加外. 再會(재회)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불행의 연속 그 자체였다. 회생조차 불가능한,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란 바로 그의 삶을 일컬음이다. 누구도 그보다는 운수 사나울 수 없고, 비참하지 않을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로, 늘상 굶주리고 이유 모를 폭력에 시달려야만 했다.
겨우 지옥 같은 보육원을 벗어나 입양된 곳은 더한 지옥이었다. 위선으로 고아를 입양한 양부모는 그가 자라는 내내 관심을 주기는커녕 괄시와 무시를 일삼고 조롱 속에 가지고 놀듯 대하더니, 사업이 망하자 그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도망쳤다. 생전 보지도 못했던 금액의 빚은 순식간에 그의 몫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상태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한정적이었다. 그러니 어마어마한 빚을 갚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고, 밤낮으로 두세 개씩 일해도 빚은 줄어들긴커녕 더욱 몸을 불리며 그의 숨통을 조여 왔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가도 무슨 이유에선지 선뜻 실행하지는 못했다. 죽음이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아직까지도 희망이란 놈을 놓지 못해서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건… 내가 안 죽으려고 해도 곧 죽겠는데.’
얼마나 맞았는지 이미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그동안 폭력에 몸이 적응이라도 한 건지, 내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상태로 피로 얼룩진 눈을 힘없이 깜빡이고 있자 얼굴 위로 찬물이 쏟아졌다.
“씨발 새끼야! 정신 놓으면 진짜 뒈질 줄 알아!”
“…….”
콜록콜록, 물이 코로 들어가자 또 그건 고통스러운지 몸이 격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그 모든 걸 명령하고 있던 자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다잡고 끌어 올렸다.
“연아, 연아. 너 이번이 몇 번째냐? 납부일을 넘기면 이자가 날마다 붙는데 왜 약속을 이렇게 어겨?”
톡톡, 뺨을 두드리는 손이 말투만큼이나 다정하지는 않았다. 악력이 점점 거세지더니 곧 몇 번째 손찌검엔 온 입 안이 터져 입가로 핏물이 줄줄 흘렀다. 더 터질 곳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딴 식으로 해서 언제 네 부모 돈을 다 갚을 거야, 어? 정 안 되겠음 네 남동생이라도 갖다 팔든지, 아님 네 신장이라도 하나 떼든지. 그래도 네 신장 하나론 밀린 이자의 반값도 못 갚아. 진짜 어쩌려고 그래, 응?”
그거야 갚을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인데,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이자가 불어나니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손을 들어 제 뺨을 치고 있는 이에게 매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말로 어린 동생에게 손을 뻗칠까 두려워 그렇게 까무룩 넘어가는 정신으로도 매달렸다. 불쌍한 아이였다. 저야 입양되기라도 했지만, 그 아이는 제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가여운 아이였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유일하게 그의 안식처가 되어 준 고마운 이이기도 했다.
“우리가 매번 곱게 다뤄 주니까 이 새끼가 기만 살아 가지고 주제 파악을 못 하네.”
피 묻은 제 바짓단을 언짢게 바라보던 남자가 쯧, 낮게 혀를 차더니 고개를 숙여 상대를 쳐다보았다. 얼굴은 피해 줬다지만 다 쥐어 터지고 깨진 주제에도 여전히 곱상한 낯이 볼만했다. 역시 제법 잘 팔릴 것 같은데. 타 먹기도 힘들고 얼마 되지도 않는 사망 보험금보단, 역시 조금 더 교육시켜서 룸에 처박는 게 나을 성싶었다.
“연아, 입 좀 벌려 볼래?”
두툼한 중지가 다 터진 입술을 짓누르다시피 벌리며 입 안으로 들어오자 죽은 듯 늘어져 있던 몸이 크게 경련했다. 찌익- 듣기 거북한 소리와 함께 시커멓고 냄새나는 것이 그의 얼굴 앞으로 디밀어졌다. 역함에 구토가 치민 것과 동시에 그것이 입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 세우면 죽는다. 잘 빨면 오늘 이자는 빼 줄 테니까.”
우욱! 헛구역질 소리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게 제 것을 욱여넣은 사내가 사납게 일갈했다. 방금까지 그를 패던 놈들도 낄낄 웃으며 구경하듯 담배를 물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추삽질하듯 입 안에 물린 것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경고를 잊은 것처럼 이를 세워 그것을 물어뜯었다.
아아악! 처참하기까지 한 비명이 들리자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건지 모르게 만신창이인 몸을 이끌고 창고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악! 씨발! 잡아!! 잡아 와!”
고성이 오가고 짙은 욕설과 함께 곧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그의 뒤를 따라붙기 시작했다. 잡히면 죽는다. 뒷덜미에 느껴지는 감각이 오싹했다. 필사적으로 달려 겨우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몸을 비집고 뛰쳐나왔다. 어디로든 도망가야 했다. 오늘 도망간다 해서 내일 잡히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만은 도망가야 한다.
그러나 도망은 얼마 가지 못했다. 문을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와 몸을 부딪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퍽! 단단한 것과 부딪친 몸은 순식간에 모든 힘을 잃고 무너졌다. 방금까지 몸을 움직이던 기적과도 같았던 힘이 사라지자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자 어느새 그를 뒤쫓아 온 사내들이 그의 몸을 거칠게 낚아챘다.
“이 미친 새끼! 이게 진짜 죽으려고 용을 쓰네?”
“씨발! 잡았으면 당장 끌고 와! 그 새끼 오늘 내가 아주 죽여 버릴 거야!”
안에서 들려오는 포효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다시 끌려가면 필히 죽을 것이다. 참혹하게 살해당할 것이다. 가장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음만이 편안하리라.
이쯤 되니 오히려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평생 비참하고 박복하다 끝엔 남자들한테 윤간당하다 죽는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두려운 한편 허망하고 어이가 없었다.
‘…진짜 전생에 나라라도 팔았나.’
하지만 드디어 이 끔찍한 삶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은, 조금 기쁜 일인지도 몰랐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평생 그를 쫓아다니던 이 숨 막힐 듯한 공허함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것일까.
허탈한 웃음과 함께 사내들에게 머리채를 잡혀 고개가 들린 순간, 조금 전 부딪친 무언가가 보였다. 아름다운 남자였다. 살아 숨 쉬기는 할까 싶을 정도의 완벽한 피조물.
제 상황조차 잊은 채 넋을 잃고 쳐다볼 만큼 아름다운 남자는, 감정을 내비치기는커녕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차갑고 써늘한 공기로 몸을 감싼 남자의 새까맣게 가라앉은 그 눈엔 무엇도 비치지 않았다. 차갑고 무기질적인 눈은 너무나 고요하고 무심해서, 사람 아닌 다른 것과 대면한 듯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남자에게선 그만큼 위험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무심하고 차가운 남자는 잘 벼린 칼날 같으면서도, 어딘가 우울하고 서글퍼 보였다.
그는 그게 무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눈이다. 저와 같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말을 건넨 것은.
“떨어졌어요, 장갑…….”
살고자 수작을 부리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인생의 마지막으로 말을 건넨 상대가, 저 아름다운 남자가 되었으면 하는 자그마한 바람일 뿐이었다. 그리하면 제 죽음이 조금은 덜 초라할 것 같아서.
아름다운 남자는 저와 부딪친 처량맞은 사람에겐 관심 한 톨 보이지 않은 채, 무심하게 멈췄던 걸음을 잇는 듯 보였다. 눈앞의 존재가 그대로 끌려가면 무슨 짓을 당할지 빤히 알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그 순간 말을 걸지 않았다면 그들은 분명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끝났을 것이다.
운명을 바꾸는 순간은 의외로 너무나 흔하고, 일상 속에 지나가듯 다가온다. 한 번의 시선만으로도, 그동안의 삶이 통째로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 희미하고, 흐릿했다. 잔뜩 지치고 갈라진 목소리는 평소라면 남자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선지 남자는 그 말에 멈칫, 걸음을 멈추고 무심한 눈으로 제 발밑에 떨어진 검은색 가죽 장갑을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와 접촉해야 할 때 애용하는 물건은 뜻밖의 사고로 바닥을 처참하게 뒹굴고 있었다. 그것을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들었다. 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와중 이딴 것에나 신경 쓰는 머저리를 한 번쯤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곧 눈이 마주쳤다. 고통에 젖어 희미한 물기가 맺힌 다갈색의 눈과. 깜빡, 감정 없이 쳐다보던 무심한 눈이 한 차례 여닫혔다. 남자는 한 번 더 눈을 감았다 뜬다. 마치 눈앞의 존재를 새기기라도 하듯. 평소라면 이미 신경을 거두고 돌아섰을 남자가 그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 감정 없던 무심한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돌기 시작했다.
“아…….”
그 변화를 본의 아니게 똑똑히 목격한 이의 입에서 옅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서서히 감정이 떠오르는 광경은, 그만큼 찬란하고 아름다웠기에.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남자의 눈에 떠오른 그것은 환희였고, 희열을 넘은 광희였다.
끌려가던 그의 손을 남자가 다잡은 것은 그다음이었다.
윤회의 고리로도 끊지 못한, 감격의 재회였다.
* * *
남자는 평생 연유 모를 허기짐과 싸워 왔다. 항상 고독했고, 적막했으며, 목마른 갈망에 빠져 살았다.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운데 무엇이 그리운지 모르는, 그를 갉아먹는 기갈에 젖어 그리 살아왔다.
살아도 사는 기분이 아니었고, 숨을 쉬고 있어도 그뿐인 정적인 삶. 그것은 벌을 받듯 진창을 뒹구는 삶을 살아도 마찬가지였다. 열악하다 못해 더럽고 냄새나고 썩어 빠진 시궁창 같은 인생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밟고 서야만 하던 그 잔혹한 시간 속에서조차 그는 무엇에도 열의를 갖지 못했다. 단지 숨을 쉬니까 살아온 생명이었고, 그저 원하는 다른 것이 없어 이룬 지반이었다. 무엇도 남자를 채우지 못했다. 쓸쓸한 외로움만이 그를 이룬 모든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분명.
“괜찮으십니까?”
“음.”
남자는 난데없이 품 안에 뛰어들다 나뒹구는 이에겐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무심히 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그에 오히려 눈치를 보는 것은 남자의 일행들과 그들을 이곳까지 안내한 자들이다.
이 남자가 수틀리면 얼마나 위험하고 잔혹해지는지 알고 있는 이들에게 숨죽인 긴장감이 감돌았을 때였다. 남자와 부딪친 이를 쫓아온 자들이 우악스럽게 넘어진 존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쪽에 발을 들인 자들이라면 흔하게 보는 장면이었다.
오히려 남자가 방문하기로 한 날 하필 이따위로 일을 쳤으니 못해도 몇은 경을 칠 것이다. 이 또한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일은 결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가던 이의 손을, 지금까지 관망만 하던 남자가 급히 다잡았다. 다소 절박하고, 다급한 손길이었다.
절박? 다급? 남자에게서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에 그의 곁에 서 있던 비서가 제 눈을 의심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사장님?”
비서가 의아한 듯 저를 부르지만, 남자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일시에, 모든 신경이 한곳을 향한 탓이다. 잡은 손을 통해 일어난 소름이 남자의 전신으로 퍼져 간다. 전율로 몸이 떨렸다. 남자는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동요를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름이… 뭡니까?”
남자에게서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었다.
“아, 백 사장. 혹시 아는 사람인가?”
남자의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그를 데리고 온 사내였다. 의아한 눈으로 남자와 그가 잡고 있는 존재를 돌아본 사내의 얼굴에 차차 당황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 연고 하나 없는 놈이 어떻게 이런 거물을 알고 있단 말인가. 무언가 오싹해지고 만 사내가 남자를 향해 더욱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우리 고객님이신데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
“날, 압니까?”
그러나 남자는 옆의 사내에겐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연신 만신창이인 상대를 향해 물었다. 그런 남자의 반응이 당황스러운 것은 겨우 정신을 다잡고 있던 이조차 마찬가지였는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연신 눈만 깜빡였다. 지금 당장 쓰러져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위태위태한 몸짓이었다. 그 힘없는 몸짓을 조금 안타까이 바라보던 남자가 한 발짝 다가서며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오로지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날 기다렸습니까?”
나처럼… 혹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
흔들리던 다갈색 눈동자에 서서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왜 이러지, 싶은 순간 그것은 소리 없이 흘러 핏물로 얼룩진 얼굴을 가로질렀다.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사무친 그리움과 말 못 할 애틋함을 담은 눈물이었다.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질 정도로 울면서도 소리 하나 흘리지 못하는 그 얼굴에서, 남자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 또한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잡고 있던 손을 잡아끌어 제 곁으로 당긴 남자가 거친 손길로 상대를 핍박하고 있던 손들을 떨궈 냈다. 매우 사납고 흉포한 기색이었다. 그다음 제가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어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마른 어깨 위로 덮었다. 더없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힘없는 몸을 거의 품 안에 안다시피 하며 걸음을 옮기려던 남자는, 그 순간 짧게 터져 나온 신음에 고개를 내려 보았다. 바들바들 애처롭게 떨리는 전신 끝, 피로 물든 맨발 한 쌍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남자가 서서히 무릎을 굽히고 그 발을 들어 살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 하나가 살을 파고든 모습에 사납게 인상을 뒤튼 남자가 마음을 다스리듯 한 차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생애 최초로 너무 화가 나면 머리꼭지가 돌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으득, 이를 간 남자가 곧 몸을 일으켜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인 존재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헛,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헛바람 소리는 모른 척하며 걸음을 떼던 그는 품 안에 들어찬 체온과 무게에 제 식어 빠진 심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잃어버렸던 주인을 찾은 것을 알기라도 하듯, 죽어 있던 모든 감각이 일시에 아우성치며 살아났다. 성난 파도와도 같고 폭풍 같기도 했다. 거친 해일은 잠잠하던 남자를 순식간에 덮치고 휩쓸었다. 그리고 남자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격랑에 몸을 맡긴 채, 기꺼이 그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두근두근두근. 서서히 빨라지는, 그 낯설면서도 익숙한 심장 소리에 그제야 긴장의 끈을 푼 존재가 남자의 품 안에서 정신을 잃고 늘어졌다. 남자는 그런 그를 소중히 품어 안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 뒷모습을 당황스러워하다 못해 경악을 담고 바라보던 비서들이 곧 일사불란하게 뒤를 쫓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곁을 지키던 그들조차 현재 남자의 상태를 잘 알 수가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일을 결코 만만하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남자를 겪어 온 그들의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라 남자를 아는 이들이라면 결코, 이번 일을 단순 변덕 정도로 치부하지는 못하리라. 또한 항상 돈놀이를 해 대며 사람 목숨 갖고 장난질 치던 잡다한 놈들의 목숨이 바람 앞 등불 신세로 변모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저분의 변제 건에 대해서는 이쪽으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한마디로 너희는 좆된 것이다. 쯧쯧, 이 돌연한 사태를 따라잡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변한 멍청한 면면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찬 비서가 명함을 던지듯 건넨 뒤 이미 멀어진 남자의 뒤를 재빨리 쫓아가기 시작했다. 차를 대기시키고, 병원을 수배하려면 여기 더 잡혀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은 깊고 어두운 길을 지나, 숱한 고통과 절망을 마주하고, 발밑을 네발로 긴 뒤에야 겨우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죽음조차 끊지 못한 인연이었고, 윤회의 고리 속에서도 꿋꿋하게 지켜 온 약조였다.
또 다른 구원이었다.
─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