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2/21)

01.

“주인님!”

막 손님상에 나갈 요리를 확인하고 있던 참이었다.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들자 장지문을 벌컥 열며 들어서는 시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님! 주인님!”

귀신이라도 본 듯 호들갑을 떨면서 달려오는 시종의 모습에 중년 남성의 주름진 이마에 깊은 내 천 자가 그려진다. 그가 바로 이 유곽의 주인인 한조였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리 호들갑이야.”

읊조리는 목소리는 낮았지만 만약 별일이 아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사가 분명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없었다.

“지, 지금, 룽, 룽오 님께서.”

헐떡이느라 시종이 뒤 문장을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한조는 이미 밖으로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어디 계시느냐.”

속도를 높여 걷는 한조의 발아래로 반질반질하게 닦인 나무 바닥이 삐걱거렸다.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던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꾸했다.

“아마 지금쯤 건물 안으로 들어오셨을 겁니다. 저는 차가 정문에 도착한 것을 보고 곧장 달려왔어요.”

“잘했다.”

말 한마디도 인색한 주인에게 무려 칭찬까지 들은 시종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번진다. 물론 이미 앞선 한조의 머릿속에는 시종의 존재 따위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멈칫.

한조의 발이 멈춘 것은 막 복도를 지나 별채로 이어지는 정원 입구에서였다. 반대편 문을 통과하는 사람의 무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행동이 멈춘 것은 아주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단숨에 영업용 미소로 무장한 한조가 한달음에 다가갔다. 그리고 머리를 허리까지 조아린다.

“기별도 없이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와주셨습니까.”

걸음을 멈추고 주인의 환대를 받던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내가 온 것이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지?”

속내를 감추는 데 능숙한 한조이지만 미처 감추지 못한 미묘한 태도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속으로 식겁한 한조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리 대단한 분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모시게 되었으니 혹 대접이 미진하진 않을까 염려되어 그러지요.”

혹여나 표정을 읽힐까 고개를 더 깊이 숙인 채 한조가 변명을 이었다.

한조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이는 바로 경무국 내 경무부 소속인 룽오 부장으로, 부장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경무국 내 다른 국장들보다도 권력 서열에서 실세라고 여겨지는 사내였다. 그런 거물급 인사의 방문을 꺼릴 유곽 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그를 모시기 위해 혈안이 된 가게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한조 역시 그런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럼에도 한조가 이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오늘은 퇴근하는 길에 가볍게 한잔할까 하고 들른 것이니 특별히 신경 쓸 것 없어.”

염려와는 달리 그냥 가볍게 던져본 말이었던지 이내 룽오는 날카로운 태도를 거뒀다.

“이 늦은 시간까지 업무를 보셨습니까.”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물론 유곽의 시계로는 지금이 가장 분주하고 바쁠 시간이었지만.

“조만간 경무국 내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있을 예정이라.”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는 듯 룽오가 안경 너머로 찡그린 눈꺼풀을 꾹꾹 눌렀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인상이 그나마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어서 방으로 가시지요. 안 그래도 오늘 환상국에서 아주 좋은 독주가 들어왔었는데 이리 술의 임자가 따로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조가 황급히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안내를 하자 룽오 부장도 가던 걸음을 다시 내디딘다. 그를 뒤따르며 여기까지 룽오 부장의 안내를 맡았던 여인에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초하를 부르게.”

하지만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룽오 부장의 걸음이 다시 멈췄다.

“화수는 바쁜 모양이지?”

“…….”

처음으로 한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가볍게 왔다던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 어리석었다. 평소 한조라면 결코 하지 않을 실수였지만, 내심 그러길 바랐던 사심이 섞여 판단력이 흐려졌다.

“하찮은 아이의 이름까지 기억해주셨습니까.”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를 모르고서는 경무국 내 권력자라고 할 수 없다고.”

“그럴 리가요. 그저 별것 아닌 아이를 어르신들이 예쁘게 봐주시는 것뿐이지요.”

“어쨌든 윗분들께 가장 예쁨받는 아이라는 데에는 주인장도 이견이 없다는 말이겠군.”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 말하는 한조의 얼굴에서는 약간의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물론 그 자신만만한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만.

“그런데 굳이 내게 그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를 대접하는 이유는?”

“…….”

“내가 그 정도 대접을 받을 만큼 대단한 손님은 아니라는 뜻인가?”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 말에 담긴 무게마저 가벼울 리 없었다. 한조가 다시 한 번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그저?”

“그저 오늘 화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제 방에서 쉬고 있는 중이라 부장님을 모시기에 부족함이 있을까 염려되어 그리한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어. 말했잖나. 오늘은 가볍게 술 한잔하러 들른 것이라고.”

“…….”

“어차피 손님도 못 받을 테니 잠깐 나와서 내 술시중이나 들다 들어가라고 해.”

“…….”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한조에 룽오 부장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또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것이, 지금부터 단장을 한다고 해도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라­”

“단장 같은 건 됐어. 어차피 분칠이 필요한 계집도 아니고, 그냥 편한 차림으로 오라고 해.”

“…….”

“그도 아니면 절대 나오질 못할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날카롭게 되묻는 질문에 한조는 순순히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들어가 계시면 아이를 준비하겠습니다.”

룽오 부장이 별채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한조가 나직이 물었다.

“지옌쯔 국장은?”

사실 지금까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자신을 무시하느냐고 룽오 부장이 불같이 화를 내고 돌아서도 이상할 것이 없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한조가 그런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필이면 오늘 경무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내무국 지옌쯔 국장이 이곳에 와 있었던 것. 사실 직위로만 보면 지옌쯔 국장이 당연히 룽오 부장의 상관이라고 봐야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경무국의 2인자인 룽오 부장이 더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터라 둘 사이가 좋을 리 만무했다.

그런 둘 사이에 떡하니 끼게 되었으니 아무리 돈이라면 뭐든 하는 한조도 이 상황을 반길 수만은 없었던 것. 그동안 괜스레 이런 권력 싸움에 끼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가게들을 수십 번은 더 보아왔다.

“아직 한창이라더냐.”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시종이 당황한 듯 눈을 껌뻑인다. 그런 지시는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런 것을 변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 지금 가서 확인해보겠습니다.”

“여즉 그런 것도 확인 안 하고 뭘 하고 있었던 게야!”

벼락같이 떨어진 날벼락에 시종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얼른 다녀오겠-”

“됐다. 내 직접 갈 테니. 넌 따라올 것 없다.”

“…….”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으려던 시종의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설마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 불안해하는 시종의 머리 위로 다음 지시가 내려졌다.

“넌 여기서 상황을 보고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와 고하거라.”

“예? 아, 예!”

뒤늦게 지시를 이해한 시종이 반색하며 대답했지만 이미 한조는 패방문을 지나 모습을 감춘 뒤였다.

“지옌쯔 국장은 가셨느냐.”

한조가 삐죽 열려 있는 장지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들어섰다. 질문을 하기는 했지만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문밖에 류가 없는 것을 확인했으므로.

예상대로 방 안에 지옌쯔 국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작은 홍등만 켜진 어두컴컴한 방 안엔 엉망이 된 비단 이불 위에 축 늘어져 있는 화수와 그런 화수의 손목과 발목에 묶인 천을 풀고 있는 류뿐.

방 안으로 들어선 한조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사실 한조에게 관계 후의 엉망이 된 방 안 같은 건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한조조차 얼굴을 찌푸릴 만큼 방 안 공기는 땀과 정액이 뒤섞인 냄새로 들척였다.

지옌쯔 부장이 사람 좋아 보이는 가면 뒤로 얼마나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한조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탈탈 쥐어짜는지, 심지어 몸이 아플 때도 쉬는 법이 없는 독한 녀석이 그가 다녀간 다음 날은 맥없이 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여느 때보다 일찍 끝났다고는 하나 눈도 뜨지 못하고 류에게 몸을 맡긴 채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오늘의 정사 역시 그리 녹록지 않았음을 짐작케 했다.

“화수야.”

숨은 쉬는 건가,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에 무릎을 굽혀 앉은 한조가 코 아래쪽에 손가락을 댔다. 물론 그런 위험한 상태라면 애초에 류가 그냥 두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수는 상대로 하여금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탁.

역시나 괜한 걱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죽은 듯 미동도 없던 화수가 한조의 손을 쳐냈다. 매일 손님에게 다리를 벌리는 남창 주제에 화수는 사람과의 접촉을 싫어했다. 인간 자체를 싫어한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만.

“그래서.”

눈이 잘 뜨이지 않는지 묵직한 눈꺼풀을 연신 깜빡인다. 눈을 비빌 힘도 없다는 듯. 그나마 티끌만큼 남아 있던 마지막 기운마저 조금 전 한조의 손을 쳐내는데 써버렸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데.”

색색거리며 가는 숨만 겨우 쉬던 녀석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어투였다.

게다가 화수가 던진 질문은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이미 확신을 전제로 한 중얼거림이었다. 머리가 좋은 녀석은 한조가 자신의 방을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게.”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천하의 한조도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녀석에게 또 다른 손님을 받으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던 것.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시종을 보내 말을 전할 걸 처음으로 후회했다.

하지만 화수는 눈치가 빨랐다. 가끔은 그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누가 왔는데.”

“룽오 부장.”

이름을 듣는 순간 화수가 눈을 감았다. 일단 운은 뗐으니 그나마 그다음은 수월했다.

“화수야.”

“알았어.”

눈도 뜨지 못하면서도 화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만 닦고 갈게요. 류, 영견領絹 좀.”

괜찮겠냐는 맘에도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굳어 있던 한조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조금은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해도 된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설사 룽오 부장의 기분을 상하게 하더라도. 하지만 그런 작은 호의마저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주인님, 주인님!”

쿵쾅쿵쾅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 안으로 구르듯 뛰어 들어왔다. 조금 전 별채 상황을 살피라고 남겨두었던 시종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무슨 일이냐.”

불길한 기분을 억누르며 일단 물었다.

“루, 룽오 부장님께서-”

연신 이름만 되뇌는 시종에 한조가 신경질적으로 호통을 쳤다.

“이름을 모를까 봐 이름만 되뇌느냐. 됐으니 본론부터 말해봐라. 룽오 부장님이 뭘 어찌하셨다는 게야.”

몇 가지 한조의 머리를 스치고 가는 추측들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어진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룽오 부장님이, 화수 님이 지옌쯔 국장님을 모시느라 못 나오고 있다는 걸 아셨어요.”

한조의 얼굴이 움켜쥔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나마 위기에서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한조를 비웃듯 최악 중에 최악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다들 뭣들 하고 있었던 게야!”

사실 시종은 한조의 명령대로 그저 지켜보고 있다가 상황을 알린 것밖에는 잘못이 없었지만 주인의 불호령에 그저 쥐 죽은 듯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 어찌 되고 있어.”

“집사 어른께서 아니라고 오해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럼 직접 본인 눈으로 확인하시겠다며 이곳으로 오고 계세요. 도착하시기 전에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뭐?! 한조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느냐!”

사실 본인이 화를 내는 통에 보고가 늦어졌지만 그런 것이 한조의 머릿속에 있을 리 없었다. 이미 성난 발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벌떡 일어난 한조가 일단 반쯤 열린 방 문을 닫았다.

“일단 방이라도 옮기자. 내가 나가서 잠시 시간을 끌고 있을 테니­”

엉망이 된 방을 치우는 것보다는 그편이 더 빨라 보였다. 임시방편이라 하더라도 뭐든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수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이미 늦었어.”

마치 남의 일인 양 시큰둥하게 중얼거리는 화수에 한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만약 이대로 룽오 부장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 그 화를 입게 되는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지금 누구보다도 위험한 사람은 화수였다. 그럼에도 남의 집 불구경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의 화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다 알고 오는 건데 어쭙잖은 눈속임으로는 괜히 화만 돋우지.”

“그럼, 이대로 앉아서 다 같이 개죽음이나 당하자?”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상대는 즉결심판권이 있는 본국의 군인이 아닌가. 그것도 경무국 내 실세라 불리는 그가 마음만 먹으면 이런 가게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그제야 화수도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한 듯했다.

“죽는 순간까지 영감이랑 함께하고 싶지 않거든?”

물론 그 부분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지만.

지금 농담이 나와? 기가 막혀 한마디 하려던 한조가 멈칫했다. 점점 커지던 발소리가 문득 멈췄음을 깨달았던 것.

드르륵-, 탕.

문이 벽에 부딪혀 튕기는 소리에 바닥에 반쯤 엎드려 있던 시종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렸다. 하지만 다행히 열린 문은 건너편 방 문이었다.

“룽오 님, 부디 오해를 푸십시오. 조금만 진정하고 계시면 제가 당장 가서 화수를 데려오겠습니다.”

집사 영감의 목소리였다. 대꾸는 없었다. 대신 문을 놓고 돌아서는 발소리만 되돌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 그건 룽오 부장을 설득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쪽을 향해 보내는 신호에 가까웠다.

끼익, 끼익.

내딛는 걸음에 나무 바닥이 내려앉는 소리가 울렸다. 장지문 너머로 시커먼 인영人影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문가에 서 있던 류가 황급히 문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열어.”

불쑥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화수였다.

“어찌하려고.”

목소리를 한껏 죽인 한조가 나직이 물었다.

흐트러진 이부자리와 침과 정액으로 엉망이 된 화수의 몸. 그리고 나뒹구는 붉은 끈. 누가 봐도 조금 전 격렬한 정사를 치른 방이라는 걸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는 광경이었다.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한조조차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방법 같은 건 없어 보이는데 그냥 문을 열라니.

하지만 대체 무슨 수가 있나 궁금해하는 한조에게 되돌아온 화수의 대답은 고작 이것이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기가 막혀하는 한조에도 화수는 태평했다.

“어차피 다른 방도도 없잖아?”

그러고는 태연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비단 침의寢衣-그 역시도 이부자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엉망인 상태였다-를 집어 걸쳤다. 앞이 훤히 뚫린 침의를 걸치느니 사타구니에 묻은 정액을 닦아내는 것이 더 먼저일 듯싶었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뭐가 먼저든 무슨 상관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옷깃을 잡아 주름을 편 한조가 문 앞으로 걸어갔다. 태평한 화수를 보니 한조 역시 조금 진정이 되긴 했다.

드르륵. 검은 그림자가 점점 뚜렷해지는 것을 본 한조가 한발 앞서서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룽오 부장님.”

설마 먼저 문이 열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마주한 룽오 부장의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하지만 이내 당황한 기색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분노가 가득 채운다.

“하. 지금 날 놀리는 건가?”

그가 방 안 정경을 확인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몇 초면 충분했다.

스릉.

뭐라 변명할 틈도 없이 시퍼런 검 끝이 한조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리되리라 예상했었지만 단순히 예상하는 것과 실제로 맞닥뜨리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금방이라도 휘두른 검에 목이 베일 것만 같았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몸이 벌벌 떨렸다. 검 끝이 닿아 있던 목에서 주르륵, 핏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건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 살려줘, 차마 입이 떨어지지도 않아 속으로만 겨우 애원하고 있을 때였다.

“화수라 하옵니다.”

한조의 등 뒤에서 들려온 담담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슥.

죽일 듯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던 무시무시한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목을 겨누고 있던 검도 아래로 내려갔다. 멈춰 있던 걸음이 천천히 한조를 스쳐 갔다. 시퍼런 날이 벼려진 검은 여전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방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마치 그곳에 룽오 부장과 화수, 두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다른 이들은 그저 숨 죽인 채 화수를 향해 걸어가는 룽오 부장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을 뿐이다. 타닥, 타닥, 홍등 속 초 심지가 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네가 그 화수란 말이지?”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평온히 들렸지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화수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룽오 부장의 손이 움직였다.

푹.

곧바로 푹신한 곳에 검이 꽂히는 소리에 어린 시종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유혈사태는 없었다. 슬그머니 뜬 실눈에 푹신한 이불 위에 박혀 있는 검이 들어왔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하기는 일렀다. 화수의 코앞에 몸을 낮춰 앉은 룽오 부장의 손은 여전히 이불에 박힌 검 자루를 붙잡은 채였다.

“아픈 곳은 어때. 아파서 거동도 못 한다기에 내 직접 보러 왔는데.”

무슨 변명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무슨 변명을 한들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 그저 납작 엎드려 살려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물론 이번에도 화수의 생각은 전혀 달라 보였지만.

“아, 보실래요?”

“…….”

“조금 전까지 지옌쯔 국장님이 쑤셔대던 곳이라, 퉁퉁 부었거든요.”

대답은 없었지만 화수는 태연히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제 구멍을 옆으로 살짝 벌렸다.

쯔윽, 퉁퉁 부어 있던 입구가 벌어지자 그 안에서 희뿌연 액이 울컥, 하고 새어 나왔다. 주름진 구멍이 오물거릴 때마다 좆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광경은 없던 좆도 세울 지경이었지만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한조의 얼굴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문의 룽오 부장은 그리 쉬운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은 이미 지옌쯔 국장으로 자존심을 다친 상태가 아닌가.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물론 한조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세상 무서운 것 없는 녀석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럴 때 보면 정말 목숨을 내놓고 사는 듯했다. 내일 당장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물론 그래도 제가 뱉은 말은 책임지는 녀석이니 믿어도 되겠다 싶었지만 이쯤 되니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불안불안한 것이 사실.

하지만 수컷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능력은 화수가 한 수 위였다. 특히나 그것이 자신에게 발정하는 수컷이라면 더더욱.

“어때요?”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향해 화수가 구멍을 더 벌리며 물었다. 주륵, 주륵, 주름을 벌릴 때마다 희뿌연 정액이 삐져나왔다.

“지옌쯔 국장이 열심히 힘내서 뚫어놓은 길을 본인이 가로채서 잔뜩 싸버리면 엄청 기분 좋을 것 같지 않아요?”

남들은 자신을 실세라고 치켜세워주지만 결국 허울 좋은 소리일 뿐이다. 자신보다 능력은 하등 떨어지는 늙은이들이 저보다 계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거드름 피우고 자신을 무시하는 게 룽오는 늘 비위가 상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옌쯔 국장. 제 직속상관도 아니면서 룽오를 늘 대놓고 깔아뭉개곤 했다. 고작 내무국 국장 주제에.

그런 지옌쯔가 죽고 못 산다는 남창을 보러 온 것이다. 굳이 계집도 아닌 사내새끼에게 발정한다는 일이 사실 룽오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눈앞의 사내는 악마였다.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러 온.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제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유혹할 리 없었다. 그의 말을 듣기 전까지, 스스로도 자신에게 그런 욕망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던 룽오였다.

“이거라면 지옌쯔 국장은 닿지 못한 곳까지 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잔뜩 부풀어, 터져 나올 것 같은 그의 바지 앞섶을 보며 화수가 윗입술을 핥았다. 살덩이가 핥은 것은 자신의 붉은 입술인데, 이상하게 룽오의 성기가 더 거세게 부풀어 올랐다. 악마가 가늘게 눈꼬리를 접었다. 눈 밑의 작은 점이 도드라졌다. 이렇게 야한 얼굴이었나? 눈웃음을 친 것뿐인데, 다른 사람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악마에게 홀린 듯한 표정으로 멍하게 있는 룽오를 향해 화수가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박아보시겠어요? 얼마나 깊이 들어가는지?”

툭. 하고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덮치듯 화수의 몸 위로 올라타는 룽오를 보고 한조가 재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물론 바닥에 엎드린 채 굳어 있는 시종의 목덜미를 붙잡고 나오는 것도 잊지 않는다.

탁, 하고 장지문이 닫혔지만 거친 숨소리와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고스란히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어휴, 저 요물.”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조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런 속내를 드러낼 그가 아니었다.

“다들 뭣들 하고 있어. 오늘 장사 접을 게야?”

한조의 싸늘한 일갈에 어느새 참새떼처럼 몰려와 있었던 이들이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유곽의 밤은 길었다.

물론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는 저 방 안의 밤은 더더욱 길 예정이었다.

* * *

사락, 사락.

종이 소리에 맞춰 가만한 바람이 일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다정했다. 하지만 화수는 그런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만해도 돼, 류.”

늘어진 화수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지만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화수가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섭섭하네. 기다린 보람도 없이 일어나자마자 다른 사내의 이름이라니.”

화수의 눈이 번쩍 떠졌다.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지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웃음 띤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재수 없을 정도로 잘난 얼굴, 진도현이었다. 상대를 확인한 화수가 도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투덜거린다.

“취미도 고약하십니다.”

“내가?”

웃음기 섞인 물음이 되돌아왔다.

“그냥 다른 아이 방으로 가셨으면 될 것을요, 굳이 지쳐 잠든 사람이 깨길 기다릴 게 뭡니까.”

“이거, 걱정돼서 들여다본 이에게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

오늘따라 내 몸 걱정해주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나, 싶었다.

“오늘 큰일 날 뻔했다며.”

팔랑, 팔랑, 축 늘어진 화수의 머리 위로 다시 바람이 일었다. 바람이 일 때마다 새까만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언제 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제법 시간이 흘렀다는 건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도현은 늘 입고 있는 양장 상의를 벗어둔 채, 매고 있던 타이까지 느슨하게 풀어둔 다소 흐트러진 상태로 화수의 옆에 앉아 있었다. 보기엔 이리 느슨해 보여도 사실 진도현이 집도 아닌 다른 공간에서 이리 마음 편히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려줄까, 고민하다 관두기로 한다. 지금은 흠칫하며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겁 없이 구는 것도 적당히 해. 룽오 부장은 그리 만만한 인간이 아니니까.”

“네, 아빠.”

그런 충고 따윈 개나 주라는 건방진 태도였지만 진도현은 그저 피식, 웃으며 넘긴다. 사실 어찌 보면 화수의 버릇을 가장 나쁘게 만드는 이가 바로 진도현이었다.

“금방 정신 차릴 테니까, 5분만, 아니 1분만.”

몸을 웅크린 화수가 중얼거렸다. 답지 않게 우는소리를 하는 걸 보니 오늘이 힘겹긴 힘겨웠던 모양이다.

축 늘어진 손목의 붉은 자국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피부가 워낙 흰 탓이었다. 사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화수의 피부는 희고 고왔다.

“됐어.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있어.”

찰칵, 찰칵, 진도현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화수는 믿지 못하는 듯했지만 오늘은 정말 얼굴이나 보러 들른 것이었다.

“돈을 받았으면 일을 해야지.”

노골적인 손님 취급에 기분 나쁠 만도 한데 진도현은 빙그레 웃었을 뿐이다.

“걱정 마. 다음번에 이자까지 쳐서 다 돌려받을 테니까. 장사꾼이 손해 보는 것 봤어?”

더하면 더했지 사업수단만큼은 진도현이 한 수 위였다.

“하여튼 있는 사람이 더하다니까.”

투덜거리면서 일어나려는 화수를 진도현이 도로 눕혔다.

“알았어. 알았어. 이자는 빼고 원금만 받을게. 됐지?”

이 정도면 많이 양보한 거야. 어깨를 으쓱이는 진도현을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던 화수가 손을 내뻗었다. 그러고는 진도현의 손에 들린 담배를 가져간다.

지지직.

천정을 보고 누운 자세로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세게 빨았다. 종이가 단숨에 타들어가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하얀 연기가 천정으로 솟아올랐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이마, 콧등, 속눈썹, 그리고 야해빠진 눈물점까지 천천히 핥아 내리는 진도현의 시선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화수는 무심히 한 번 더 담배를 세게 빨았다. 지지직. 이번에도 종이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소리 같았다.

가만히 보고 있던 진도현이 손을 내뻗었다.

“위험하게.”

하지만 진도현의 손이 향한 곳은 화수의 손에 들려 있던 담배였다.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담뱃재가 진도현이 담배를 낚아채자마자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재는 그대로 바닥 위에 새까만 그을음을 남겼다. 조금만 늦었다면 그 자국은 화수의 얼굴에 남았을 것이 분명했다.

상상만으로도 진도현은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정작 당사자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피울 거면 일어나.”

반성은커녕 오히려 다시 달라는 듯 손을 내뻗는 화수에게 진도현이 경고했다. 하지만 그런 경고가 화수에게 먹힐 리 없었다.

“귀찮아. 그럼 진 사장이 직접 물려주든가.”

“까분다.”

아. 도발하듯 도톰한 입술까지 벌렸지만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다.

“치사하게.”

아예 담배를 제 입으로 가져가는 진도현을 본 화수가 투덜거리며 고개를 떨궜을 때였다.

-!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뜨거운 입술이 화수의 입술을 눌렀다. 상황을 파악한 화수가 급히 얼굴을 비틀었지만 이미 턱을 붙잡힌 상태였다. 혀를 밀어 넣고 벌려진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쿨럭 쿨럭 쿨럭.

결국 기침이 터졌고 그제야 진도현은 잡고 있던 턱을 놓아주고 물러섰다.

“까불지 말랬지.”

얄미운 소리를 하는 것도 잊지 않고서. 받아쳐주고 싶었지만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기침이 멈췄을 땐 이미 기진맥진해져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가만히 노려보고만 있자 그런 화수를 향해 씨익, 하고 악당처럼 웃은 진도현이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까불지 말랬지, 아예 입을 다물라고는 안 했는데.”

찰칵, 찰칵, 입술로 문 담배에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단순한 사업가보다는 불법 조직을 운용하는 악당에 더 잘 어울렸다. 뭐, 그가 벌이고 있는 사업 중 절반은 불법적이니,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지직.

불씨가 타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던 화수가 손을 뻗어 그의 타이를 붙잡았다. 진도현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보았지만 화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당겼다.

입술이 닿았다. 이번엔 혀로 벌리지 않아도 화수가 먼저 벌려 그 사이로 연기가 새어 들어갔다. 마치 담배를 빨듯 화수가 연기를 빨아들였다. 더 이상 빨 연기가 없자 화수가 붙잡고 있던 타이를 놓았다.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하지만 상대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뒤로 도망치려는 화수의 뒷머리를 콱, 움켜쥔 그는 각도를 달리해 입술을 겹쳤다. 동시에 괘씸한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입안이 살덩이로 가득 찼다. 물러설 곳 없는 혀를 붙잡아 문질렀다. 까슬한 혀 돌기가 자신의 민감한 입안을 휘젓자 화수가 목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쩍, 하는 민망한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 투명한 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흘끔, 시선을 아래로 내린 화수가 빈정거린다.

“안 하신다면서요.”

어느새 진도현의 앞섶은 터질 것처럼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물론 그는 욕망을 부끄러워할 사내가 아니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더라?”

“저죠.”

지익.

가볍게 인정한 화수가 손을 내뻗어 바지 지퍼를 열었다. 속옷 안으로 새하얀 손을 집어넣어 잔뜩 부푼 성기를 꺼냈다.

튀어 오르듯 모습을 드러낸 성기는 이미 핏줄이 다 서 있었다. 화수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다. 혀를 내밀어 단단해진 끄트머리를 할짝거렸다. 손안의 살덩이가 파드득, 튀어 올랐다. 혀를 좀 더 길게 내밀어 기둥을 핥아 올렸다. 혀가 닿을 때마다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것을 혀끝으로 가만히 더듬으며 긁어 올리자 진도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입을 벌려 기둥을 삼켰다. 다 삼키지도 않았는데 벌써 입안이 가득 찼다. 몇 번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자 기둥이 더 부풀었다.

“쉬지 마.”

숨 쉬는 것이 힘들어 잠깐 멈췄을 뿐인데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손에 들려 있던 담배를 입에 물고 진도현이 자유로워진 손으로 화수의 머리채를 잡아 눌렀다. 화수의 고개가 다시 앞뒤로 움직였다.

삼키지 못한 침이 검붉은 살덩이가 드나들 때마다 밖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앞뒤로 움직이게 하던 진도현이 이내 화수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적시는 건 이쯤 하면 됐으니까 누워봐.”

앉아 있던 화수가 순순히 자리에 누웠다. 벌린 다리 사이로 진도현이 손을 집어넣어 구멍을 매만진다.

“많이 부었네.”

흠칫, 하고 움츠러들었던 구멍 주변을 빙글거리던 손가락이 이내 주름을 벌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다정하게 묻는다.

“괜찮겠어?”

하지만 정작 거기에 대고 고개를 내젓는다 해도 그가 멈추지 않으리란 걸 화수는 모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이리 신사처럼 굴어도 그 속에 얼마나 흉포한 짐승이 들어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게 화수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괜찮을 리가 있겠어요?”

피식, 하고 웃은 화수가 손을 내뻗었다. 그러고는 그의 입에 물린 담배를 가져와 제 입술에 물었다. 그것을 천천히 빨았다가 내뱉는다. 스윽, 내리깔렸던 긴 속눈썹이 들렸다. 마주한 새까만 눈동자로, 나른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 같은 건 할 틈도 없이, 엉망으로 만들어줘요.”

어쭙잖은 다정함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화수는 더 좋았다.

“아-으…….”

천천히 안을 벌리고 들어오는 감각에,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아래가 뻐근하게 가득 찼다. 들어왔던 기둥이 다시 뒤로 빠졌다. 이번엔 달라붙어 있던 내벽이 쯔윽, 쯔윽, 쫀득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아-응.”

끄트머리까지 잡아 뺐던 기둥을 다시 쑤셔 넣는다. 반사적으로 조이는 엉덩이를 붙잡아 벌리자 발기한 기둥을 힘겹게 물고 있는 입구가 드러났다. 퉁퉁 부어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가 벌름거리며 제 것을 삼키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안 그래도 잔뜩 성이 난 성기가 더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단순한 기분만은 아닌지 기둥을 삼키고 있는 내벽이 벌벌 경련한다.

“조이지 마.”

나직이 경고한 진도현이 다시 한 번 허리를 뒤로 뺐다. 꽉 물고 놓아주지 않던 쫀득한 내벽이 쯔윽, 쯔윽 야한 소리를 내면서 성기를 놓았다. 핏줄이 잔뜩 선 살덩이를 다시 밀어 넣었다. 그사이 다시 오므라진 내벽을 잡아 벌리며.

부들부들 떨면서 벌어진 내벽이 다시 진도현의 성기를 쥐어짰다.

“이젠 됐으니까, 그냥 빨리­”

헐떡이던 화수가 애원했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하지만 진도현은 쉽게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

“왜. 천천히 하는 거 좋아하잖아.”

“아니, 야- 응……!”

진저리를 치는 허리를 붙잡고 일부러 더 천천히 밀어 넣는다. 제 모양대로 벌어지고 길이 나는 안을 음미하면서 속삭이자 화수가 도리질 쳤다. 물론 사실이 아니라는 걸 진도현은 알고 있었다. 화수는 거친 것보다 이렇게 천천히 움직이는 걸 더 못 견뎌했다.

“빨리해줬으면 좋겠어?”

끝까지 단숨에 다 잡아 뺀 기둥뿌리를 붙잡고 슥슥, 문지르며 묻자 아랫입이 가장 먼저 질문에 대꾸하듯 입을 벌름벌름거렸다. 옴폭한 곳을 빙글이다 이내 살짝 힘을 주어 밀어 넣자 단숨에 귀두까지 삼켜버린다.

“그럼.”

그렇게 귀두만 삽입한 채 허리를 빙글이니 화수가 자지러졌다.

“아, 으……으!”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이 흐물흐물했다. 잔뜩 옹송그린 발가락을 입안에 넣고 깨물면서 뒷말을 이었다.

“그럼 빌어봐.”

“제, 발.”

화수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지만 진도현의 요구는 아직 끝이 난 게 아니었다. 사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진도현은 그리 신사는 아니었다.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변태 중에 상변태였다.

하지만 그런 쪽이라면 화수도 그에 못지않았다. 청순한 얼굴에 가려져서 그렇지 오히려 진도현보다 한 수 위일지도 몰랐다.

“빨리.”

겨우 그거냐며 진도현이 내려다봤지만 화수 역시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화수가 뒷말을 이었다.

“안에 좆물 잔뜩 싸주세요.”

물론 그 말이 곧바로 퍽, 하고 아랫배를 쳐올리는 둔통에 신음으로 바뀐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저벅저벅.

리 샤오는 붉은 융단이 깔린 중앙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수도의 중심부, 가장 크고 웅장한 건축물인 총독부의 내부는, 외관과 달리 지나치게 한적했다. 경비가 삼엄한 탓도 있었지만 애초에 건물이 지나치게 큰 탓이었다.

덕분에 그의 발소리가 제법 요란스러웠다. 물론 그런 소리에 신경이나 쓸 리 샤오도 아니었지만.

“우리 방은 오른쪽입니다.”

리 샤오의 발이 계단의 맨 윗단을 딛는 그 순간에 맞춰 방향을 알리는 이가 바로 리 샤오의 수족이자 비서관인 카이였다. 그 역시도 이곳은 처음이었지만 유능한 수족답게 이미 건물의 구조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이미 파악을 끝낸 건 건물의 구조만은 아니었다. 이 건물 내 인물들의 내밀한 관계도 역시 그의 머릿속에는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리 샤오가 발을 내디딘 방향은 오른쪽이 아니었다. 왼쪽으로 방향을 꺾은 리 샤오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경무국장의 방 앞이었다.

슥.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리 샤오가 끼고 있던 가죽장갑을 벗었다. 한 발 물러서 기다리고 있던 카이가 곧장 그 장갑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대신 문을 두들긴다.

똑똑.

하지만 안에서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부재중인 건가. 잠시 대기하고 있던 카이가 다시 손을 내뻗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리 샤오의 저지가 아니었다면.

리 샤오가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움직이지 마. 신호를 알아차린 카이도 그대로 일시 정지,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

그제야 카이의 귀에도 안에서 나는 소리가 감지되었다. 그건, 뭔가에 억눌린 듯한 신음이었다.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카이가 눈을 크게 떴을 때 리 샤오는 이미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었다.

“제가-”

쾅-!!!

말릴 틈도 없었다. 이미 리 샤오의 단단한 어깨에 부딪혀 부서져 나가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별다른 신호 없이도 일사불란하게 방 안으로 들어선 리 샤오와 카이였지만 정작 들어선 뒤에는 움직임이 없었다.

“아윽……!”

눈앞에 펼쳐진 방 안의 풍경은 두 사람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억눌린 신음은 누군가의 습격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경무국장의 입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책상 위에서 잔뜩 흥분한 경무국장의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가 내는 신음이었다.

“누구야!”

갑작스러운 타인의 등장에도 경무국장은 그 장면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덕분에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은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시선을 잡아끈 것은 경무국장의 아래 깔린 쪽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억지로 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단정하게 흰 셔츠와 양장 상의까지 갖춰 입은 채였고, 위로 들린 두 팔은 타이로 손목을 결박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오해였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사내의 새하얀 허벅지에 감긴 것은 분명 여성들이 주로 착용하는 검은 가죽소재의 가터벨트로, 단정한 상의 아래 입고 있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난잡한 차림이었던 것.

“리 샤오 사령관?”

멈춰 있는 것 같던 시간이 그제야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과 달리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경무국장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문 앞에 선 침입자의 정체를 파악한 탓이었다.

그제야 경무국장이 연결되어 있던 기둥을 잡아 뺐다.

“아으-ㅇ.”

거칠게 아래가 뽑히는 감각에 삽입당하고 있던 이가 진저리를 쳤다. 물론 경무국장은 그저 자신의 바지를 추스르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다행히 그 역시 크게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런 상황쯤은 익숙하다는 듯 조용히 다리를 오므리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상의로 가려지긴 했지만 다 가려지지 못한 엉덩이골 아래로 흰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는 장면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흠흠.”

바로 앞에서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무국장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는 걸 모를 정도로 정신이 팔려 있었다. 카이가 가장 먼저 살핀 것은 자신의 몇 발자국 앞에 선 리 샤오였다. 다행히 리 샤오의 시선은 경무국장을 향해 있었다.

“죄송합니다. 안에서 수상한 소리가 나기에, 습격이라도 당하신 줄 알았습니다.”

조용히 빼 들었던 검을 수습하며 리 샤오가 사과했다. 물론 그리 말하는 리 샤오의 얼굴 표정은 전혀 미안해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지만.

“여기가 무슨 전장도 아니고, 누가 감히 총독부 안에서 경무국장을 습격한단 말인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 아닌 이상-”

대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거냐고, 기가 막혀하던 경무국장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위험에 노출된 전장을 누비던 진짜 군인이란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리 샤오도 그제야 자신이 전장이 아닌 평범한 곳에 와 있다는 걸 제대로 자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근무 중에 이런 짓을 하는 꼴을 볼 리가 없을 테니까. 애초에 그런 부하를 수하에 두는 일 자체가 없었겠지만.

“무사하신 것 같으니 이만 물러가지요. 인사는 나중에 하러 오겠습니다.”

“아냐. 아냐. 그럴 것 뭐 있어.”

리 샤오가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경무국장이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더니 흘끔, 뒤쪽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쯤하고 가봐.”

그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이가 슥,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수 없어서 그러고 있는 줄 알았는데 국장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책상에서 내려온 이가 시선을 내리깐 채 방 안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리 샤오가 서 있는 위치에서.

하지만 그의 시선은 리 샤오에게 있지 않았다. 그저 그의 발치, 정확히는 리 샤오의 발치에 놓인 자신의 바지를 향해 있었다.

마치 리 샤오가 그곳에 있지 않은 것처럼 구는 그의 모습에 리 샤오의 오른쪽 눈썹이 살짝 위로 치켜세워졌다. 단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는 리 샤오였다. 그것도 이런 하찮은 존재에게.

자박자박.

하지만 그런 리 샤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쪽을 향하는 남자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내려진 상의에 아랫도리는 가려졌지만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정액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보는 사람은 뭔가 아슬아슬한 기분이 드는 장면이었으나 정작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고 걷고 있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그게 리 샤오의 신경을 거슬렸다.

스윽.

바로 앞까지 온 화수가 허리를 숙여 널브러진 자신의 바지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무심코 집어 들던 옷이 뭔가에 걸렸는지 움직이질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거두었던 시선을 조금 올리자 티끌 하나 없이 새것처럼 반짝이는 검은 군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그 군화가 자신의 옷을 밟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성격 나쁘네.

화수가 살풋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고개를 숙인 채라 상대에게는 자신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했지만.

말 한 번 나눠보지 않았으나 그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런 상황을 맞닥뜨렸음에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는 태도와 미안하다면서도 정작 미안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과, 잔주름 하나 없는 바지며 새것처럼 광이 나는 군화, 그런 단편적인 면모만으로도 화수는 그가 남의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임을 단숨에 파악했다.

아마도 얼마 전 진 사장이 말한 이번에 본국에서 파견된다던 그 대단한 사령관이 이 사람인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런 대단한 사내가 자신의 바지를 밟고 있다는 거였다. 저 성격에 저한테 수작을 부리겠다는 것일 리도 없고 아무래도 심사가 비틀린 모양이었다. 물론 심사가 비틀린 사내를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화수였지만.

“저기, 발 좀.”

화수가 고개를 들어 부탁했다. 언제나처럼 눈꼬리를 가늘게 접으며. 그 눈웃음은 백이면 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언제나 먹히는 회심의 미소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

한 박자 늦게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본 화수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으로 이내 화수의 얼굴엔 조금 전과 같은 미소가 번졌다.

미소는 완벽했다.

다만 누구에게나 잘 먹히는 그 미소가 눈앞의 사내에게만큼은 먹히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싸늘해지는 눈동자에 화수는 조용히 웃음을 지웠다.

난감하네.

보통 화수를 보는 사내들의 시선은 두 가지였다. 욕정하거나, 경멸하면서도 그 속에 욕정이 묻어나는. 그런데 이렇게 순수한 경멸은 처음이었다. 나름 신선하긴 했으나, 발은 좀 치워줬으면 싶었다. 물론 그걸 대놓고 말할 순 없으니 그냥 바지를 포기하고 가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고 있지 말고 그만 이리 와 앉지.”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없었다. 화수의 부탁은 무시할 수 있어도 국장의 제안은 무시할 수 없었던지 버티고 있던 리 샤오가 결국 발을 떼었다.

휙.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화수가 바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내디딘다. 반라의 차림으로 그대로 문을 통과했다.

찰박찰박.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에서 마주 오던 경비가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돌렸지만 화수의 눈에 그런 것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사실 화수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 그의 얼굴을 확인한 그 순간부터. 그저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풀썩.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그 방 안에서 주저앉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화수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 웅크린 화수의 입에서 한숨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울 수는 없으니 웃는 수밖에 없었다. 감정을 숨기는 건 화수의 특기였다.

“씨발, 운하고는.”

참지 못한 웃음처럼 툭, 하고 흘러나온 혼잣말. 기운이라고는 한 톨도 남지 않은 중얼거림이었다.

“아직 정식 발령날짜는 많이 남았을 텐데.”

“예정보다 일찍 입국하게 되어서 업무 파악이나 할 겸 잠시 들렀습니다.”

“그랬구만.”

뜬금없는 방문의 이유를 파악한 경무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위험천만한 전투에서 지대한 공을 세우던 사내가 아닌가. 전장을 누비던 사내가 집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셨을 테지.

사실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 리 샤오 사령관이 갑자기 본국으로 소환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리 샤오는 피를 좋아하는 군인이었다. 물론 머리로 작전을 짜고 적의 허를 찌르는 공격도 능했지만 그는 직접 검을 들고 상대의 목을 베는 것을 가장 즐겼다. 그리고 총독이 제일 아끼는 손자이자 총사령관의 아들인 그가 위험한 전투에서 선두에 서서 싸우는 것을 집안에서는 반길 리가 없었다.

물론 집안에서 반대한다고 순순히 말을 들을 리 샤오도 아니라 그동안은 호시탐탐 기회만 보고 있다가, 마지막 전투에서 아주 작은 실수가 있었던 것을 핑계로 본국으로 불러들였고 곧바로 속국인 천圌으로 좌천시켜버렸던 것. 물론 속국이라고는 하나 거진 한 나라의 행정부나 마찬가지인 총독부의 제3 부장 자리를 좌천이라고 치부하기엔 다소 말에 어폐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당연히 불복할 줄 알았던 리 샤오가 순순히 명령을 받아들였고 속국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는 소식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지만 결국 이젠 본격적인 권력 승계의 수순을 밟는 게 아니겠냐는 의견이 가장 유력했다.

“총독께서는 건강은 어떠신지.”

“아주 건강하십니다.”

리 샤오의 전쟁을 좋아하고 피를 좋아하는 성향 자체가 젊은 시절 총독을 빼다 박은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리 샤오를 유난히 아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저보다도 더 건강하실 겁니다.”

“하하. 농담도 할 줄 아나.”

물론 경무국장은 농담인 줄 알았겠지만 카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상관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는 걸.

“다른 국장들과는 아직 인사 전이지?”

“네.”

“가볼 텐가? 바로 옆이 학무국인데.”

“아닙니다. 정식으로 날짜를 정해서 만나는 게 좋을 듯하네요.”

뜻밖의 광경과의 조우는 한 번이면 족했다.

“뭐 그럼 각국의 국장들과는 조만간 정식으로 날짜를 잡아서 인사하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가볍게 자네가 지낼 방 구경이나 하고 돌아가도록 하게. 안내는-”

“제 방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

직접 해주겠다는 듯 국장이 몸을 일으켰지만 이번에도 거절당했다. 살짝 표정이 굳는 듯했으나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경무국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직위는 자신보다 낮지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 그럼.”

가보라는 허락에 리 샤오가 목례를 한 뒤 돌아섰다. 그 돌아서는 리 샤오의 등에다 대고 경무국장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할 것 없어. 이제 여긴 사령관이 있던 전장이 아니니까.”

가벼운 충고 같지만 내용마저 가벼운 건 아니었다. 너무 나대지는 말라는 뜻이었다.

“명심하지요.”

잠시 걸음을 멈췄던 리 샤오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말이 맞았다. 여긴 아직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전장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피가 튀기고 전투가 일어나는 곳이 전장은 아니다. 어디든 전장이었다. 그래서 사실 리 샤오는 진짜 전쟁터가 좋았다. 그곳에서는 편하게 검을 휘두르고 목을 베어버리면 되니까.

앉아서 머리만 쓰는 건 성미에 맞지 않을뿐더러, 뭣보다 재미가 없었다. 물론 재미가 없다는 것이지 어렵다는 뜻은 아니었다.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다는 의미일 뿐.

“뭐 하는 새낀지 알아봐.”

복도로 나온 리 샤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보다 한발 먼저 방을 나와 이 복도를 걸어갔을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게도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던 검은 눈동자. 그것을 떠올리자 리 샤오는 그나마 무료하지는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기분이 더러워서 그렇지.

다행히 누굴 말하는 거냐는 질문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카이가 역대 보좌관들 중 가장 오랫동안 목숨이 붙어 있는 이유였다.

“이름은 화수, 홍매루라는 유곽에 소속되어 있는 남창이라고 합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리 샤오가 서류에서 손을 떼고 몸을 뒤로 젖혔다. 보고를 계속 이어가라는 뜻이었다.

“가게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상품일 뿐만 아니라 총독부 내에 꽤 많은 고위간부들이 그의 주 고객이라고 합니다. 직접 보셨다시피 돈만 내면 손님이 원하는 취향대로 출장도 마다 않고 나오는 모양이더군요. 물론 추가금이 꽤 많이 붙는 모양이지만요.”

탁. 탁.

리 샤오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들겼다. 뭔가를 생각할 때 나오는 대장의 버릇이었다. 카이가 잠시 보고를 중지하고 손가락이 멈추길 기다렸다.

“남자의 수치군.”

사내 주제에 같은 사내에게 다리를 벌리는 남창이라니. 그것도 본국에서 온 장교들을 주로 상대하는 고급 남창.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것도 곤란하지만 그건 차라리 이해라도 가능했다.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항복하는 일은 없는 리 샤오로서는 반항조차 하지 않는 화수가 더 이해가 되지 않는 존재였다. 기본적으로 저항이라도 하는 쪽이 밟는 맛은 있지 않은가.

“글쎄요. 그걸 남자라고 할 수 있을지.”

하지만 그의 말에 반박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카이에 리 샤오의 눈매가 기름해졌다.

“그건 무슨 말이야.”

“곤鯤이라는군요.”

“…….”

일순, 리 샤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런 주제에 그렇게 겁이 없다고?”

자신을 쏘아보는 날 선 눈에 카이가 곧바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물론 그 분노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괜한 불똥은 사양이었다. 리 샤오가 뿜어내는 패기는 카이조차도 견디기 힘든 정도의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는군요.”

그러니 기막혀하는 리 샤오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도 카이였다.

보통 곤은 붕의 패기에 한없이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곤은 붕 앞에서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날 마주한 그 남창에게서는 전혀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꼭 곤이 아니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맞닥뜨렸다면 부끄러워하는 게 보통 아닌가.

하지만 그에게서 그런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상황도 상황이지만 순진한 얼굴과는 다소 대조적인 행동이라 더 뇌리에 남았다. 물론 그가 뇌리에 남은 것은 카이만이 아니었다.

“감히, 곤 주제에.”

그런 주제에 그런 눈으로 날 봤단 말이지. 태연히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던 녀석을 떠올린 리 샤오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여러 가지로 신경 거슬리는 녀석이었다.

“확실한 거야?”

“제 능력이 퇴행하지 않은 이상, 확실할 겁니다.”

“하지만 분명.”

“…….”

툭, 하고 말을 던진 뒤 리 샤오의 입이 다시 닫혔다. 궁금해진 카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무슨 의심 가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자신의 정보력을 대놓고 의심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툭툭, 책상만 두들기던 리 샤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그 녀석에게서 냄새가 났는데.”

“냄새, 요.”

그 녀석과 스치는 순간, 마치 신기루처럼 코끝에 닿았다 흩어졌지만 분명 냄새를 맡았다.

“곤에게서 향기가 날 리가 없잖아.”

상대를 유혹하는 패기를 낼 수 있는 건 붕뿐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카이가 그건, 하고 입을 열었다.

“국장의 것을 잔뜩 받아먹었으니 그 냄새가 아니었을까요.”

“더러운 장면 떠올리게 하지 마.”

“죄송합니다.”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잘생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 말로 납득은 한 듯했다.

“뭐, 그런 특이한 성향 덕분에 손님들 사이에서는 더 인기라고 합니다. 겉으론 평범한 곤鯤들처럼 하라는 건 다 따르고 온순한데 정작 마음으론 굴복하지 않으니, 그게 사내들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모양이더군요. 그가 자신에게 빠져서 매달리는 꼴을 보겠다고 덤볐다가 재산만 탕진하고 돌아선 이들이 수백은 족히 넘는답니다. 보셨다시피 여전히 그 도전은 현재진행형인 듯하고요.”

“미쳤군.”

단순히 몸을 탐하는 것­그마저도 리 샤오로서는 굳이 안을 거면 부드러운 여자를 두고 왜 딱딱한 남자의 몸을,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도 아니고 굳이 사내 녀석의 마음을 얻겠다고 안달복달이라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리 샤오에 카이가 어깨를 으쓱인다.

“세상엔 다양한 취향들이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사실 다른 때라면 카이 역시 대장의 생각에 동조했을 터였다. 제 눈으로 화수를 보지 않았다면. 그날의 화수를 본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그치들의 심정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고만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묘한 매력이 있는 사내였다.

“그리고 말입니다.”

“…….”

또 뭐가 남았냐는 표정이었지만 사실 여기서부터가 진짜 보고였다.

“이곳 고위간부들에게 이 남창을 선보이고 그 뒤로 대금을 대신 대주는 이가 있는 듯합니다.”

“물론 그 안에 경무국장도 포함되어 있을 테고.”

“네. 보고드렸듯이 외부로 출장 시에는 꽤나 돈이 많이 드니까요.”

“누구야.”

“진도현이라는 사업가인데, 표면적으로는 무역업을 내세우고 있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물건들도 함께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다는 말은, 물증은 없다는 얘기군.”

“꽤나 조심성이 많은 사내더군요.”

“그렇단 말이지.”

탁. 탁. 다시 손가락이 책상 위를 부유했다.

“그렇게 대단한 사내라니, 내가 직접 한번 만나봐야겠는걸.”

카이의 정보력으로도 물증이 나오지 않았다니. 이것만으로도 상대가 어떤 인간인지 궁금해졌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리 샤오에 카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바로 확인하실 수 있겠네요.”

“무슨-”

되물으려던 리 샤오가 이내 한쪽 눈썹을 살풋 들어 올린다. 그런 대장의 반응에 아마도 그 예상이 맞을 거라고,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고 카이가 덧붙였다.

“네, 오늘 저녁 환영회 참석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 샤오의 얼굴이 확,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뭐 해?”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아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더니 그사이를 못 참고 열린 문틈으로 불쑥 머리를 들이민다.

“왜. 여기서 살려고?”

재밌어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향해 화수가 눈꼬리를 휘며 되물었다.

“본인 성격 안 좋은 거 알고 있죠?”

“어.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칭찬 아닙니다만.”

뽐내듯 어깨를 으쓱이는 진도현에 결국 그림처럼 웃고 있던 화수의 얼굴이 확 찌푸려진다.

“그래? 난 또 칭찬인 줄 알았지.”

물론 그런다고 눈 하나 깜짝할 진도현도 아니었지만.

“굳이 이런 자리에 데려올 건 뭡니까.”

하여간 악취미였다. 투덜거리는 화수를 향해 이번엔 진도현이 빙그레 웃었다.

“왜. 재밌잖아. 천하의 화수를 거부하는 사내라니.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엔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거부했다고는 안 했는데요.”

경멸당했다고 했지. 화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안 그래도 새로 온 인물에 대해 궁금해하던 진도현에게 그날의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진도현의 동행자로 그 남자의 환영회에 참석하는 영광을 얻게 된 것.

“그렇다고 네가 겁을 집어먹고 꽁무니를 뺀 것도 신선하고 말이야.”

아무래도 너무 오래 보아온 모양이었다.

화수에게 속내를 숨기는 것쯤 사내를 홀리는 것만큼이나 쉬운데 이상하게 이 눈앞의 사내에게는 속내를 들키는 일이 잦았다. 무려 화수조차 자각하지 못한 속내를.

“대체 누가 꽁무니를 뺐다고 그러십니까? 여기 와 있는 건 그럼 누군데요?”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보지만 진도현에게 통할 리 없었다. 오히려 잘됐다는 것처럼 화수를 향해 손을 내민다. 그리고 뒷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실까요, 아가씨.”

하여간 악취미라니까. 얼굴을 찌푸린 화수가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탁, 하고 쳐냈다.

“그쯤 하시죠.”

제법 매서운 손길이었지만 진도현은 기분 상한 기색 없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탁.

진도현이 붙잡고 있던 문을 놓고 자동차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자 화수가 자동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개인적으로는 평소 유곽에서 입는 화려한 무늬가 수놓인 비단 침의가 아니라 검은 양장 차림의 화수가 훨씬 좋았다. 본인은 내키지 않는 듯하지만 지금 저 금욕적인 옷 아래 어떤 몸이 있는지 아는 입장에서는, 배덕한 맛이 있달까.

“왜요. 새삼 제가 너무 예쁩니까?”

대놓고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 내리는 가는 눈을 향해 화수가 한마디 한다.

“어.”

예쁘긴 더럽게 예쁘지. 이렇게 기가 막혀하는 표정마저도 예쁜 걸 보면. 하지만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 예쁜 얼굴을 진도현은 알고 있었다.

진도현이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삐딱하게 서 있는 화수의 팔을 붙잡아 제 쪽으로 확 당겼다.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몸을 꽉 붙들면서 고개를 숙인 진도현이 나지막이 화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면 이제 좀 웃어. 꽃처럼.”

그만 까불고, 일할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천천히, 주인이 주문한 대로 표정을 그려내는 인형처럼 화수가 웃었다. 말 그대로 꽃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였다.

* * *

“이게 누구신가.”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진도현을 향해 누군가 아는 척을 해온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국장님.”

학무국장인 루지경이었다.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나 같은 뒷방 늙은이에게 특별히 좋을 일이 뭐 있겠어. 그저 앉아 있는 자리나 안 뺏기고 유지하면 다행한 일이지.”

“학무국장직이 그저 버틴다고 유지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닌 듯합니다만.”

아닌 척 겸양을 떨고 있었지만 정말로 권력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다는 걸 진도현은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사람일수록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사람일 경우가 높았다. 그리고 그렇게 미치게 가지고 싶은 권력을 가질 수 없을 경우, 인간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지려 하거나, 아예 초연한 척하거나. 눈앞의 사내는 후자일 뿐이다.

“그런가?”

“그럼요.”

그리고 그런 진도현의 추측을 증명하듯 은근히 자신을 띄우는 칭찬에 금세 루지경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정작 좋은 소식은 진 사장한테 있는 것 같던데. 이번 토목사업도 진 사장이 따냈다며.”

“다 국장님이 도와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겨우 한마디 거든 것뿐인데.”

“조만간 좋은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진도현의 말에 루지경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그 뒤에 선 화수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시선을 느낀 화수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무심히 내리깔린 새까만 속눈썹을 핥는 루지경의 눈이 욕정으로 번들거렸다.

“그나저나 아직인 모양입니다?”

연회장을 둘러보며 진도현이 화제를 돌렸다. 평소라면 루지경이 원하는 대로 화수를 넘겨주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임자가 따로 있었다.

“원래 주인공은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니까.”

다행히 루지경도 집요하게 굴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그 역시도 오늘의 주인공과 첫 대면이었다. 이 중요한 자리를 겨우 아랫도리 사정 때문에 망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금이 아니라도 시간은 많았다.

그리고 그 때였다.

갑자기 조용하던 회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입구 쪽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양반은 못 되시겠구만.”

회장으로 리 샤오가 들어오고 있었다.

웅성거리던 소음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연회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저벅저벅.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그의 발소리만이 천둥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저 걸어 들어오는 것뿐인데도 그에게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와 좌중을 압도했다. 누구도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저렇게 잘생겼다고는 안 했잖아?”

따지듯 묻는 진도현에 화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못생겼다고도 한 적 없는데요.”

최고 권력자인 정무총감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리 샤오는 간부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주위로 회장 안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덕분에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나란히 선 채 두 사람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대놓고 리 샤오의 얼굴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저 정도로 생긴 얼굴이면 가장 먼저 언급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군인 출신이라기에 당연히 우락부락한 외모를 상상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정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군인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미인이었다. 물론 진도현이 기가 막혀하는 와중에도 화수는 그저 남의 일처럼 태연히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기,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느새 간부들과의 인사는 끝이 나 있었다.

“넌.”

“전 여기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까딱. 무슨 소리냐는 눈빛에 화수가 고갯짓을 했다. 고갯짓을 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경무부장과 내무국장이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진도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꼼짝 말고 여기 얌전히 있어.”

고개를 바로 한 진도현이 경고했다. 화수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대답했다. 걱정 말라는 듯, 두 손까지 들어 보이며.

“분부대로 합죠.”

순순한 대답이 어쩐지 불길했지만 애초에 다른 선택사항은 없었다.

탁.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선 화수가 문을 닫았다.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은 캄캄했지만 상관없었다. 이 방 안의 구조는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걸음은 느렸지만 내딛는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대로 방을 가로지른 화수가 창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꺼운 커튼을 살짝 젖히고 창문을 슬며시 열었다. 아치형의 커다란 창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차가운 밤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숨통이 조금 트였다.

쏴아아아.

눈을 감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자 기분 좋은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바람에 벚꽃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였다. 이 몇 백 년은 됨직한 오래된 벚꽃나무는 올해도 어김없이 엄청난 양의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눈처럼 꽃잎이 날린다. 그중 몇 개는 화수가 열어놓은 창문까지 날아왔다. 화수가 벚꽃만큼이나 새하얀 손을 내밀었다. 눈꽃 같은 하얀 벚꽃 잎이 화수의 손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하지만 화수는 그것을 쥐지 않고 가만히 바라본다.

쏴아아.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손바닥에 놓였던 꽃잎이 다시 허공으로 날아올랐지만 화수는 그것을 붙잡지 않았다.

-!

그렇게 부유하는 꽃잎을 응시하고 있던 화수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재빨리 창문에서 물러나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커튼 뒤로 몸을 숨긴다.

저벅저벅.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냥 지나쳐 가는 발걸음이길 바랐지만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발소리가 멎었다.

끼-익. 문고리가 돌아가는 것을 본 화수가 숨을 죽인다. 문이 열렸다. 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방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확인한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인간이 왜.

방을 가로질러 오고 있는 이는 분명 연회장에 있어야 할 리 샤오였다. 눈을 의심했지만 이 얼굴을 잘못 봤을 리는 없었다. 혼란해하는 화수와는 달리 거침없이 책상으로 다가온 리 샤오가 책상 위에 놓인 뭔가를 집어 들었다.

부스럭. 소리가 난 것을 보면 서류봉투 같은 게 분명했다. 다행히 그것을 집어 든 리 샤오가 발길을 돌렸다. 점점 멀어지는 등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멈칫.

내딛어지던 리 샤오의 걸음이 일순 멈췄다. 화수의 숨도 다시 멈췄다. 멈춘 발걸음 뒤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와.”

이내 불쑥 들려온 차가운 그의 일갈에 일순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았다. 들켰구나. 화수는 늘 운이 나쁜 편이었다.

“아니면 나오게 해줄까?”

스릉. 머뭇거리는 사이 뒤돌아선 리 샤오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물론 살아서 나온다고 장담은 못 하지만.”

가벼운 말투였지만 농담일 리 없는 덧붙임에 화수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커튼 밖으로 나갔다. 화수를 확인한 검은 눈이 기름해졌다.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주인도 없는 방에서?”

“…….”

태평하게 꽃구경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과연 믿어줄 것인가는 차치하고. 머뭇거리는 화수에게 질문이 되돌아왔다.

“기밀서류라도 빼가려던 거였나?”

“그럴 리가요.”

화수가 펄쩍 뛰었다.

“전 오래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

그런 위험한 질문을 던져놓고 정작 리 샤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제야 화수도 그가 정말 의심해서 던진 질문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로 다시 나직이 묻는다. 조금 전 빼 든 검은 여전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냥은 돌려보내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얌전히 있으라던 진도현의 충고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화수가 입을 열었다.

“이 방 창가가 벚나무가 가장 잘 보이는 방이라서요.”

“…….”

믿든 안 믿든 일단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게 진실이니까.

움찔.

성큼 다가오는 리 샤오에 순간적으로 화수가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내뻗어진 손은 그대로 화수를 스쳐 커튼을 열어젖혔다.

쏴아아아아.

창문 밖으로 벚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리 샤오가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건 몰랐군.”

처음 알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리 샤오에 뒤늦게 화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이 방이.”

창밖을 향하던 시선이 화수를 향했다.

“맞아. 내 방이야.”

아. 어쩐지. 마치 자신의 방처럼 들어온다 했더니 진짜 그의 방이었다. 그제야 화수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 전 경무부장님 방인 줄 알고.”

“…….”

화수가 사과했다. 그저 리 샤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는 해명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마주한 눈동자는 조금 전과 달리 차가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어 그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거였군.”

무슨. 하지만 화수가 되묻기 전에 뒷말이 이어졌다.

“더러운 짓을 하러 쥐새끼처럼 숨어들어 있었던 거였어.”

자신을 보는 리 샤오의 눈동자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게-”

“꺼져.”

그런 게 아니라고, 오해라고, 그렇게 해명하려고 했지만 리 샤오는 화수의 변명 따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사실 화수는 뭔가를 해명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 오해로 인해 설사 미움을 받게 되더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화수가 처음으로 변명을 하려고 했다. 물론 상대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심지어 화수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경무부장의 방은 아래층이니까.”

“…….”

천천히, 화수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차가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릿속도 차갑게 식었다.

“……실례했습니다.”

화수가 돌아섰다. 방을 가로질러 문고리를 잡았다. 오해받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걸 다 알면서도 화수는 뒤돌아섰다.

“뭐지?”

되돌아오는 화수를 보며 리 샤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전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는데요.”

“뭐-”

단숨에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화수가 리 샤오의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당겼다. 입술이 눌러졌다.

의외로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죽고 싶은 모양이군.”

홱. 몸이 뒤로 밀렸다. 그대로 균형을 잃고 쓰러지지 않은 것은 목을 움켜쥐고 있는 단단한 손 덕분이었다.

마주한 눈이 흉흉했다. 여과 없이 쏟아지는 패기에 살갗이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하지만 화수는 담담했다. 애초에 그냥 웃으면서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모르고 한 행동도 아니었으니까.

“거친 게 취향이시면, 그리하셔도 됩니다.”

콱.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건방진 소리를 해대는 화수에 리 샤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로 이대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대로 뚝, 하고 부러질 것 같은 가는 목덜미였다.

하지만 마주한 새까만 눈동자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맥박이 없었다면 눈앞의 사내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도 잊을 뻔했다.

그냥 이대로 부러트려버릴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러면 자꾸만 제 신경을 긁는 듯한 거슬림도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평소 본인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리 샤오는 자각하지 못했다. 애초에 눈에 거슬리는 건 그냥 그대로 검으로 그어버리는 사람이 리 샤오였다.

“빌어.”

리 샤오가 명령했다.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녀석을 죽이는 건 사실 재미가 없잖은가. 게다가 뭣보다 저 사람 신경을 긁는 무심한 눈동자로가 진심으로 애원하는 꼴이 보고 싶어졌다.

“살려달라고 해.”

“…….”

화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목을 졸라 죽이려고 할 때도 미동이 없던 눈동자가 의아한 빛을 머금었다. 그제야 좀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살려달라고 빌면, 살려는 주시나요?”

물론 건방진 소리를 해대는 입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차라리 이쪽이 낫긴 했다. 적어도 괴롭히는 맛은 있으니까.

하지만 낫다는 거지, 그렇다고 괜찮다는 말은 아니었다.

쾅!

움켜쥔 목을 그대로 힘을 주어 밀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화수의 몸이 책상 위로 내던져졌다. 반사적으로 튕기는 몸을 리 샤오가 그대로 내리눌렀다.

“착각하지 마.”

어느새 흉흉해진 눈동자가 바싹 다가와 있었다.

“어떤 결정이 나든 넌 그냥 빌면 되는 거야.”

“…….”

바둥거리던 화수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마치 줄이 끊어진 인형 같았다.

“잘못했어요.”

인형처럼 시키는 대로 입술을 움직이는 화수에 리 샤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분명 그러길 바라고 한 행동인데, 그게 또 거슬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짜증이 일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너-”

차라리 건방지게 굴 때가 기분은 덜 나빴다. 얼굴을 찌푸린 리 샤오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들어올 때 반쯤 열어두었던 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부장!”

열린 문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빛 때문에 순간 시야가 가려졌지만 누군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카이였다.

“무슨 일-”

아마도 조금 전 났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놀라서 달려 들어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다급하게 달려 들어온 기세와 달리 안으로 들어선 뒤로는 그대로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카이의 예상을 넘어선 광경이었던 것.

오히려 상황파악이 빨랐던 건 카이의 뒤를 따라 들어온 또 다른 사내, 진도현이었다.

“제 동행이 무슨 실수라도.”

일단 태연한 척 묻고 있었지만 사실 진도현도 적잖이 놀랐다. 녀석이 보이지 않을 때부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작금의 상황은 천하의 진도현조차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의 방에 함부로 숨어들면 안 된다는 걸 가르치고 있었지.”

아.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던 진도현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무너졌다. 짧은 설명이었지만 그 말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녀석이 워낙 오냐오냐하는 손님들이 많아 버릇이 없습니다.”

겁도 없이 다른 사람도 아닌 제3 부장의 방에 숨어들다니. 그것도 하필 그가 환영회를 위해 방을 비운 틈에. 첩자로 의심받아 그대로 목이 날아갔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지금도 목이 안전해 보이진 않았지만.

“모든 게 실수다?”

굳이 손님 운운하며 녀석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화수에 대한 의심을 거두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걸 굳이 콕 집어 언급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방 주인이 바뀐 걸 몰랐던 모양입니다. 정히 의심이 가시면 경무부장님께 확인시켜드리겠습니다.”

“…….”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초조한 기분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눈앞의 사내는 맹수였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대로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 분명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철컥, 철컥. 벽에 걸린 괘종시계의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였다. 그때까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카이가 조용히 침묵을 깼다.

“당장 죽여버리실 게 아니라면 버릇은 나중에 가르치시는 편이 어떨까요. 총감님께서 찾고 계셔서요.”

겁도 없이 나선 듯 보이지만 사실 카이도 다 상황을 파악하고 끼어든 것이었다. 애초에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미 침입자를 발견한 순간에 죽여버렸을 테니까. 사실 별것 아닌 존재라 살아남은 것이기도 했다. 고작 저런 사내의 목을 부러트리는 것쯤, 리 샤오에게는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말 그대로 버릇을 가르치고 있던 게 맞았다.

뭐 이쯤 하면 멍청이가 아닌 이상 알아들었을 테고,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카이가 조용히 끼어들었던 것. 사실 총감이 찾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지만 연회의 주인공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휙.

그런 카이의 추측을 증명해주듯 리 샤오가 붙잡고 있던 화수의 목덜미를 내던지듯 놓았다. 목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꺼져.”

화수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위태롭게 걸음을 내딛던 화수가 몇 걸음 걷다 무릎이 꺾여 무너졌다.

“화수야!”

다행히 재빨리 손을 내뻗어 붙잡은 진도현 덕분에 바닥에 고꾸라지는 꼴은 면했다. 진도현이 화수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 손을 화수는 밀쳐냈다. 그리고 제 발로 걸었다.

이 와중에도 고집스러운 화수를 찌푸린 얼굴로 보던 진도현이 뒤돌아서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번 실수는 아무쪼록 잊어주시고 이후 제대로 대접하는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연락드리죠.”

이미 고개를 돌려버린 리 샤오를 대신해 카이가 예의상 대꾸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한 진도현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쿵.

작은 소리와 함께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말도 없이 사라지셔서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서신을 두고 간 게 생각나서.”

아. 본국에서 온 서신을 오늘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게 카이도 생각났다.

“그런 건 절 시키지 않으시고요.”

“…….”

이번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카이도 크게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허리를 굽혔다. 조금 전 두 사람의 몸싸움으로 잘 정리되어 있던 책상 위 종이들이 흩어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던 것.

“창문을 여셨습니까?”

종이들을 하나씩 주워 들던 카이가 이번에도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멈칫. 옷매무새를 다듬던 리 샤오가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되묻는다.

“무슨 소리야?”

묘하게 날카로워진 기색을 카이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자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나운 시선과 곧바로 마주했다. 별 질문도 아닌 말에 이토록 날카로워진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카이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꽃잎이, 떨어져 있어서요.”

그곳에 떨어져 있는 건 분명 연분홍 꽃잎이었다. 창문 밖 거대한 벚꽃나무의 것이 너무도 명백한.

리 샤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자국 남겠네.”

어느새 따라잡은 진도현이 화수의 옷깃을 벌려보곤 얼굴을 찌푸렸다. 화수는 말없이 그 손을 밀쳐내고 옷깃을 더 올렸다. 그래 봐야 이미 선명하게 드러난 자국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왜 그랬어.”

“…….”

다시 가던 길을 가려는 화수의 어깨를 진도현이 붙잡아 돌렸다.

“실수 아니었잖아. 너.”

실수라고 변명해주었으면서 정작 진도현조차 믿지 않고 있었다. 화수의 동공이 조금 커졌지만 이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눈꼬리가 휘었다. 덕분에 바로 앞에 선 진도현에게도 그 변화를 들키는 일은 없었다.

“일부러 알고 들어간 거지.”

“알면서 뭘 굳이 물어요.”

화수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화수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상대가 멋대로 오해하면 그냥 그 사람이 만들어낸 허상대로 연기해주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그런데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왜 그랬어.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녀석이.”

무모한 듯하지만 결국 상대를 원하는 대로 굴복시킬 수 있던 건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렸을 때부터 험한 생활을 해온 화수는 상대의 속내를 읽는 데 귀신같았다. 뭣보다 자신에게 욕정하는 사내들을 알아보는 재주가 비상했다.

그런 녀석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다니. 이상하긴 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괜히 제가 재밌어하며 도발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건가 싶어 조금은 죄책감마저 드는 진도현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남의 일마냥 시큰둥했지만.

“그러게요.”

“하.”

진도현의 얼굴 위로 기막히다는 표정이 번졌다. 하지만 사실 가장 기가 막힌 건 화수 자신이었다. 왜 그랬지, 진짜. 더럽다고 무시당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조금 전에 죽을 뻔한 거 알기나 해?”

“그럼요.”

단순히 방에 숨어들었다고만 알고 있는 자신이 감히 리 샤오 부장에게 멋대로 달려들어 입맞춤을 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긴 했다. 사실 화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도.

“부드러웠지.”

기억을 떠올린 화수가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뭐?”

그러다 고개를 들자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진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미친 건가. 그 꼴을 당하고도 좋았다고 생각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혀서 화수는 피식, 하고 웃었다. 진도현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그만 가요.”

“너-”

“집에 가고 싶어.”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건 반칙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뭐라 한마디 해주려던 진도현의 입이 도로 닫혔다.

“대신 오늘은 뭐든 하게 해줄게요.”

눈을 접어 사람 홀리는 미소를 지은 화수가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간다. 진도현이 자신을 집에 데려다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는 듯. 그런 화수를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진도현도 결국은 포기한 듯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남의 속을 읽는 데는 귀신같은 화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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