지없는 손이다. 얼굴과 달리 다소 투박하게까지 느껴지는 손을 내려다보던 이연이 백경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 꼭 가고 싶은 게야?”
“…그렇지는 않사온데, 전하께서 괜찮으시면 함께 구경 가고 싶나이다.”
흘깃, 이연의 눈치를 보다 얼른 덧붙인 백경화가 이연의 곁에 붙어 앉으며 관자놀이에 입술을 묻었다. 마치 허락해 줄 때까지 이럴 것이라는 듯 애교를 피우는 그의 모습에 눈을 빼앗긴 이연은 제 허리를 감아 오는 무엄한 손을 방치한 채 웃음을 흘렸다.
“그대 하는 것 봐서 정할까?”
“전하, 빙수 더 갈아 오라 하리까? 아니면 다른 드시고픈 것 있으면 얼른 소첩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당장 구해 오겠나이다.”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것 할까 저것 할까 말씀만 하시라며 잔뜩 기합이 들어간 백경화의 모습에 이연은 어렵지 않게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정말 가고 싶은가 보다.
이렇게까지 청하는 것을 거절할 이유도, 거절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 이연은 제 한마디만 있으면 당장 뛰쳐나갈 것 같은 기세의 백경화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장난은 이쯤 해야겠다.
“그리 가고프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러면 내 어디고 따라가 줄 터인데.”
저를 위해 이곳에 뛰어들어 준 이를 위해 그가 못 해 줄 것이 무엇 있단 말인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궁 밖을 나서는 것에 수많은 고민이 따랐을 이연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하고픈 것에 머뭇거리지 않았다. 여전히 제 앞에 늘어져 있는 것이 두렵고 무섭지만, 그보다 손잡고 있는 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고픈 바람이 더 크게 자라난 탓이다. 그리고 이연은 그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전하.”
이연의 말에 참지 못한 백경화가 이연의 말랑한 볼을 살짝 깨물었다가 쪽쪽 빨았다. 나날이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에 터질 듯 가슴이 부풀었다.
“오늘 밤에 야시장이 서면 이국에서 온 신기한 것, 재미난 것이 아주 많을 것이옵니다. 소원 풍등도 띄울 것이고 불꽃도 성대하게 터트린다 하니 소첩 사뭇 기대되옵니다.”
“나도 실제로 볼 생각 하니 기대된다.”
“…….”
백경화는 제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이연의 볼을 내려다보며 짐승이 애정을 표하듯 얼굴을 비볐다. 저야 항상 전장에 나가 있어 매번 보지 못했다 하나, 축제가 가장 성대하게 치러지는 도성 내에서 제대로 구경 한번 못 해 본 것 같은 이연의 모습에 속이 쓰렸다. 왕족이라면 모두 완벽하게 준비된 상석에 앉아 축제를 즐김이 당연한 것을. 그러나 백경화는 그것을 표하기보다는 작은 몸을 얼싸안고 오늘 밤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전하, 금일 제가 지어 드린 도포 입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그대가 지어 준?”
“……소첩이 침방나인과 합작한 것 말이옵니다.”
“…….”
아직도 그리 우길 셈인가. 어이가 없었지만 이연은 제 볼을 비비는 것이 간지러워 웃음만 흘렸다. 그까짓 거 못 해 줄 것 없어 이연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또 무엇을 해 줄까?”
“…축제 길 거니는 내내 소첩 손잡아 주시옵고, 풍등 띄울 땐 같이 소원 빌어 주시고, 밤하늘에 불꽃이 수놓일 땐 제 입술에 입 맞춰 주십시오. 그리고 자정이 되면 소첩에게…… 저에게 화랑꽃을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바라는 것도 많다.”
통박을 주면서도 백경화가 말한 것을 되새기듯 이연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먹어 달라 오물거리는 입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백경화가 날름, 한 번에 그것을 삼켰다. 한참 물고 빨아 대던 백경화의 입술이 겨우 떨어지자 참고 있던 숨을 터트린 이연이 타액으로 반들거리는 입술로 속삭였다.
“그럼 그대도 그것 입어.”
“무엇 말씀입니까?”
“…내 옷 지을 때 같이 지었던… 한 쌍 말이네.”
이연의 말에 백경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듣더라도 유쾌하고 즐거운 웃음소리에, 궁 밖에서도 여장하란 말이 심했나 싶어 머리를 굴리고 있던 이연의 근심은 단번에 날아갔다.
어느새 마주 보고 앉아 서로 애정을 나누고 있던 상태에서 백경화의 표정은 이연에게 너무나 잘 보였다.
마치 별을 뿌린 듯, 반짝이는 백경화의 두 눈에 서린 즐거움이 뚜렷하게…….
그 순간 이연의 귓가로 부드러운 입술과 가슴을 두드리는 백경화의 대답이 내려앉았다.
“전하 옆에 같은 빛깔의 옷 걸친 소첩이 벌써부터 보이는 듯하옵니다.”
* * *
“축제 구경이라니, 팔자도 좋다.”
“…….”
불쑥, 시비를 걸듯 건네진 무현의 말에도 불구하고 백경화는 짓고 있던 함박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것이 왠지 더 두렵게 와 닿은 무현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폐서인될 뻔한 주제에 낯짝도 좋군.”
“그때 구경만 하셔 놓고 말도 참 잘하십니다.”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무현의 말에 반박한 백경화가 코웃음 쳤다.
지금도 이연의 곁에서 내쳐질 뻔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이연이 대비에게 대놓고 반박하여 저를 구해 냈다. 제가 떠나는 것이 그보다 더 두렵다며, 애처롭게 몸을 떠는 사랑스러운 몸짓으로.
그 탓에 바로 다음 날 열이 올라 백경화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지만 이연은 단숨에 그것을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도 한동안은 대비전에 귀를 기울였으나 그가 걱정하는 바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이 폭풍 전야란 것을 어찌 모를까. 그러나 이연은 그것을 더 신경 쓰기도 전, 갑작스레 몰아닥친 무더위에 늘어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대비전에서 귀를 떼지 않은 채, 백경화는 더위를 먹은 이연을 극진히 대했다. 냉수마찰은 물론이고, 욕탕에 찬물을 채워 둘이서 한참 노닐기도 하며, 시시때때로 차게 얼린 과일이며 빙수를 내놓았고, 밤에는 모기장 친 창을 활짝 열어 놓고 무릎 베어 손수 부채질하며 재웠다. 그러다 너무 찬 것만 먹이면 탈 날까 싶어 보양식을 먹이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푹 삶은 백숙을 먹일 때는 여선의 표정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담고 있어 이번 일이 끝나면 휴가를 내어 줄까 심도 깊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얼음 위를 걷는 행복이었다. 언제 깨질지 모를…….
잠시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고 있던 백경화의 귀에 무현의 투덜거림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아무리 성황제국이라도 타국의 궁내의 일─ 그것도 내명부의 일에 간섭하는 게 쉬운 줄 아느냐?”
저라고 구경만 하고 싶어서 그런 줄 아느냐, 반박하는 무현의 말에 백경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곱게 차려입은 새 외출복에 묻은 먼지만 무심하게 털어 낼 뿐. 그 모습이 아니꼽고 울화가 치밀었지만 무현은 곁에 선 도화를 흘깃 곁눈질한 뒤 한숨만 내쉬었다. 꼴은 또 저게 뭐람.
그 순간 백경화를 향해 걱정스레 입을 연 것은 도화였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생각보다 훨씬 좋습니다.”
“부작용은…….”
도화의 물음에 백경화는 픽, 비웃음만 터트렸다. 그에 지켜보던 무현의 눈에 얼핏 살의가 서렸다 사라졌으나, 누구도 거기엔 신경 쓰지 않았다.
“앞으로, 어디 제 걱정 할 틈이 있겠습니까.”
“…….”
묘하게 심기를 자극하는 백경화의 말에 도화의 얼굴마저 설핏 굳었을 때, 굳게 닫혀 있던 내실의 문이 열리고 이연이 들어섰다. 연한 살굿빛의 도포를 걸친 모습이 아직은 앳된 얼굴과 무척이나 잘 어울려 백경화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역시 저 빛깔이 어울릴 줄 알았다.
백경화는 단숨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연의 곁으로 다가가 깃이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전하.”
“그대도.”
그대도 어여뻐. 이연은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백경화를 향해 웃으며 그리 답했다.
아주 꼴값을 고루고루 떠는구만.
무현은 황망하고 어이없는 마음으로 백경화와 이연을 지켜보다 곧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의 정체를 깨닫고는 낮게 욕을 짓씹었다. 도포와 치마가 같은 빛깔의 비단으로 지어진 것이란 것을 깨달은 무현의 표정은 말 그대로 썩어 갔다.
강력한 거부감에 뭔가가 피부 위를 기는 듯도 하여 한 차례 진저리 친 무현의 눈에 백경화의 손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이후에 일어날 일은 생각지 못하고, 무현은 무심코 비아냥거렸다.
대실수였다.
“그런 모습으로 지내다 보니 여심에라도 눈을 뜬 게야? 손에 끼고 있는 것은 또 뭔가.”
“……!”
“……!”
안 돼!!
무현은 그 순간 마주친 여선의 두 눈에 서린 절망을 똑똑히 보았다. 어찌 저런 눈으로 보는가. 그가 여선의 눈빛에 숨겨진 진심을 깨달은 것은 어느 순간 제 곁에 다가선 백경화의 존재를 눈치챈 뒤의 일이었다.
“무, 무어냐?”
순식간에 제게 다가선 모습에 기겁하며 그리 소리친 무현의 눈앞에서 백경화는 제 왼손을 들어 보였다.
“어여쁘지요?”
“뭐?”
“전하께오서 제게 주신 것입니다. 곱지 않습니까?”
“…뭐?”
“첫날밤에 전하께 정표로 받은 것이온데 제 보물이옵니다. 이리 보면 색이 달리 보이는데 참으로 곱지요?”
“……뭐라고?”
“이리 제 약지에 딱 맞춘 듯 자리 잡은 것이 저를 위해 준비된 듯하온데, 전하께서 가지고 있던 유품을 제게 주신 것입니다. 그 귀한 것을 제게 말입니다.”
“……. 뭐라는 거야?”
“정말이지 어찌 귀하지 않게 여기겠습니까.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 ……미쳤구나.”
얘 미쳤나 봐. 저와 마찬가지로 얼굴에 무수한 물음표를 띄운 도화와 방금 전보다 더욱 해쓱해진 낯의 여선을 돌아보며 무현이 결론 내렸다. 미쳤다 이놈. 반지를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것인지 그것을 내어 준 이연을 사랑스럽다 하는 것인지 이제 숫제 헷갈릴 지경이라 무현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화알짝- 웃는 얼굴로 무현 앞에서 손바닥을 앞뒤로 뒤집으며 옥가락지 자랑질 삼매경인 백경화를 끄집어낸 것은, 이연이었다.
“…경화야, 그만해.”
이연은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무현 앞에서 보잘것없는 것을 열심히 자랑해 대는 백경화를 말리며 얼굴을 붉혔다. 얼굴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귀한 것 다 보았을 이 앞에서 어찌 저런 것을 자랑할 수 있단 말인가.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자, 이연을 돌아본 백경화가 미소 지으며 정수리에 깊게 입 맞추었다.
“정인께 받은 다시없을 증표인데 어찌 귀하지 않겠나이까. 세상에 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 없으시지요?
한 손으론 이연의 얼굴을 감싼 채 그 위에 제 얼굴을 기댄 백경화가 무현의 앞에 옥가락지 끼워진 제 손을 팔랑였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무현은 자랑질 할 게 그리 없더냐, 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으며 헛웃음만 연방 터트렸다. 그러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연이 백경화를 잡아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만 가자. 이러다 오늘 밤 다 새겠구나.”
“예, 전하. 걱정 마소서. 소첩이 안고 월담하오면 금방이오니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네 맘대로 해라.”
반지 자랑질로 성황제국의 황태자와 그 호위 무사 앞에서 보인 추태는 이미 도를 넘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이연은 궁담을 넘겠다는 말에도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백경화의 손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몇 걸음 가지 않아 픽픽,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솔직히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성황제국 황태자 앞에서 손바닥 뒤집어 가며 자랑질인가.
“어이하여 웃으십니까?”
“그대가 귀여워서.”
“…….”
귀엽다고? 내가?
순간 이연이 무얼 잘못 먹었나 아연실색할 뻔한 백경화는 그 순간 마주친 시선에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이연의 눈에 서린 즐거움이 절로 그리하게 만들었다.
그는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이연의 앞에 무릎을 접어 앉은 후 제 입술을 가리키며 두 눈을 감았다.
“그리하시오면 말씀만 하시지 마시고, 여기 입 맞춰….”
춥! 말 끝나기도 전에 제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는 보드라운 것에 잠시 굳었던 백경화가 정신을 차리고 재차 청했다.
“한 번 더….”
춥춥춥! 쪼옥!
“…….”
“더 해 주랴?”
“…다섯 번만 더.”
“오냐오냐. 해 뜨기 전에 가기만 하자꾸나.”
청대로 제 앞에 앉아 있는 백경화의 목에 손을 감고 한 번, 두 번 입술을 쪼아 대던 이연은 그 순간 훌쩍 들리는 제 몸에 낮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저를 단단히 받쳐 오는 손길에 목 안으로 웃으며 백경화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들이 떠나고 남은 후궁전 내실 안, 오소소 오른 소름을 문지르는 3명의 남자만이 초라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왜 저런다더냐?”
“…그 이유를 알면, 제가 이 꼴로 이러고 있겠습니까.”
“…….”
어쩐지 지난번 지내 보면 안다는 여선의 말이 되새겨지는 듯도 하여 무현은 머쓱하게 헛기침을 터트렸다. 쯧쯧, 네가 고생이 많다. 밥은 먹고 다니냐?
“그래, 어린 왕께는 ‘금일’이 무슨 날인지 잘 전해 드렸느냐?”
“예. 고맙다 하셨습니다.”
무현의 물음에 여선은 해쓱한 낯으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복수를 꿈꾸며 전장만 나돌던 때의 백경화를 떠올려 보자면 지금의 모습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감각이 무뎌지고 정신 어딘가가 무너지던 때의 백경화를 돌이켜 보면 놀랍기까지 한 변화였다. 비록 염장질에 제 위는 망가지더라도 말이다.
주군의 행복과 제 비위를 맞바꾼 여선은 문득 한숨을 내쉬며 보료 위에 앉아 있는 무현을 돌아보았다. 떠나기 전 내려진 주군의 명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제 와서 뭘.”
여선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무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다. 이제 와서 뭘, 새삼. 그는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 도화를 향해 웃어 보인 뒤 부러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를 바라보는 도화의 얼굴에 짙게 배어난 자책과 근심을 아는 탓이다.
“그들이 부디 내 몫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야 할 텐데 말이다.”
“…….”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바라보던 무현이 잊고 있던 술상을 끌어당겼다. 그 모습을 도화와 여선이 지켜보다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 돌아오면 세상이 뒤집어질 터이니,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기는 것이 낫겠지.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축제의 전야제인 만큼, 거리엔 사람들이 넘쳐 났다. 그 거리를 손을 잡고 거닐면서 백경화와 이연은 맘껏 웃으며, 신기한 것이 있으면 걸음을 멈추고 느긋이 구경했다. 사람들은 저보다 큰 처의 손을 잡고 방긋방긋 웃는 이연과 쓰개치마를 뒤집어쓰고도 먼저 앞서 걸으며 길을 트는 백경화의 모습을 한 번씩 돌아보며 ‘참으로 기이한 부부가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그 기이한 부부가 자신들의 왕과 소문 무성한 공빈이란 사실을 꿈엔들 생각지 못하리라.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 한 번씩 받아 가며 처음 보는 먹거리는 모두 한 입씩 먹어 보고 신기한 물건이 있으면 들여다보고 구경하길 한참.
강가에 다다른 그들은 풍등을 하나 샀다. 세가들이 사는 고급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저 흔하디흔한 풍등이었으나 둘 모두 그런 것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강가에 떠다니며 불빛을 밝힌 풍등을 바라보다 한곳에 나란히 주저앉아 등을 조작하여 불을 피웠다. 순식간에 붉은빛을 피우는 풍등을 바라보던 이연이 백경화를 향해 물었다.
“소원은 다 빌었는가?”
“예. 다 비셨는지요?”
“응.”
가볍게 끄덕여지는 고갯짓이 또 귀여워, 고개를 기울여 그 눈가에 입 맞춘 백경화가 속삭였다. 제게만 말씀해 보소서. 풍신(風神)이 바빠 전하의 소원 못 전해 드리면 소첩이 이루어 드리겠나이다. 낮아진 목소리로 그리 속닥이자 가만히 어깨를 떨며 웃은 이연이 백경화에게 귀엣말로 답했다.
“내 소원은 그대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는 것이니, 그대의 바람이 곧 내 바람이다.”
“…….”
“그러니 내 소원은 그대가 들어줄 것 아니냐. 굳이 뉘인지 모를 이에게 빌 필요 없노라.”
꾹, 같이 풍등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백경화가 이연을 내려다보았다. 얼른 풍등 띄우고 나무 그늘 찾아 예쁜 말만 하는 저 입에 입 좀 맞추어야겠다. 그 생각에 백경화는 주저앉혔던 몸을 일으키며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잡고 있던 풍등을 이연과 동시에 놓았다. 쉽게 바람을 타고 밤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풍등을 잠시 바라보던 백경화가 곧 바닥에 쓸려 흙이 묻은 이연의 옷자락을 털어 준 뒤 미소 지었다.
“불꽃놀이 전에 화랑꽃을 사러 가시지 않으렵니까?”
“그리하자꾸나.”
제가 내미는 손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잡으며 환히 웃는 이연의 모습에 백경화는 잠시 고민했다. 역시 나무 그늘 먼저 찾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그의 고민은 제 손을 잡고 먼저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이연에 의해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
이연은 제 손에 들린 꽃 한 송이와 제 곁에 앉아 있는 백경화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심호흡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불꽃이 터질 것이다. 하늘에 수놓이는 화려한 꽃을 바라보며 옆에 있는 백경화가 바라던 대로 그에게 입 맞추어야지.
그리고… 그리고…….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은 이연은 긴장과 흥분으로 인하여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조곤조곤 달래며 백경화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긴 꼬리를 그리며 무언가가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펑! 소리와 함께 까만 밤하늘에 색색의 그림이 그려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우와, 사람들의 함성 소리를 들으며 이연과 백경화도 고개를 들고 그 광경을 두 눈에 담았다. 펑펑! 연달아 쏘아지는 불꽃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올해의 수확과 1년의 노고를 기리는 축제인 만큼 그 모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그러나 불꽃은 오래가지 않았다. 본래라면 한 식경을 갈 텐데……. 지난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시간에 사람들의 입에서 아쉬움의 탄성이 흘렀다. 그것이 어디에선가 일어난 횡령 탓이란 것을 모를 리 없는 이연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이연은 불꽃이 끝나는 순간 까맣게 불 꺼지는 거리에 얼른 백경화의 손을 잡아끈 뒤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툭! 닿은 곳은 엉뚱하게도 백경화의 눈 아래쪽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당연한 실수인데 조금 민망해진 이연이 이번엔 두 손으로 백경화의 얼굴을 잡고 재차 입술을 붙였다.
그 모든 것을 어두운 시야와 상관없이 선명하게 지켜보고 있던 백경화가 숨죽여 웃으며 얼른 제 입술을 맞춰 주었다. 쪽, 닿았다 떨어지려는 입술을 혀를 내밀어 핥고, 벌어진 입술 틈으로 밀고 들어가 입 안 깊숙이 넣었다 뺀 뒤 진득하게 입천장까지 핥았다. 하으… 숨죽인 신음이 귓가를 파고들자 이연의 허리를 잡아 제게 바짝 붙인 뒤 백경화가 작은 혀를 휘어 감았다.
그리 한참 뒤엉켜 놀던 혀를 빼내자 툭- 귓가에 무언가가 닿아 왔다. 보랏빛의 꽃이었다.
이연의 손에 들려 있던 화랑꽃이다.
“…….”
백경화는 말없이 한 손으로 제 귓가에 아슬아슬하게 꽂혀 있는 것을 제대로 꽂으며 이연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화랑제 전야제에 화랑꽃을 주며 고백하는 관습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얼마 전이었다. 그러했기에 백경화는 꼭 오늘 이연에게 화랑꽃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백경화의 행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보아라, 경화야.”
저를 안고 있는 백경화의 손을 잡아끌어 제 가슴에 댄 이연이 느른한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내 가슴도 이리 뛴다.”
너처럼……. 본디 이리된 것은 오래전이지만 내 하지 못한 말이 있다지.
설마, 하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흔들리는 백경화의 두 눈을 바로 앞에서 마주 보며 이연이 고백했다.
“…연모해. 연모하고 있어… 깊이. 아주 깊이.”
너무 깊어서 빠져 죽을 것 같아…….
작게 덧붙여진 이연의 속삭임에, 백경화는 이곳이 어딘지 잊었다. 주륵- 그는 제 머리에서 쓰개치마가 흘러내리는 것도 아랑곳없이 이연의 작은 얼굴을 틀어잡고 숨 막힐 듯한 기세로 입술을 덮쳤다. 음탕하게 젖어 드는 혀끝과 함께 이연의 도포 자락으로 숨어드는 손을 겨우 잡아 누른 백경화의 숨결이 거칠었다. 이성이 사라지는 것이 빤히 보이는 백경화의 두 눈을 바라보며 이연이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듯 미친 듯 뛰는 단단한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마음대로 해도 좋아.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는 광장에서, 백경화와 이연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하읏……!”
“큿……!”
이연은 다급히 움직이는 백경화를 올려다보며 짙은 숨을 내쉬었다. 밑에 깔린 백경화의 쓰개치마가 풀잎 위를 스치는 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찼다지만 누가 볼지도 모를 밖에서의 방사가 당황스러운 한편, 이연은 그만큼 정신없이 달려드는 백경화의 모습에 기뻤다. 언제나 이연의 기색을 살피며, 항상 제 본능보다 이연을 챙기던 백경화였다. 그런 그가 이런 곳에서 이연을 갖지 못해 안달 내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야……. 처음 망설이는 듯 보이는 백경화를 향해 그리 속삭인 것도 이연 자신이었다.
제 한마디가 이 강한 사내를 안달케 만든다. 그것이 생경하면서도 짜릿하고 흥분되어 이연은 제 안을 치고 들어오는 것에 맘껏 신음했다.
그리 한참 성난 야수처럼 허리를 짓쳐 대던 백경화는 이연의 온 얼굴에 입술을 묻으며 신음했다. 짐승처럼 그릉거리며 제 양물에 달라붙는 내벽을 문질렀다. 공기 하나 안 통할 정도로 작은 몸을 부둥켜안은 채, 허리 짓만으로 이연이 가장 느끼는 곳을 찔러 대던 백경화의 입에서 연방 탁한 신음이 터졌다. 당장 이 작은 몸에 저를 묻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애가 바짝바짝 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으… 아… 아앗… 앗!”
옷조차 제대로 벗지 못한 채 힘겹게 백경화를 받아 주던 이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이 백경화의 정신을 더욱 아득하게 만들었다. 그는 거친 호흡을 흘리며 제 이성을 사로잡는 이연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질척하게 놀아나는 하반신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연의 작은 입 안도 농락했다. 뭉근한 혀를 잘근잘근 씹다 입 안 가득 차오르는 타액을 달게 빨아먹었다. 혓바닥을 비비고 허리를 쳐올리며 위아래를 동시에 농락하던 백경화는 순간 달아오른 시야에 이연의 안으로 더욱 저를 묻었다. 울컥! 그 안으로 뜨거운 씨물을 뱉어 내면서도, 백경화는 무엇도 멈추지 않았다. 남은 한 방울까지 모두 작은 엉덩이를 벌려 더욱 깊이 묻고 토정하던 백경화는 그 순간 들려온 이연의 중얼거림에 우뚝, 모든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잘못 들었나…….
그 순간, 다시 한번 이연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생일, 축하해…….”
“……!”
“진작 몰라서 미안해.”
어찌… 놀라고 당황하여 목소리 끝이 갈라지고 만 백경화가 얼른 목을 가다듬은 뒤 되물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여선이……. 미안해. 처의 생일도 모르는 못난 부군이야.”
“아니옵니다. 너무…….”
너무 좋은데…….
말을 잇지 못한 백경화는 떨리는 손으로 제 시선을 피하듯 두 눈을 내리깔고 있는 이연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어 고정했다. 작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식은땀을 훔쳐 주고, 옥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도 쓸어 넘겼다. 어찌해야 저의 이 떨리는 기쁨을 이 아이가 알아줄까…….
그동안 잊고 있던 제 생일을 스스로 챙기게 만든 존재였다. 무감하던 날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연과 함께 보낼 생각에 설레기까지 하였다. 그건 새로 태어나는 것과 맞먹는 기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거기서 더 주는 아이가 어여뻐서 백경화는 드러난 이마에 진득하게 입술을 묻었다.
“해서… 내가 준비한 것은 없는데, 내게 바라는 것이 있느냐?”
“……한 가지, 있다 하오면 들어주시렵니까?”
“물론이다!”
긍정적으로 돌아온 백경화의 대답에, 이연이 얼른 반색했다.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받아 놓고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제 욕심에 기가 찰 만도 하건만 얼른 말해 보라 눈으로 종용하는 사랑스러운 이를 눈과 가슴에 한가득 담은 백경화가 입을 열었다.
“소첩이… 제가 어떤 불경한 짓을 하더라도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그리하마.”
“…정말 불경한 짓이 될 것입니다.”
“괜찮대도 그런다. 내 어이해 줄까?”
“…….”
백경화는 어떤 것이든 괜찮다는 듯 기쁜 낯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이연을 내려다보며, 손끝으로 그의 볼을 쓰다듬다 조금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아주 잠시만 눈을 감고 있어 주십시오.
제 말이 끝나자마자 곱게 닫히는 눈꺼풀에 새삼 가슴이 떨려서 백경화는 제일 먼저 그 눈꺼풀 위에 싸락눈처럼 입술을 내렸다. 그는 간지러운지 조금 어깨를 움츠리는 이연을 바짝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것은 다시없을 불경이 될 터였다. 그렇지만, 숨기지 못할 제 부름이다.
“…연아.”
“……!”
저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백경화는 이연과 이마를 마주 댄 채 항상, 부르고팠던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연아… 내 사랑스러운 임아. 연아…… 연아…….”
“…….”
파르르, 감은 이연의 속눈썹이 경련하다 촉촉하게 젖었다. 그런 그를 눈치채지 못한 채 백경화는 연방 숨죽여 왔던 부름을 터트렸다. 내 작고 사랑스러운 연아… 내 작은 주인아… 내가 얼마나 이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지 모르겠지… 이 말을 몇 번이나 삼켜야 했는지 연이 너는 모른다. 내 부름에 대답하는 네 모습을 내가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는지… 연아. 내 작은 연아…….
누가 먼저 눈을 뜨고 서로를 보았는지는 몰랐다. 그저 울컥울컥 치미는 울음을 달래며 가볍게 입술을 비볐다. 그 사이로도 소리 없는 부름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연아… 그 안타까운 부름이, 이리저리 치이고 헤집어진 이연의 영혼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왔다.
“그대 생일인데… 나에게 선물을 주면 어찌해…….”
“…그리 느껴 주시면, 그것이 제게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옵니다.”
“……그럼, 더 불러 다오.”
이연의 말에 백경화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이연이 바라는 대로 그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연모하는 내 연이… 사모하는 내 님…….
까만 밤, 안타깝게 죽인 신음이 다시 바람결을 타고 흩어졌다.
“전하,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응.”
몇 번째 들려오는 백경화의 물음에 이연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답했다. 편하대도 그런다. 그는 낮게 타박하며 든든한 백경화의 등에 고개를 묻었다. 그에 가볍게 이연을 추슬러 업은 백경화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이미 축제 등불도 꺼져,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부러 어두운 길만 골라 걸으며 환궁하던 백경화는 낮은 숨소리를 들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전하… 주무시는지요?”
“으으응. 안 잔다.”
대답과 달리 목소리엔 졸음이 한가득이라 대답엔 신빙성이 없었다. 그것이 또 귀여워 속으로 웃은 백경화는 멀리 보이는 거대한 문에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소첩이 미리 사죄드리겠사오니, 너무 놀라지 마시옵소서.”
“무얼……?”
“큰일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마소서.”
“…응?”
꾸벅꾸벅, 들려오는 목소리가 제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 의심스러우나, 백경화는 굳이 이연을 깨우지 않았다. 어찌 됐든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나왔을 때처럼 높은 담을 월담하여 들어간 백경화는 사람 하나를 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흔들림도, 소리도 없이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무수한 창이 그를 겨누었다.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뜬 이연이 급히 숨을 삼키는 소리를 생생히 들으며, 백경화는 저를 향한 호통에도 불구하고 혹여 다칠세라 이연 먼저 바닥으로 내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저를 올려다보는 이연의 두 눈을 마주 보며 안심하시라 웃은 백경화는 그 순간 제 귀에 들려온 대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새파랗게 안광이 서린 대비의 두 눈이 백경화를 바라보며 웃는다.
제 승리를 자축하며.
“공빈 백경화를, 성황제국 황태자 독살 혐의로 포박하라!!”
예견되었던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성황제국 황태자의 암살 시도가 있었던 밤.
그 주범으로 제화국 공빈 백경화와 공모자로 의심되는 성황제국 황태자의 호위 무사가 함께 투옥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궁은 또 한 번 소리 없이 뒤집어졌다. 워낙 큰 사건이라 모두는 쉬쉬하며 입단속을 하였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 수습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 더불어 모두는 곧 궁 안에 불어 닥칠 피바람에 숨을 죽이고 몸을 사렸다. 일평생을 궁에서만 살아온 그들은 곧 닥칠 엄청난 일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누구보다 그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항상 죽음과 직면해 있던 이연, 바로 어린 왕이었다.
‘저는 그분이 무섭습니다.’
“…….”
그것은 누가 했던 말이었나.
이연은 가만히 두 눈을 감고 머릿속을 스친 말의 주인을 떠올려 보았다. 고민은 깊지 않았다. 연강(硏鋼)이었다. 순식간에 떠오른 그 존재가 그립고도 눈물겨워 이연은 가슴이 메었다.
그 아이는 저보다 두 살 어렸고, 현명하며 어진 이로 누가 보더라도 제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던 아이였다. 그리고 대비가 낳았던 유일한 적자로 왕위에 가장 가까웠던 세자였으며, 이연의 이복동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왕위를 이은 것은 이연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뺏었다 미워할 만도 하건만 연강은 대군이 되어 출궁한 뒤에도 가끔 이연을 찾아왔다.
그는 이연이 가진 유일한 말벗이었다. 정감 있게 대화하는 것도 아니었고, 침묵이 반인 시간이었지만 어색하지 않았던 그 시간.
그는 가끔 그리 말했다. 제 어미가 무섭다고. 그 말을 듣고 이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속으로 한없이 긍정하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저를 이 무형 감옥 같은 자리에 올린 것도, 응당 연강이 가져야 할 자리를 뺏은 것도 모두 그 대비였기에.
그러면 연강은 표정 없는 이연을 한참 동안 주시하다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는…….’
정해진 끝을 피할 수 없다─ 그리 뒷말을 삼키는 것을 알면서도, 이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공주와 옹주를 제외하고 살아남은 형제는 그와 연강이 유일했다. 어째서 대비가 제 아들이 아닌 저를 이 자리에 앉혔는지 그때의 이연은 깊이 생각지 않았다. 눈앞에서 사고사로, 암살로 수없이 죽어 나가는 이름뿐인 형제들을 보아 왔다. 그저…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이연에게 죄가 있다면… 단지 삶에 대한 욕심, 그 하나였다.
‘전하… 이대로는, 얼마 가지 못하실 겁니다. 대리청정을 거두시고 왕권을 강화하셔야 합니다.’
‘…….’
‘제가 도와드릴 것입니다. 진정한 왕이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